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7
마법진에 얽매인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에게 달라붙는 마력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마도는 결코 자신의 목표를 놓아주지 않았다.
난 안다. 에르기누스가 저 마법을 만들어내는 데에 걸린 수백년의 세월을. 길고도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쇠한 적 없는 그의 열정을.
수많은 유혹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의 순정을. 그렇기에 믿는다. 그의 마법이 보란 듯 어둠의 악신에게 닿을 것임을.
“허. 놀랍군.”
결국 에르기누스의 마법은 남자의 몸에 완전히 달라붙었다.
“에르기누스 그 놈의 집념이 내게 닿은 것인가.”
남자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면서 망가진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신성마법에 의해 육신이 회복되며 또 다시 머리에 통각이 물밀 듯 쏟아지지만 기이하게도 그 고통은 충분히 버틸 만 했다.
방금 전에 죽을 뻔한 탓에 감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걸까. 간신히 몸을 회복하고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면 서서히 걷히는 어둠이 눈에 들어온다.
에르기누스의 마법이 남자에게서 통제력을 빼앗은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이야. 이걸로는 모자라. 우리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악신이 좀 더 힘을 쓰게 만들어야 해!
“그토록 무시하던 인간한테 처발린 기분은 어때?♡ 응?♡ 응?♡”
“굳이 용 쓸 필요 없다. 에르기누스 그 놈이 왜 이런 마법을 내게 걸었는지는 이미 눈치 챘으니까. 내가 이 안의 어둠을 모두 집어삼키길 바라는 거겠지.”
…그새 눈치를 챘다고!?
이건 너무하잖아! 더럽게 강하면 머리라도 나빠야 밸런스가 맞는 거라고! 둘 다 뛰어나면 어쩌자는 건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어차피 내가 봉인에서 풀려난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는 변화가 생겨나고 있을 테니까.”
두 손을 펼친 남자는 보란 듯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다. 굳이 지금 남자가 마법을 떨치기 위해 힘을 쓸 필요는 전혀 없다.
악신이 부활함에 따라 세상에 어둠이 퍼져나갈 터이고 언젠가는 저 마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악신의 힘이 커질 테니까.
그렇지만.
“병신이라 그런가 기억력이 구리네♡”
남자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도발해봐야 의미 없다. 내가 힘을 못 쓴다 한들 넌 내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해.”
“맞아♡ 난 작고 귀엽고 연약한 여자아이인걸♡ 욕정으로 가득한 병신이 너~무 무서워서 움직일 수도 없어♡”
아직 여기는.
“그치만 썩어 문드러진 아줌마는 다를 걸?♡”
요정여왕의 꿈속이란 것.
“찾았다.”
세상을 겨울로 바꾸는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요정여왕은 이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미친 년이!”
남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요정여왕이 지닌 격은 지금의 그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네 년 따위가 내 어둠을 감당할 수 있을 성 싶으냐!”
“네. 네. 네! 당연하죠! 여긴 제 꿈인 걸요! 꿈이라면 뭐든 되는 법이에요!”
“방해 말고 꺼져라! 정신이 나갔다면 흙 아래에서 비료나 되란 말이다!”
어둠의 권능을 취하고자 하는 요정여왕은 남자 이외의 어느 곳에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걸로 잠시 여유가 생겼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보다 먼저 뒤편으로 고갤 돌렸다. 친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모두 괜찮습니다. 루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조이의 옆에 모인 이들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신체나 정신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루시가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어둠의 권능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과연. 남자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날 괴롭히는 것. 내게 시선이 집중된 사이에 친구들을 구해낸 건가.
도발이 제대로 안 먹혀서 다급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탱커 노릇을 잘 한 셈이 됐네.
“…죄송합니다. 루시.”
응? 왜 사과해?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이었잖아?
“어떻게든 해보겠다 말한 주제에 실패해서 모두를 죽일 뻔하고.”
이것도 그래. 악신의 봉인을 안 풀었으면 요정여왕한테 봉인을 뺏기고 배드엔딩이었다고.
조이. 네가 자신 있게 말해준 덕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당신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안 했다니. 이렇게 친구들을 구했잖아. 네가 악신의 권능을 거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저는.”
아악! 진짜! 축 처진 거 마음에 안 드네! 이래서야 겉도 속도 얼빵이가 되어 버리잖아!
뒤 편에서 끝없이 들려오는 소란을 무시한 채 조이의 양 볼을 꾹 눌렀다.
“느. 느디.”
“얼빵아. 눈은 장식이야? 우리 아직 위험하거든?”
“그디만.”
“불평은 저 미치광이들이 사라지고 나서 해. 그 때 잔뜩 비웃어 줄 테니까.”
“…데에.”
“그리고 말야. 네가 아무것도 못한 개허접 얼빵이면 다른 녀석들은 뭐가 되냐? 살아있을 가치도 없는 미생물? 여자애 뒤에 숨는 것밖에 못하는 버러지들?”
음? 이상하다? 평상시 같으면 이쯤에서 아서나 프레이가 불평을 해야 하는데?
어라? 이번에는 또 왜 쟤네가 침울해져 있는 거야!
아! 정말 귀찮네!
“여러분들.”
내가 무어라 하는 것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칼이 목소리를 냈다.
“버러지에게도 버러지 나름의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자괴감에 빠지는 건 나중에 해도 충분합니다.”
“…그렇겠지요. 아직 이 목은 붙어있으니.”
“그렇네. 아직 재밌는 것들이 남아 있어.”
“저 광경을 보고도 재밌는 것이란 말이 나오나?”
저들이 마주했을 광경이 무엇일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어둠의 권능이 보여주는 모습은 마음 속 어둠 그 자체니까.
보통은 그를 마주하고 나면 마음이 꺾이기 마련이거늘 친구들에게선 자그마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건 계획대로 된 듯 하다만. 조이. 아직 부족한 것 아니냐? 저 녀석이 끌어 모으는 어둠이 대단치 않은데?”
“아줌마의 이성이 날아간 게 문제. 바보 같이 돌격만 하니까 대처하기 쉬워.”
“그렇다고 저 분이 이성을 되찾아도 곤란합니다. 저희 수준에서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저희가 여왕님을 도와 악신을 공격하면 어떤가요. 조이. 권능에 대한 개입은?”
“가능하긴 한데 그 경우 악신의 몸에 새겨진 마법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몰라서.”
오히려 친구들은 저들의 싸움에 끼어 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음에도 겁을 먹긴 커녕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너와 비슷하구나.>
‘흐악!? 왜. 왜 갑자기 목소리 내고 그래요! 놀랐잖아요!’
<그건 미안하게 됐다만. 한 가지 재밌는 소식을 가져 왔다.>
‘…재밌는 소식이요?’
<간슈님께서 베푼 정보다. 어둠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역사가 있는 법이더군.>
간슈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열불이 올랐지만 뒤이어 이어진 이야기에 분노가 가라 앉았다.
하. 하하핳! 성격 더러운 애늙은이 같으니!
설마 상대편의 약점까지도 잡아두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알겠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쌓아뒀었지만 이걸로 용서해줄게!
덕분에 재밌는 광경을 보게 될 테니까 말야!
“야. 허접들. 저 병신이 부끄러움에 발버둥치다 질질 짜는 거. 보고 싶지 않아?”
*
“어라아? 이상하네요? 제 꿈인데 왜 당신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까요? 왤까요? 왤까요?”
“그딴 건 너 혼자 열심히 생각해봐라.”
공간을 뛰어넘어 훌쩍 앞에 도달한 요정여왕의 손길을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 피한 남자는 땅에 발을 내딛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었던 대지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을 보고는 혀를 차며 어둠으로 발판을 만들어냈다.
“귀찮군.”
본래의 나라면 영락한 요정여왕 따위를 상대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손짓을 하는 것만으로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지.
허나 지금은 어둠을 끌어 모아선 안 된다는 제약이 걸린 상황.
마음에 안 들어도 견뎌야 한다.
세상에 어둠이 드리워 인간 따위로는 결코 나를 막을 수 없게 될 때까지.
“맞아주세요!”
“거절하마.”
그리고 그 때가 오면 이번에야말로 주신이 아끼는 장난감을 가지고 잔뜩 놀자꾸나.
아. 한시 빨리 비명소리를 듣고 싶군.
자신의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에 절망할 아르마디를 생각하며 웃고 싶어.
그렇지만 참아야 한다. 지난 번 내가 인간 따위에게 패한 이유는 방심을 했기 때문.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것이 여태 기적을 몇 번이나 일으켜 온 상대라면 더더욱.
“와아♡ 인기가 좋네?♡ 이런 찐따병신을 필요로 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신기해라♡”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주신의 사도와 여러 잡것들이 보인다.
고결한 사도야 그렇다 쳐도 다른 놈들은 도망칠 것이라 여겼는데 굳이 사지로 기어들어왔나.
예전에도 그랬지만 영웅의 곁에 있는 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목숨을 아낄 줄 모르는 군. 그래서 더 부술 보람이 있는 거지만.
“굳이 이 자리에 온 걸 보면 상당히 초조한 모양이군. 미친 여왕이 네 생각보다 더 무능했나보지?”
“푸하핳♡ 무슨 헛소리를♡ 썩어빠진 닭장 아줌마한테 기대를 할 리가 없잖아?♡ 저 아줌마한테 닿으면 기대감도 부식될 걸~♡”
“호오. 그럼 무슨 수라도 있나? 노력해보도록. 그러지 않으면 또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될 테니.”
저 아이의 비명소리는 꽤나 감미로웠지.
과연 주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다운 미성이었다.
나중에 저 아이가 완전히 부서지고 나면 악기로 사용을 할까.
나쁘지 않.
“저기♡ 이거 보여?♡ 응?♡”
“…간슈의 문양? 어떻게 주신의 사도가 그걸.”
“있잖아♡ 이 쉰내 나는 애늙은이 성격이 나쁜 거 알지?♡ 도서관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가 마음에도 곰팡이가 잔뜩 핀 쓰레기잖아♡”
아니. 허세다. 그럴 리 없다. 그 성격 나쁜 놈이 인간 따위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줄 리 없어.
“정~말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지독하다니까?♡ 세월조차 셀 수 없는 옛날 일을 혼자 기록해두고 있다니!♡”
자신의 사도에게도 무엇 하나 알려주는 것 없는 쓰레기가 이런 여자아이한테 무언가를 알려줄 리가.
“혹시 내가 허세 부린다고 생각해?♡ 푸하하핳!♡ 그래!♡ 그렇겠지!♡ 그러고 싶겠지!♡ 열심히 현실을 부정해봐!♡ 그런다고 네 흑역사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
“큽♡ 쿠흐흡♡ 얼굴 창백해진 것 좀 봐♡”
“네 년.”
“왜애?♡ 이제 내 입을 좀 막고 싶어 졌어?♡”
“거기까지 해라. 그러지 않으면.”
“않으면?♡ 어쩔 건데?♡ 뭘 어떻게 할 건데?♡ 예전의 너처럼 질질짜게 만들 거야?♡ 응?♡ 응?♡”
“…죽여주마.”
“와아~♡ 너~무 무섭다♡ 진짜 병신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