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1
자신에게로, 아니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아이에게로 쏟아지는 적의를 느낀 베네딕은 허술한 웃음과 함께 루시를 내려주었다.
“뒤에서 친구들과 함께 쉬고 있으렴.”
“자신… 있어?”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으면서도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딸아이의 모습에 베네딕은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글쎄다. 잘은 모르겠다만 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
고된 싸움 끝에 엉망이 된 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베네딕은 심호흡을 하고서 느긋이 몸을 돌렸다.
전장에 선 기사의 얼굴은 딸의 앞에 서 있을 때와는 달리 진지했고 무거웠으며 또한 험악했다.
“묻겠소. 어둠의 주인이여. 나의 딸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당신이오?”
“내 유일한 한이 그 썅년을 더 괴롭히지 못한 것이다! 제기랄!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죽였어야했다. 저 토악질 나오는 입술에서 피만을 뱉을 수 있게 만들어야 했어!”
“과연. 그것이 당신의 대답이군.”
대륙 전역에 지워지지 않을 명성을 드높인 기사가 등에서 자신의 검을 뽑아든다.
베네딕이 지닌 거구와 괴력이 아니라면 드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할 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장사들조차도 무기로 택하지 않을, 차력사들이나 선호할 법한 무기 같지 않은 무기.
그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두 손으로 붙잡은 베네딕이 자신의 오러를 담아 무기를 휘두르자 남자가 서 있던 곳을 기점으로 폭음이 울렸다.
한 인간이 휘두른 검격이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재현하지도 못할 폭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과연! 불을 상대로 버틴 괴력이구나!”
그 안에 있던 남자의 몸은 제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바닥에 흩어졌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허나 무의미하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으니!”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육체 따위 그저 도구에 불과하단 것처럼. “질기군. 벌레가 따로 없어.”
“벌레!? 내가?! 하! 하하하! 가소롭군! 실로 가소로워!”
남자가 광소를 터트림에 따라 그 자리에 선 이들이 하나 둘 전투를 준비한다.
검성의 검 위에 오러가 깃든다.
사도의 육신에 여신의 축복이 자리한다.
늑대의 날카로운 발톱이 적을 가리킨다.
여우의 주변에 넘실거리는 연기가 무리를 이룬다.
요정들의 주인이 전쟁을 명령한다. 대륙 최강을 자부하는 기사들이 진을 이룬다.
“어디 할 수 있다면 해봐라! 신격에겐 죽음이란 개념 따위 존재치 아니하니!”
악신의 분노를 따라 어둠이 세상을 잠식해나가자 그 주변에서 열심히 재잘거리던 요정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선다.
“어둠 속에서 싸워본 적이 있느냐!?”
세상에서 냄새가 사라진다. 긴 세월을 지나 요정의 숲에 다시금 자리했던 기분 좋은 꽃냄새가 어둠에 잠식되어 지워졌다.
“신과 맞붙어 본 적이 있느냐?!”
촉각이 지워진다. 자신이 무기를 들고 있긴 한 건지. 갑옷을 걸치고 있는 것인지. 무언가를 제대로 붙잡고 있긴 있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어 간다.
“신이 어째서 신이라 불리는 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시각이 지워진다. 세계가 어둠으로 물든다. 강대함도. 아름다움도. 위태로움도. 눈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검정만이 남는다.
“없다면 이제 후회하게 될 거다! 하나의 권능을 관장하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될 테니!”
소리가 사라져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도.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며 나던 소리도. 겁에 질린 요정들의 비명소리도. 저 마다 자세를 다잡을 때 나는 철의 소리도.
“이봐.”
그 모든 것이 세상에서 지워지려하던 그 순간 웃음기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어둠을 관통하고서 세상에 울려 퍼진다.
“본체에 비하면 부족함이 많다고 하나 그래도 난 대마법사 에르기누스다.”
소리가 돌아온다. 그들의 귀에 요정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다시금 스며든다.
“그대의 대적자이며 그대를 물리친 영웅의 일각이다.”
시각이 돌아온다. 당혹 속에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던 이들이 갑작스런 빛에 잠시나마 움츠러든다.
“수백년이란 시간 동안 오롯이 그대를 상대할 방법만을 강구해 온 미치광이다.”
촉각이 돌아온다. 숲에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의 감촉이 자신의 육신이 멀쩡히 자리하고 있단 걸 알린다.
“헌데 내가 그대의 권능에 대응할 방법을 만들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나?”
냄새가 돌아온다. 요정의 숲이 본래 지니고 있을 꽃의 향취가 잔잔히 퍼져나가며 숲에 늦디 늦은 봄이 찾아왔다 소리친다.
“오만하군. 예전에 우리에게 패했을 때처럼.”
“감히!”
“하하. 그대들의 힘이 언제까지나 신의 것이리라 생각…”
채앵! 철과 철이 부딪히며 에르기누스의 뒤 편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분명 에르기누스의 눈앞에서 분노를 표하고 있었을 남자가 어느새 그의 뒤편에 도달해 어둠의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만약 이를 미리 눈치 챈 베네딕이 공격을 쳐내지 않았다면 에르기누스는 허무하게 공격을 허용해야만 했을 것이다.
“흐음. 큰 소리를 친 것에 비해 약골이시군. 우리 딸이 더 강하겠어.”
“쯧!”
루시가 언급되자마자 눈을 희번득하게 뜬 남자였지만 그가 달려드는 것보다 주변에서 공격이 날아드는 게 더 빨랐다.
이 곳에 자리한 자들은 모두들 대륙의 일각을 이루는 괴물들.
상대가 내어준 틈을 놓칠 리 없다.
늑대의 송곳니가 목을 찢어발긴다.
검성이 내리친 검이 허리를 베어 가른다.
사도가 내지른 주먹이 가슴을 터트린다.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즉사했을 치명상들.
사람이 상대였다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을 날카로운 공격들.
허나 이번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고. 신에게 있어 육신을 향한 공격은 벌레의 날갯짓만큼이나 무의미했으니.
에르기누스가 어둠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남자는 물러서는 대신 에르기누스의 앞에 등장해 그의 머리를 창으로 꿰뚫었을 것이다.
“대마법사님.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습니까?”
“…권능의 활용일 거다. 우리의 감각을 앗아가지 못하니 다른 방법으로 선회한 것일 테지.”
“대응은?”
“이미 하고 있다. 빌어먹을. 이전에 권능이 파훼된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에르기누스가 어둠의 악신에게 대응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일종의 모방이다.
과거 마법의 신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난 신들이 자신의 권능에 관해 생각보다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있어 권능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손과 발 같은 것. 숨을 쉬는 것처럼 권능을 다루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을 벗어난 일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후에도 여러 신들과 대화하며 이 사실을 알아낸 에르기누스는 이를 가지고 어둠의 악신을 공략하고자 했다.
권능을 재현할 방법을 찾아 헤매고, 악신과 권능의 제어를 겨룰 때를 생각해 수도 없이 많은 전략을 세우고, 여러 변수까지 생각해서 오늘을 준비했다.
헌데 지금 악신은 권능을 공유하게 되었음에도 당황하긴커녕 당연하다는 듯 어둠의 주도권을 가지고서 에르기누스와 다투고 있었다.
“감각을 빼앗기는 일은 없을 거다! 그건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니까! 허나 당장은 권능의 사용을 아예 막진 못해! 어쨌건 저 놈은 신격이니까!”
“당장이란 말씀은.”
베네딕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치 않았던 검은 가시들이 베여 우수수 떨어진다.
“곧 권능을 빼앗을 수 있단 말처럼 들립니다만.”
“것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한 거다!”
검성의 검이 밤을 집약해 쏘아내는 것을 반으로 가르고 그 너머에 있던 남자마저 가루로 만든다.
“힘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 한들 그래봐야 힘을 타고 났을 뿐인 짐승이다!”
사도의 권이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 먼저 날아가 그의 공격을 분쇄하고 그 너머에 자리한 남자의 얼굴을 부순다.
“이 천재를 상대로 얼마나 버티겠느냐!”
짐승의 후각으로 적을 포착한 늑대가 자신의 발톱으로 대지를 물들이려는 어둠의 장막을 찢어발기고. 여왕의 명을 따르는 요정들이 대지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려는 어둠을 먼저 끊어낸다.
“영락한 저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남자는 죽지 않는다. 죽음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둠에서 피어나 다시금 그들을 향해 달려든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방해하지마라!”
어둠이 자리한 대지에서 하나 둘 생명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흔히 대륙의 인간에게 마물이라 불리는 것들. 인간을 향한 적의로 뭉쳐 생명을 탐하는 존재.
“다들 어디서 던전의 주인을 할 법한 놈들이네.”
용병으로 활동하며 온갖 던전에 들어가보았던 검성은 저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하나하나만 따지자면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들이지만 악신을 상대하면서 저것까지 베려면 귀찮을 것 같은데.
검성이 저기에 집중해야하나 생각을 할 무렵 뒤 편에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가뿐히 짓누르는 거센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사단! 열 이상 쓰러트리지 못한 자는 돌아가서 지옥 같은 훈련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어둠 안에서 파도처럼 흘러나오는 마물의 무리에 짓눌릴 것이 두려울 만도 하거늘 알른의 기사단은 당연하다는 듯 앞으로 달려나가 적의 목을 베어냈다.
“겨우 열 댓의 기사로 무얼 할 수 있느냐!”
“허어. 추한 그대의 눈엔 저것이 열댓으로 보이나? 내 눈엔 그보다 훨씬 많은 듯 한데.”
기사만으로 채울 수 없는 자리에 안개로 이루어 진 여우들이 자리를 잡아 적의 목을 물어 뜯는다.
“지켜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재밌는 거 독차지하면 나빠!”
“축복을 드리겠습니다!”
기적을 만들어낸 아이들이 다시금 무기를 든다.
“흐읍!”
괴력을 품은 기사가 대지의 무수한 마물들과 함께 남자의 육신을 터트린다.
“무의미하다! 버러지놈들!”
그렇게 전장에 치열한 대치가 이루어지지만 소모되는 쪽은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자들뿐이었다.
어둠은 흩어져도 지워지진 않는다. 찢어져도 그 자리에 남아 다시금 뭉친다.
허나 생명은 어떤가.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
괴력을 언제까지고 낼 수 없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에도 한도는 존재한다.
“네 놈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밤은 온다!”
그리고 그 끝에 밤이 찾아온다면 상황은 악화된다.
어둠의 시간이 찾아오면 에르기누스도 악신의 권능을 완벽히 막아낼 순 없을 테니까.
“야. 찐따.”
저 놈이 권능을 쓰는 방식에 대한 분석은 이미 끝났다. 이게 단순한 마법사들끼리의 대결이었다면 이미 저 놈은 박살 났어야 했어.
그렇지만 이건 마법사간의 싸움이 아니다.
신과 인간의 투쟁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둠의 주인이었던 자와 어둠을 이끌려는 인간의 싸움이다.
타고나면서부터 어둠이었던 자에게서 어둠을 빼앗기 위해선 저 사이의 선을 끊어야 해! 그러지 못하고 밤이 되면.
“야! 귀 썩었어? 내 귀여운 목소리를 무시하는 게 말이 돼?!”
최악의 결말을 짐작하던 에르기누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옆으로 고갤 돌렸다.
그리고 희망을 발견했다.
“이봐! 한 번. 딱 한 번만 시선을 끌어줄 수 있나? 저 놈의 이성을 날려버리는 게 가능한가?”
기적을 일으킨 대가로 한계를 맞이했을 어린아이에게 또 다시 짐을 맡겨야 하는 자신이 역겹지만 이게 최선이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악신의 감정을 뒤흔들었던 이 아이라면 분명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어!
죄책감과 간절함이 뒤섞인 에르기누스의 눈빛을 마주한 루시는 키득하고 웃음을 흘렸다.
“당연한 걸 왜 물어봐?”
*
한 번만 기회를 만들어주면 어둠을 거둬들일 수 있을 거란 에르기누스의 말에 난 다시금 방패를 치켜들었다.
<괜찮겠느냐?>
‘으음.’
정화의 기적을 일으켰던 반동은 내 몸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리는 후들후들이고 몸 안의 신성은 바닥이 났고 머리는 어지럽고. 진짜 눈 감으면 그대로 기절해버릴 것 같아.
‘아마 괜찮을 거에요.’
그래도 뭐 어떻게든 할 수는 있을 거다.
‘저런 병신한테 질 생각은 없거든요.’
상대는 몇 번을 죽여봤는지 셀 수도 없는 게허접보스니까.
‘이렇게 훌륭한 도구들이 널려 있는데 어떻게 져요?’
자. 오랜만에 탱커가 아니라 플레이의 입장에서 한 번 놀아보자.
이렇게 생각하니 의욕이 넘쳐나는데!?
완전 재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