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4
“후후후.”
요정여왕의 웃음소리를 내자 그를 따라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검정의 잎을 피워 올린 나무의 위에서.
빛 하나 허락하지 않는 완연한 검정의 꽃의 위에서.
갈라져버린 틈새로 질척한 검정을 내뿜는 대지의 아래에서.
우리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며 상처를 남기려는 사나운 바람 속에서.
저마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와 여왕의 꿈속을 가득 채운다.
“여느 때처럼 무례하시네요.”
주신의 신성으로 빛나는 방패를 쥐고서 몸을 굳힌다. 내 모든 감각이 작금의 상황이 최악에 이르렀음을 고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즉시 이 곳에서 도망쳐야한다고 소리친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자각몽을 꾸는 요정여왕을 상대로 승리할 방법이 있는지 의심스러우니까.
도망칠 방법도 마땅찮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순 없지만.
“대단해요. 어떻게 죽음의 위기에서도 그렇게 나불나불거릴 수 있는 건가요? 아직 위기감이 부족한가요? 좀 더 몰아붙여드릴까요?”
걸음과 함께 대지에 신성을 퍼트려 우리가 준비해놓은 것을 흩트리려는 땅요정들의 수작을 막는다.
그리고서 페이비에게 신호를 전하자 그녀가 즉각적으로 신성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지금 이 자리에 만들어지는 것은 단순한 신성영역이 아니다.
위대한 주신의 힘을 나눠 받은 나와, 이 대륙에서 신성마법에 대한 이해도라면 손에 꼽을 성직자인 페이비가 힘을 합해 만들어낸 장소다.
온갖 성물을 통해 의미와 업적을 보충한 이 장소는 신화의 시대에 다다랐다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내 생각은 틀리지 않은 듯 우리를 기점으로 시작된 빛에 어둠이 물러나고 요정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뒤로 밀려난다.
그 사이 살짝 떨어졌었던 동료들이 내 뒤편에 합류했다.
“그런 언행을 지녔는데도 주신의 사랑을 받는 건가요.”
빛의 끄트머리에 선 요정여왕이 신성영역에 손을 가져다대자 그녀의 살갗이 타오르며 불쾌한 냄새를 주변으로 퍼트린다.
“당신의 내면은 더할 나위 없이 고결한가보네요.”
“루시.”
고통이 즐겁기라도 한 건지 웃으며 자신의 살이 타는 광경을 바라보는 요정여왕의 너머로 조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 돌리지 말고 들으세요. 저 지금 요정여왕의 시야에선 안 보일 테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생각하던 중 평소에 비해 조이의 기척이 흐릿한 게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으면 거의 느낄 수 없는 수준. 조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난 그녀를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조이가 카리아에게서 은신술을 배운 적은 없으니 이건 에르기누스가 가르쳐 준 권능의 응용 쪽인가.
“지금 여왕이 사용하고 있는 건 어둠의 권능이에요. 어둠의 주인이 이 곳에 강림한다면 그녀도 어찌할 수 없겠죠.”
나도 조이의 의견에 동의한다. 여왕이 본색을 드러낸 건 내가 봉인을 꺼낸 순간이었어.
악신의 봉인이 풀리는 건 여유로운 체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도 껄끄러운 거야.
“여왕의 시선을 잠시 끌어주세요. 어디에서 봉인이 풀리더라도 마법진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조정할 테니까.”
결연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담긴 조이의 어투가 저 조정이 그녀 혼자만이 발상이란 걸 알려줬다.
조이의 얼빵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난 어딘가에서 중대한 문제가 일어날 것 같단 예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조이에게 믿고 맡기기로 결정했다.
지금 조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려 하고 있잖아. 그럼 믿어줘야지 설령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가 보충해주면 그만이야.
“고결?♡ 내가?♡ 푸하핳♡ 대체 얼마나 썩은 여자길래 나 같은 꼬맹이를 보고 고결하단 말을 할 수 있지?♡ 비교군이 얼마나 허접한 거야♡”
“그게 아니라면 주신께서 당신을 보우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없다고?♡ 봐♡ 살이고 주름이고 젖이고 축 늘어진 닭장 아줌마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페도변태인 개허접주신이 날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렇나요?”
내 비난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정여왕에게서는 큰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주신님께서도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하셨나 보네요.”
눈이 살짝 사나워지긴 했지만 그 뿐. 어둠으로 물든 그녀의 광증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 진짜 짜증나네. 격의 차이가 너무 높아서 약점파악도 잘 안 되고 위기감지건 미적감각이건 주변의 광경에 비명을 지르느라 무의미해진 지 오래야.
도발이 잘 안 먹히는 것도 그 쪽 문제인가?
아니 그치만 내 도발은 다른 악신들에게 잘만 먹혀들어갔잖아.
뭐가 문제지?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서 진짜 당혹스럽네!
‘할아버지! 약점! 빨리!’
<…미안하다. 난 저 분과 대화를 나눠 본 일이 거의 없다.>
‘무능해!’
쯧. 비장의 할배에몽도 쓸모가 없다면 직접 부딪혀가면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나.
방패를 치켜든 채 알른의 기사들이 할 법한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답잖게 깔끔한 인사를 건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요정들의 여왕이시여. 저는.”
“이름 같은 건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당신에겐 기억할 가치가 없는 걸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서, 당신께선 저희를 갖고 놀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야 이 곳은 당신의 꿈이니까요.”
꿈이라면 대개의 일은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요정여왕이 직접 꺼낸 말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우리를 구경할 뿐 처음과 같은 적의는 보이지 않고 있다.
“정답입니다. 훌륭하네요. 모두 칭찬!”
요정여왕의 박수소리를 따라 숲에 박수소리가 가득 찬다. 일체의 어긋남도 없이 하나로 이루어진 박수소리는 여왕이 손을 멈추자마자 일순에 그쳤다.
“맞아요. 저도 요정이니까요. 엄청 장난을 치고 싶은 걸요.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웃고 싶은 걸요.”
히죽 하고서 끌려 올려지는 입꼬리는 순수라는 단어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처럼 요염했다.
“방금 전에 잔뜩 놀라서 기겁하는 여러분들은 참 귀여웠답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반응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정여왕이 히죽이죽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민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그녀가 망설이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신성영역이 무너져 내리고 안으로 어둠이 침식한다.
“계속.”
결계가 무너진 자리로 여러 모양의 요정들이 다가온다. 수십개의 다리로 땅을 기는 것이. 수없이 많은 자잘한 날개로 하늘을 나는 것이. 거대한 눈을 지닌 것이.
“계속.”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웃음소리 위에 웃음소리가 겹쳐서. 귓가를 웃음소리도 메운 것으로도 모자라 머리를 가득 채우고 몸을 가득 채우고 정신을 가득 채우고.
“계에속.”
“잘 되었군요. 장난에 어울려주는 것은 제 특기입니다.”
공기 속에 끈적하게 달라붙어서 몸에 달라붙는 목소리를 완연히 빛나는 금빛의 검기가 잘라낸다.
“아가씨께서 지겹도록 단련을 시켜 주셨거든요.”
“잘 됐네요. 튼튼한 장난감이라니 정말 기뻐요.”
“튼튼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당신 같은 이의 장난엔 부서지고 싶어도 부서질 수 없습니다.”
어느새 내 앞에 자리한 칼의 당당한 목소리에 요정여왕이 눈꼬리를 끌어올린다.
“왜죠?”
“요정보다도 아름다우며 고귀한 분을 모시고 있는데 당신처럼 타락한 자의 장난에 놀아날 리 없지 않습니까!”
“재밌네요. 애매한 당신도 함께 초대하길 잘했어요.”
여왕이 손가락을 휘저은 순간 굳건하던 칼의 몸이 갑작스레 휘청거린다.
그가 무슨 공격을 당한 것인지 보이진 않지만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자그마하고 불안한 목소리는 귓가에 닿는다.
무언가를 부정하고,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변명하고,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 것인지 머리를 끌어안은 채 벌벌떠는 광경을.
“아아. 자신의 순수에게 부정당한 걸로 부서지다니. 튼튼한 줄 알았는데 연약하네요. 조심할 걸.”
요정여왕은 싸구려 장난감이 부서진 것처럼 가뿐히 대답을 하곤 다시금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였다. 여왕의 관심에서 벗어난 틈을 노려 칼이 검을 휘둘렀다.
이미 부서진 장난감이라 여기고 무시했던 여왕의 목은 분명 허공으로 날아갔지만 하나의 목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새로운 목이 그녀의 몸에서 자라났다.
두 개가 되어버린 얼굴이 동시에 의문을 표시한다.
“어떻게?”
“그 누가 날 부정한다 한들 아가씨께서 날 기사로 인정해주신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게 기사란 것이다!”
타인이 부정한다한들 자신이 확고하게 믿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가.
…아.
아아아.
아아아아!
‘할아버지! 분명 요정여왕과 에르기누스님은!’
<그래! 놀랍게도 상사상애였지!>
그랬구나! 그래서 내 도발이 안 먹혔던 거였어!
요정여왕에게 내 평가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아.
기분이 살짝 나빠질 순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요정여왕은 오롯이 단 한 사람! 에르기누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즉 저 자의 약점은 자신의 사랑!>
‘그 부분이라면 얼마든지 노릴 수 있어요!’
후흫. 후흐흐흫.
길고도 긴 시간 동안 한 사람밖에 사랑한 적 없는 순애보는 분명 아름답지만 말야!
그래봐야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잖아?
“그런가요? 와아. 재밌네요. 그럼 좀 더 커다란 악몽을.”
“악몽?♡ 무슨 악몽?♡ 찐따마법사가 다른 여자랑 히히덕대는 악몽?♡”
키득키득 웃으며 요정여왕을 올려다본다. 검은 빛으로 물들어 뒤틀려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인간의 인지로 이해할 수 없는 검정은 본디 불쾌해야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뒤틀려가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도 유쾌했다.
“왜애?♡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즐거운 꿈이잖아?♡ 웃어야지?♡ 응?♡”
“…당신이 말한 찐따마법사라는 게 설마 에르기누스님인가요?”
“푸하핳♡ 너도 좀 찐따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응. 맞아♡ 몸매 좋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좋은 변태인 주제에 정작 다가가진 못하는 찐따 중의 찐따인 녀석 말야♡”
“그 분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왜?♡ 왜 모욕하면 안 되는데?♡ 네가 뭔데?♡”
“그. 그 분은 저의.”
“푸흡♡ 큽♡ 푸하하핳하♡ 수백살도 더 처먹었을 할망구가 부끄러워 하는 꼴이라니♡ 웃겨 죽이는 장난이야?♡ 완전 장난아니네!♡”
배를 붙잡은 채 보란 듯 웃고 있는 나를 향해 무수한 공격들이 다가온다.
여왕의 감정에 반응한 요정들이 날 배제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 거기에 대응하지 않았다. 대응할 필요가 없었다. 내 주변엔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아서가. 프레이가. 칼이. 페이비가. 저 마다의 방식으로 적을 상대해나간다.
그리고 나 또한. 나의 방식으로 적을 마주한다.
“저기♡ 저기♡ 닭장 아줌마♡ 고백은 했어?♡ 손잡기는? 입맞춤은? 성행위는?”
“무. 무슨 말을.”
“푸하하핳♡ 그래♡ 못 해봤겠지♡ 몸 안에 거미를 키우는 할망구가 그런 걸 해봤을 리가 있나!♡”
“그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전 모든 걸 그 분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순수를 지키는 것은 결코.”
“와♡ 정~말 대단하네♡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순수를 지키려고 하다니♡ 근데 있지♡ 결계 바깥에 있는 찐따 씨는 너처럼 닭장냄새나는 여자랑은 생각이 다른 것 같던데?♡”
어둠으로 물든 숲에서 일순에 소리가 사라진다.
“자기가 장난감이었단 것도 몰랐어?♡ 큽♡ 불쌍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