Chapter: 558
느릿하게 눈을 뜬 요정들의 여왕은 주변에서 흘러들어오는 꽃향기에 취해 웃음을 흘린다.
– 여왕님!
– 오늘도 예쁘세요!
– 꽃 가져 왔어요!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여왕이 눈을 뜨기 무섭게 그녀의 주변으로 다가 온 요정들은 저마다 가지고 온 꽃을 자랑하며 서로가 잘났음을 주장한다.
이런 투정들에 익숙한 여왕은 모두 다 아름답다면서 요정들을 달래다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란을 듣고 고갤 갸웃했다.
“바깥에서 손님이 찾아오셨나요?”
– 네! 멋진 사람들이 잔뜩!
– 다들 엄청 대단해요!
– 맞아! 대단해!
요정들이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보면 바깥에서 찾아 온 손님 분은 필시 한없이 영웅에 가까운 분들이시겠죠.
그러고 보면 얼마 전 다른 숲에서 이 곳으로 용사 일행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여 위대하신 주신께서 직접 선택한 영웅분들이 이 곳에 오신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들. 혹여나 싶어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만 지금 그 분들에게 장난을 치고 있습니까?”
– 네!
– 아무것도 안 통해요!
– 다들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해써요!
– 조금만 더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입술 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던 요정여왕은 잘했냐고 물어보는 요정들에게 애써 칭찬의 말을 건넨 후 다급히 소란이 일어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 분들은 위대하신 주신께서 요정의 숲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영웅 분들! 결코 그 분들에게 폐를 끼쳐선 안 돼!
이처럼 빨리 달린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결사적인 속도로 내달린 요정여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정들의 장난에 휘말리고 있는 용사 일행을 발견했다.
“…이렇게나 고결해야 주신께서 친히 간택하시는 거군요.”
요정여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찬사는 그녀의 경외와 함께 꿈의 바깥으로 흘러나와 어둠으로 가득한 숲에 퍼져나간다.
허나 여왕의 잠꼬대를 들어줄 이는 숲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에 잠식되어버린 요정들은 오래 전에 이지를 잃어버렸고, 숲을 이루어야 할 생명들은 말라비틀어진 대지 위에선 새싹조차 피우지 못하는데다가, 결계 안을 가득 채운 악신의 기운은 새로운 주인의 아래에 오롯이 순종할 따름이니.
“…님.”
여왕의 흐뭇한 미소와 함께 흘러나오는 부름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을 들었을 위대한 대마법사에게도. 갑작스레 나타나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 했던 꼬마아이에게도.
“저는…”
여태까지 수백 수천 번은 꾸었을 행복한 꿈을 반복하던 그녀의 뒤척임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커져만 간다.
이지를 잃은 채 오롯이 여왕에게 종속된 요정들은 그 뒤척임을 바라보며 직감했다.
여왕의 꿈이 머잖아 끝날 것이란 사실을.
*
“젠장. 내가 직접 결계 인근에 다가갔던 것이 패착이었나.”
요정여왕, 정확히는 닭장의 조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달하자 에르기누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각이 깨어나 숲에 개입할 정도라면 그녀가 깨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여유를 부릴 틈은 없어.”
“그렇다면 마법이 준비되는 대로 숲에 공세를 가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에르기누스와 함께 이야기를 듣던 베네딕이 물음을 던지자 에르기누스가 고갤 내젓는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만 그 전에 선결과제가 존재한다. 결계가 무너지기 전에 저 안에 진입해 악신의 기운을 집약시켜야 해. 그러지 않으면 어둠의 악신이 지닌 기운이 세상으로 퍼져나갈 테니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모인 맹자들이 몇인데 그 정도야.”
“문제는 허락 받지 못한 녀석들이 결계 안에 들어가면 높은 확률로 요정여왕이 깨어날 것이란 점이다.”
환영받지 못하는 자가 무작정 결계의 안에 들어간다면 요정여왕은 그 불쾌함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러면 오랜 기간 숲 안에서 힘을 길러 온 요정여왕이 직접 불안정한 결계를 부수어버릴 테고 그녀의 존재가 재앙이 되어 세상에 퍼져 나가겠지.
“허락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 루시가 찾아헤매던 이들에 대한 것입니까.”
“정확하다.”
“…그렇단 것은 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오늘 그 곳에 다녀온. 루시와 그 친구들뿐이겠군요.”
“본래는 내가 직접 따라 붙을 생각이었다만 내 존재가 여왕의 잠을 방해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럴 순 없겠지.”
베네딕과 에르기누스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에르기누스의 눈에는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만으로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거겠지.
반대로 베네딕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걱정과 믿음이었다.
나와 친구들이 괜찮을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면 분명 기적을 일으키리라 여기는 것이다. 아마 과거 내가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직접 두 눈에 담았기 때문이리라.
“루시 알른.”
“왜?”
“가능하겠나?”
한참 고민하던 에르기누스가 내뱉은 질문에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가능하겠냐니. 지금 이 상황에서 물어볼 소리야?
“찐따마법사님께서 현실 감각이 모자란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머리가 텅텅 비어있을 줄은 몰랐네요. 지금이 그딴 소리 할 때에요?”
“상황의 여의찮은 것은 안다. 그렇지만.”
하. 진짜 이 인간 재잘재잘 말 많네. 용사의 동료였던 시절에도 이랬으려나? 그랬다면 진짜 매일매일 턱을 갈기고 싶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에게 물음을 던지려던 나는 방금 전 얼빠여우 침범벅이란 극악 처벌을 할아버지에게 가했단 걸 떠올렸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벌을 조금 뒤로 미룰 걸. 아쉽지만 내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나.
얼굴에 짜증을 잔뜩 담은 채로 에르기누스에게 다가간 나는 그의 의문 어린 얼굴을 무시한 채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의미 없다. 어차피 내 몸은 의태니… 끄헉!?”
신성을 잔뜩 담은 주먹에 얻어맞을 거라 예상하진 못한 듯 에르기누스는 처절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제가 귀여운 목소리로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물어볼 게 아니라 부탁하라고. 에르기누스님께선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버러지이신가봐요?”
찐따마법사의 들을 의자 삼아 앉은 나는 부들부들 떠는 그의 머리를 두드리며 대답을 촉구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네에. 네에. 전 빌어먹을 꼬맹이랍니다. 당신은 그 빌어먹을 꼬맹이한테 고개 숙여야하는 찐따고요.”
빈정대는 목소리에 다시금 입을 다물었던 에르기누스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치켜 들었다.
“…여왕의 조각께서 시간이 얼마 남았다고 그랬지?”
“뇌가 썩은 닭장 아줌마의 말을 믿는다 치면 아슬아슬하게 일주일 정도?”
“그렇다면 앞으로 준비기간을 5일 정도로 잡고 6일째에 결행을 하는 걸로 하면. 베네딕 알른. 군사의 배치는 언제쯤 완료되지?”
“소집은 거의 끝났으니 삼 일 정도면 완벽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시 준비해주게. 이 쪽도 이 쪽대로 최선을 다할테니까.”
여자아이의 탈 것이 되어 바닥을 기면서도 멋진 척 목소리를 내던 에르기누스를 비웃어준 나는 얼빠여우에게 당하고는 두고보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할아버지를 수거한 후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조이는 에르기누스님께 불려갔다. 속성으로 배워야 할 게 산더미라더군.”
앞으로 밤을 새워가며 마법을 배워야 할 조이를 제외한 전원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겉옷을 벗어 내 새로운 갑옷을 시연했다.
“여. 영애님. 왜. 왜 그런 남사스러운 갑옷을!?”
얼굴이 시뻘개진 페이비는 다급히 한 손으로 콧가를 가리며 고갤 돌렸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루시 알른! 빨리 겉옷을 입어라!”
순간 멍하니 날 바라보던 아서는 기겁을 하면서 두 손에 자신의 눈을 가렸으며.
“결국 이 갑옷을 택하셨군요.”
몇 번이고 이 갑옷을 봐왔던 칼은 이마를 짚었고.
“멋진 갑옷이긴 한데 너무 베기 쉬울 것 같아.”
프레이는 오롯이 실용성의 관점에서 갑옷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 갑옷을 입을 때부터 불평이 나오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습의 자리에서 이 갑옷 같지 않은 갑옷을 입고 나온 이유는 이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개허접 변태들. 이럴 때도 야한 생각밖에 못하는 거야? 이딴 녀석들을 동료라고 데리고 다녀야 한다니 진짜 끔찍하네.”
“과. 과연! 무언가 의도가 있으신 거군요! 그쵸! 그렇지 않고서야 영애께서 이런 망측한 갑옷을 입으실 리가 없죠!”
“이유? 뭔데?”
“훈련이야. 숲에 자리 잡은 벌레들한테 홀리지 않으려면 이런 거에 익숙해져야지.”
내 예상이 맞다면 요정여왕의 조각이 내게 선사했던 던전은 결계 안에서 펼쳐질 일의 축소판일 거다.
수백년을 그 안에 처박혀 있었는데 그거 말고 다른 걸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인생패배자마냥 잠만 죽어라 쳐 잔 녀석의 조각이 어느 정도의 창의성을 지니고 있을지 상상해보면 내가 내린 답은 옳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요정의 유혹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요정의 춤에 홀려 어떤 멍청한 짓거리를 하게 될지 모르니까.
“결계 안에 처박혀 있는 벌레들이 어떤 걸 보여줘도 나보다 예쁠린 없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적응하면 그 벌레들이 난리를 쳐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
요정의 춤이 지닌 효과는 지난 번 제 1기사단과의 대결에서 익히 확인을 했다.
왕국의 정예들조차 견디지 못한 매혹에 버틸 수 있게 된다면 요정들의 장난에 당할 일은 없을 터.
“잔뜩 포상을 줄테니까 기뻐하면서 밟히도록 해. 허접들.”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하자 네 사람, 아니 아직도 고갤 처박고 있는 아서를 제외한 세 사람이 느릿하게 고갤 끄덕였다.
아서 쟤 또 왜 저렇게 허접처럼 구는 거야. 한시가 급한데.
짜증이 난 나는 뚜벅두벅 걸어서 고갤 숙인 아서와 눈을 마주쳤다.
벌개진 얼굴. 입을 가린 손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피. 갈 곳을 잃어버린 눈동자.
“흐응.”
곤란하네. 아직 제대로 된 건 시작도 안 했는데 이 꼴이라니. 어쩔 수 없지. 극약처방을 좀 할까.
“변~태♡ 역겨워♡”
열이 올라서 다른 건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들려고 도발을 했지만 내 선택은 옳지 못했다.
히죽 웃는 날 바라보던 아서가 휘청하더니 이내 뒤로 고꾸라져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