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0
친구들에게 요정의 유혹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을 시켜 준 첫 날. 나는 진지하게 혼자서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아서 얘는 일어나 있는 시간보다 땅에 널부러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날 붙잡으려는 프레이의 움직임은 평소와 달리 예리하지 못했으며, 페이비는 멍하니 날 바라보느라 해야 할 일을 까먹기 십상이었으며, 칼조차도 내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움직임을 놓치길 반복했던 것이다.
에르기누스의 가르침이 끝나고 우릴 구경할 겸 해서 찾아 온 조이도 다른 바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채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온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그녀는 요정의 춤 앞에서 마법조차 제대로 다루질 못했다.
이런 상태로 얘네들을 숲에 들어가면 난장판이 될 게 뻔하잖아. 이래서는 진짜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는 수준이라고!
며칠 수련한다고 이 허접들이 나아질까 의심하던 나였지만 친구들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내 의심이 잘못된 것이란 사실을 증빙했다.
이틀 째가 되었을 무렵에는 당연하단 듯 내 눈을 마주할 수 있게 됐고. 사흘 째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나흘 째엔 요정의 춤에 대응함과 동시에 갑옷의 기능에 이끌리는 기운마저도 완벽히 정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나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아서였다. 처음에는 건드릴 때마다 휘청거리던 허접이 나흘이 지날 무렵에는 갑자기 쿡 찌르고 들어와도 태연히 대답을 하게 되었으니까.
물론 꾸준히 장난을 치면 버티는데 한계가 오는 듯 했지만 그거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니까 말야.
<이 정도면 요정들의 춤을 마주하더라도 흔들릴 일이 없겠구나.>
‘그런가요? 아직 좀 어설프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춤의 당사자가 루시 너라서 그렇다. 타락한 요정들의 춤 따위로는 너만큼 빛을 낼 수 없어.>
할아버지의 장담을 듣고서 안도한 나는 친구들에게 숲에 들어가기 전까지 쉬란 말을 전했다.
저 안에 들어갈 때에는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하니까.
우리가 숲 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동안 요정의 숲 인근에 모인 이들은 빠른 속도로 준비를 해나갔다.
에르기누스는 조이를 가르침과 동시에 파트란의 마법부대를 이용해 마법을 완벽히 설치한다는 기행에 성공했고.
다른 부대들 또한 미리 정해 둔 위치에 깔끔하게 정렬했으며.
페이비가 중심이 된 교회의 성직자들은 아르테아 백작 가에서 제공한 성물을 가지고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준비된 6일 째의 새벽. 동이 틀 무렵 모인 나와 친구들은 다시금 요정의 숲을 향해 나아갔다.
“이전에 비해 검은 기운이 강해진 듯 한데.”
“3왕자님이 느끼는 게 옳을 겁니다. 저도 그리 생각하니까요.”
“요정여왕이 잠에서 깨어나는 여파인가.”
요정의 숲은 우리가 처음 발을 들였을 때보다 훨씬 더 끔찍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말라서 비틀리다 못해 기괴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나무는 도저히 지상의 식물이라 부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랜 가뭄 속에서 갈라진 대지에선 쉴 새 없이 악신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검은 것들이 뭉쳐 만들어진 생물은 진화 속에서 결코 만들어질 수 없을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옅게나마 요정의 형체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이제 도저히 요정이라 부를 수 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 #%@!
– #^#%
– &(^$
인간의 인지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내며 우리의 주변을 빙빙 도는 이들은 우리에게 생리적인 불쾌함을 선사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악신의 기운에 오염된 것과는 별개로 저들이 요정의 인식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요정들은 우리를 적대하지 않았다.
“마냥 안심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 에르기누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언제 요정의 특징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하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결코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에르기누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온 조이가 꾸준히 경고를 건넸으니까.
쉬지 않고 발을 움직인 우리들은 지난 번보다 빠른 속도로 결계의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정작 하늘에 떠오른 해를 볼 순 없었다.
결계 안에서 흘러나온 악신의 기운이 숲을 뒤덮어 검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기에.
“결계 바깥도 이 꼴인데 대체 안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게. 완전 재밌을 것 같아.”
“이런 것에 재미를 느끼는 건 너 뿐이다. 프레이 켄트.”
조이가 결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 아서와 프레이가 여느 때처럼 티격태격거렸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속으로 한 생각을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무척 멀쩡할 것 같은데요.’
지금 이 숲에 자리한 기운은 완전히 요정여왕의 제어 안에 들어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들이 공격당하지 않는 게 말이 안 되니 분명하다.
결계 바깥에 있는 기운조차도 악신의 의지를 물리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요정여왕이다.
자신의 영역 내에서는 이 기운에 담긴 권능마저도 제 것처럼 다룰 수 있다 보는 편이 옳겠지.
“여러분들. 준비하세요.”
조이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 생겨난 게 보였다.
“실수한 부분 없는 거 맞지. 얼빵아?”
“…있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루시. 이 너머에 자리한 존재는 저희가 들어오는 걸 환영하고 있거든요.”
결계를 매만지는 동안 방해를 받긴 커녕 오히려 권한을 넘겨받았다는 조이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헛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렇단 건 함정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단 소리 아닌가?”
“괜찮을 거에요. 무능왕자님. 나잇값도 못하고 여전히 꿈을 꾸는 닭장여왕님께선 그럴 지능이 없거든요.”
요정여왕이 함정을 판단 생각을 할 만큼 이성이 돌아왔다면 결계가 멀쩡할 리 없다.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그렇기에 요정의 기준을 통과한 우리들을 저 안으로 초대하려는 것이다.
“이제와 쫄아서 도망치겠다는 말은 안 하겠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 나는 방패와 메이스를 다잡으며 동료들의 면면을 살폈다.
“도망칠 거였다면 여태 고생을 하지도 않았다.”
아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고.
“왜 도망쳐? 재밌는 게 가득일 텐데.”
프레이는 내 질문을 이해하질 못했다는 듯 고갤 갸웃했고.
“영애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그 끝이 지옥이라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페이비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너무도 무거운 말을 내 어깨에 얹었고.
“아가씨의 호위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검집 위에 손을 올려뒀고.
“혹시 저한테도 도망칠 권리가 있나요?”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얼빵아? 넌 지금 마법도구라고. 인권은 없어!”
“그럼 왜 물어보신 건가요.”
“무섭다고 질질짜면 비웃어주려고.”
내 대답을 들은 조이는 키득거리며 내 뒤편에 자리했다.
그런 친구들이 이상할 정도로 믿음직스러워서 히죽 웃은 나는 심호흡을 하고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퀘퀘한 냄새가 나는 닭장여왕을 놀리러 가볼까.”
탱커답게 선두에 서서 문을 넘은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어둠으로 물들어 있던 색이 다시금 색을 얻는다. 파랑과 하양이 뒤섞여 있는 하늘은 봄날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쾌청하다.
살짝 시선을 내리면 짙은 초록으로 물든 나무들이 보인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지만 그렇다 하여 태양마저 가릴 정도는 아닌 나무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게 이런 거구나 생각하게 될 만큼 멋졌다.
다시 나무의 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나비들이 보인다.
수풀 아래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도망치는 자그마한 동물들이 보인다.
빠른 속도로 뛰어다니다 잠시 멈춰 서서 날 구경하고 다시금 떠나는 사슴이 보인다.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꽃들이 보인다.
꽃잎의 뒤편에 숨어 가만 날 바라보는 요정들이 보인다.
“…이건 도대체.”
“어찌 어둠의 아래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이런 건 못 들었는데요.”
“치이. 시시해.”
“신경을 계속 곤두세우십시오. 여긴 적진입니다.”
자신들의 상상을 아득히 벗어난 풍경에 할 말을 잃어버린 친구들을 칼이 다그친다.
실전에 익숙한 기사가 옆에 있는 게 이럴 땐 편하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분위기를 잡아주니까 말야.
“아가씨. 어찌 생각하십니까.”
“예상했던대로야. 뇌에도 곰팡이가 피었을 닭장여왕님은 역시 뻔하네.”
지난 번 버로우 영지에서 어둠의 악신이 만들어낸 던전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저택의 풍경 속에서 현실의 모습을 찾아 헤매야했다.
지금도 그 때와 같을 거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광경은 모두 다 악신의 권능이 보여주는 거짓.
감각 너머에 자리한 풍경은 바깥보다 끔찍하면 끔찍했지 덜하진 않을 터.
“루시. 그럼 악신의 권능을 물릴까요?”
“활약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지금은 좀 짜져있어. 얼빵아. 아직은 때가 아냐.”
우리의 목표를 착각해선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요정여왕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숲의 중추에 들어간 후 어둠의 악신을 풀어 그가 이 곳의 모든 기운을 집어삼키게 만들고자 하는 거다.
그러니 굳이 요정여왕의 꿈을 방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우린 현실을 알더라도 여왕의 꿈에 어울려줘야 한다.
여왕이라는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광대노릇을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니까.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들은 금새 상황을 이해하고 무기를 내려놨다.
“광대노릇하는 거야 쉽지.”
“맞아요. 사교계에서 지겹도록 해 온 일이 이거니까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도 이런 일엔 자신이 있답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보던 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옆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단 듯 내 옆에 자리하던 프레이는 내 눈빛을 받아내곤 고갤 갸웃했다.
“왜?”
“바보 검사.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어?”
“왜 그래야 해?”
“흐으응. 못하는 구나? 그래. 바보 검사 수준은 딱 그 정도니까. 어쩔 수 없지. 너 따위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야.”
“아냐! 할 수 있어! 나 완전 잘 할 수 있어!”
살살 긁어주자마자 눈빛이 달라진 프레이를 본 나는 일이 다 끝나면 놀아주겠다 약속을 하고 고갤 들었다.
그러자 미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들이 보였다.
“뭔데. 허접들아.”
“저. 그. 영애님.”
“그으. 루시. 그게.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루시 알른.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총대를 맨 아서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한 말은 지극히 옳았다.
음. 으으음. 으으으음. 그렇네!?
일이 벌어지고 난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내가 뭘 해도 마이너스밖에 안 될 거 아냐!
좋아! 닥치고 있자! 어쨌건 난 입만 다물면 초미인이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단 의미에서 입을 다물고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자 친구들이 다급히 고갤 돌리고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뭔데.
또 뭐가 불만인데.
이렇게 하란 거 아냐?
– 야! 너희!
– 안녕!
– 짱 멋진 인간들이다!
미간을 찌푸리고서 되물음을 던지려던 순간 꽃 뒤에 숨어있던 요정들이 일제히 튀어나와선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 여왕님이 너희 데리고 오래!
– 여왕님이 부르셔!
– 극진한 영광!
– 빨리 가야해!
쯧. 일단은 뒤에서 얌전히 대기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