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1
작전의 결행일. 루시 일행이 새벽에 숲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뮤러는 최전선에서 서슬 퍼런 눈으로 숲을 바라봤다.
여러 숲의 주인을 이끄는 입장일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 된 숲의 주인 중 하나인 그는 과거 요정의 숲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했다.
그렇기에 썩어버린 숲을 보면서 다른 이들보다 더 커다란 걱정을 품었다.
요정여왕이 지닌 힘은 강대하다.
과거 그녀가 깨어 있었을 무렵에는 세상의 모든 숲에 여왕의 권능이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계획이 실패한다면 지상에 자리한 모든 숲이 위험해지겠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저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다만.
‘아하핳. 흙이 잔뜩 묻은 더러운 멍멍이는 집에 들어갈 수 없거든? 바깥에서 처량하게 대기나 해. 그게 짐승 냄새 나는 너한테 어울리는 꼴이니까.’
과거 큰 도움을 받았으며 이번에도 또 다시 도움을 받게 된 아이의 얼굴을 떠올린 뮤러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붙잡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자다.
이 세상에 자리한 그 누구보다도 신화에 가까운 존재야.
그러니 믿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지만 마음 한 켠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군.
“뮤러님.”
리나의 목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온 뮤러는 어느새 튀어나온 손톱을 집어넣고서 옆쪽으로 고갤 돌렸다.
“무슨 일이지?”
“지금 다른 숲에 머무는 자들과 연락이 됩니까?”
“멀지 않은 곳이면 된다.”
“1시간 단위로 연락을 교환해 주세요. 문제가 생겼을 때 이상이 생기는 첫 장소는 숲일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뮤러는 다른 숲의 주인들에게 연락을 해달라 부탁하고서 다시금 숲을 바라봤다.
“뮤러님. 당신께선 저 숲이 아름다웠던 시절을 알고 계시죠?”
“그래. 신화의 시대는 그 어떤 때보다도 숲이 아름답던 시절이었지.”
단순히 요정의 숲에 한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과 인간이 함께 노닐던 그 시대의 자연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융성해있었다.
그것은 여러 신들이 숲에 좋은 영향을 끼쳐 주었기 때문이었고.
현대보다 훨씬 더 많은 마력이 자연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요정들이 자연의 곁에서 보살핌의 손길을 내밀기 때문이었다.
“요정여왕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루시한테 물어봐도 닭장이라고만 그래서.”
“닭장? 그건 무슨 표현이지?”
“아마 닭장 냄새가 나는 아줌마란 소리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 분이? 무언가 잘못 안 것 아닌가?”
신화의 시대에도 숲의 주인이었으며 강대한 늑대였던 그는 도저히 요정들의 호감을 살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요정들이 이야기하기를 ‘너무 무섭게 생겼어!’‘잡아 먹힐 것 같아!’‘싫어어어어!’ 라고 했던가.
하여튼 외견적인 부분 이외에는 결격사유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는 요정여왕의 호의로 그녀를 마주할 기회를 얻었었다.
“요정여왕님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느낀 것은 순수였다.”
“하얀색이었단 건가요?”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군. 음. 왜 인간들 중에서 말을 가지고 치열하게 다투는 자들이 있지 않나. 그들이 싸우는 주제 중 하나는 악이 어디서 시작되느냐 하는 것이지.”
태어날 때엔 선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 세상을 살아가며 검정으로 물든다 이야기하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태어날 때부터 악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 세상 속에서 규율을 배운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숲의 주인인 뮤러의 관점에선 실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산단 생각밖에 안 들지만 그들의 주장을 들어서 좋은 점은 있다. 이럴 때에 그들의 말을 빌릴 수 있으니까.
“요정여왕님은 태어날 때부터 순수로 태어나 영원을 순수로 살아가는 분이다. 닭장이라는 불온한 표현이 끼어들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순수로 태어나 오염될 일이 없기에 순수로 살아가는 요정들과는 다르다.
요정여왕이라는 존재는 세상을 알면서도 순수로 남을 수 있는 존재다.
이 사실을 깨닫고서 뮤러가 얼마나 큰 경외감을 느꼈던가.
그 분이 어둠에 물들어버린 지금으로써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뮤러는 그 감동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저는 그런 게 궁금한 게 아니라 외견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건데요.”
먼 과거를 떠올린 뮤러가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지만 리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신랄했다. 그래. 그대는 예전부터 이런 짐승이었지.
“…내가 보았던 지상의 생명 중에서 그 분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거다.”
“루시보다도?”
“알른 가문의 영애말인가. 음. 으으음.”
상대의 외견을 가지고서 비교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렵군. 나로써는 둘 다 아름답다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어.
한참이 지나도 뮤러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본 리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될 테니 그 때 제가 평가하도록 하죠.”
“정말 그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수백년 간 악신의 기운에 잠식되어 온 요정여왕님을?”
“물론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루시는 불우한 이들을 구원하지 않고선 못 견디는 바보니까요.”
애정이 잔뜩 서린 리나의 말에 슬그머니 눈을 돌린 뮤러는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 웃음을 지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 가치 있나 없나 정도로만 여기던 아이가 이젠 사적인 감정을 품게 되었나.
좋은 현상이야. 이 또한 주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있기 때문일까.
…물론 리나가 루시 알른이란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다소, 아니 상당히 과한 부분이 있긴 하다만 시간이 지나면 자제하는 법을 터득하겠지.
아직은 서투를 뿐이니.
서투를 뿐이겠지?
미움 당할 것을 알고서도 저딴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부디 내가 좋은 방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좋으련만.
“뮤러님.”
“흠?! 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딱히 의심한 것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저 쪽.”
리나의 손가락을 따라 고갤 돌린 뮤러는 요정의 숲 결계에 이상이 생긴 것을 확인했다.
안에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군. 요정 여왕의 꿈이 방해를 받고 있는 건가.
“기사들에게 가서 알려라. 개전의 시간이 다가왔다고.”
“이미 연락해뒀답니다. 전 유능하니까요.”
“그것 참.”
“너무나도 유능한 저는 뮤러님께서 절 변태라고 생각했다는 것도 알고 있답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단 증거는 있나?”
“없지만 무척 양심적이신 뮤러님께선 거짓말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리나는 누군가와 닮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뮤러에게 있어 그 미소는 장난스럽다기보다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그 입가에 담긴 위압감이 전혀 달랐다.
“다음에 한 번 더 선물을 가져다주시길 바랄게요.”
“장신구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하. 그래. 최선을 다해보마.”
*
“에르기누스님!”
“안다. 준비해라.”
숲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을 느낀 에르기누스는 명상을 끝마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묘지처럼 불길하고 고요했던 숲이 진동하는 것이 보인다. 요정여왕의 꿈이 방해받고 있는 것이다.
“여왕이여. 조각에게 부탁해 자신을 죽여달라 그랬다지?”
에르기누스도 안다. 그것이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말이다. 그딴 방식으로 해결할 것이었다면 수백년을 기다리진 않았을 거다.”
그 선택지를 고르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이면 족하다.
그렇게 되기 전까진 할 수 있는 모든 발악을 해 봐야지. 모든 것을 후대의 아이들에게 짐처럼 맡겨 놓은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부디 기적이 일어나기를.”
신화의 시대에도 하지 않았던 기도를 하늘에 올린 에르기누스는 파트란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 있잖아. 여왕님은 지인짜 예뻐!
– 응! 어느 꽃보다 향기로우셔!
– 항상 여왕님 곁에 있고 싶어!
– 여왕님이 웃는 걸 계속 보고 싶어!
루시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페이비마냥 쉴 새 없이 여왕에 대한 찬양을 더하는 요정들의 모습에 조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르기누스님께 환각에 대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까. 화려한 저들의 모습 뒤에 감춰진 추악함이 보인다.
해맑아보이는 웃음의 뒤에는 무표정한 인형의 얼굴이 숨어있다.
아이들이 내뱉는 순수한 목소리 뒤엔 추악함이 감추어져있다.
상쾌한 숲은 사실 어둠으로 뒤덮여있으며 이 곳에 자리한 생명 중에서 제대로 된 것은 어느 것도 없다.
아니. 애초에 생명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수백년 전에 죽어버린 숲은 지옥이 되어 망자들을 가두어 두고 있을 뿐이다.
…다른 분들이 이걸 아예 못 느끼고 있을리는 없어.
루시는 말할 필요도 없고. 페이비도 주신의 신성을 품고 있는데다가. 켄트 영애나 칼 교수님은 일정경지에 도달한 무인이니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3왕자님도 아마 어떤 식으로건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네. 저 분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어금니에 과하게 힘을 주시니까.
모두 위화감을 느끼고 있어.
그럼에도 요정의 이야기에 맞추어서 웃고 있어.
나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걸 버티고 있는 게 아냐.
후우. 괜찮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한 척 하는 건 익숙하잖아.
예전에 사교계에서 루시 때문에 사고가 벌어질 때마다 표정관리를 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응.
피식 웃으며 친구들의 뒤를 따라가던 조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안 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느끼고서 순간 발을 멈췄다.
단순히 끔찍하다거나 역겹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다.
저 안에 도사리는 기운은 악신 그 자체다.
아카데미 습격 당시 악신이 대리로 보낸 용보다도 짙고 불온한 기운이 저 안에 머물고 있어.
저기에 요정여왕이 있는 건가.
“조이.”
조이가 침을 꿀꺽 삼키던 그 때 옆에서 아서가 말을 걸어왔다.
살짝 놀라서 하마터면 사래에 들릴 뻔한 것을 어떻게든 넘긴 조이는 애써 태연한 체하며 아서의 말을 기다렸다.
“너도 알겠지만 루시 알른이 목소리를 낼 틈을 줘선 안 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3왕자님.”
지금 루시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서 가만 입을 다물고 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루시가 끝까지 조용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가 얌전히 있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루시의 평판이 밑바닥을 칠 일은 없었을 테니까.
“대화의 주도권은 성녀님이 쥐고 우리가 뒤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가지.”
“그 편이 좋을 것 같긴 해요. 요정들이 가장 큰 호의를 드러내는 건 페이비니까.”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요정여왕의 기운을 느낀 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을 꺼내며 대책을 위한 회의를 했지만.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 모든 것은 요정여왕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무의미해졌다.
“오랜만에 뵙는 손님분들이네요.”
밤하늘에 새겨진 모든 어둠을 끌어 모은 것만 같은 존재.
너무도 검어 그 안에 무엇이 도사리는 지조차 볼 수 없는 무언가.
에르기누스님께서는 요정여왕이 한없이 신격에 가까운 존재라고 그랬지?
그 말씀이 옳았네. 내 앞에 있는 이 검정은 한없이 악신에 가까우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요정여왕.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정들의 어머니랍니다.”
요정여왕은 싱긋 웃으면서 목소리를 냈지만 조이는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안에 도사린 어둠이 모든 것을 가려버렸기에 웃음은커녕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조이만이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선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요정여왕이 품고 있는 어둠은 생명의 본질적인 어둠을 건드릴 만큼 끔찍했으니까.
이게 신화 시대의 존재. 영웅들이 상대했던 거악.
확실히 위협적이네.
던전에서 만났던 마물 따위와는 격이 달라.
심지어 아카데미 습격 때 봤던 용도 여기에 미치진 못하겠지.
무서워.
두려워.
도망치고 싶어.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빌고 싶어.
엉엉 울고 싶어.
이런 끔찍한 것의 앞에 서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어.
“안…”
그렇지만 말야. 언제까지 뒤에 서서 루시한테 모든 걸 맡길 순 없잖아.
난 내 친구의 옆에 서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서려는 루시를 가로 막은 조이는 벌벌 떨리는 손을 마법을 이용해 반 강제로 진정시킨 후 요정여왕의 앞에 고갤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세상 모든 순수의 주인이자 순백이며 푸르름인 분이시여. 저는 솔라딘 왕국의 다섯 공작 중 하나인 파트란 공작 가문의 하나 뿐인 딸이자 위대한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제자인 조이 파트란이라고 합니다.”
“…에르기누스님의. 제자?”
“그렇습니다. 여왕이시여.”
저는 존귀한 스승의 뜻에 따라 여왕께 말씀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