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2
이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어둠의 악신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보스다.
화면과 소리를 없애버리는 존재는 특정 방법이 아니라면 이길 수 없는 적이니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어둠을 밝히는 것을 택하겠지만 썩은물은 다르다.
고이고 고여서 태초의 색깔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존재는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완벽히 외우는 것을 택한다.
이유는 하나. 그래야 더 빠르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행동을 너무나도 당연한 듯 행하던 내 입장에서 어른들의 싸움은 공략을 한 번도 보지 않고 무작정 돌진하는 늅늅이마냥 답답했다.
오죽 했으면 죽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서 억지로 일어났겠냐!
아니 스펙만 따지고 보면 어둠의 악신이 완전히 부활했고 나발이고 발라먹을 수 있어야 할 인간들이 고전을 하는 게 답답해서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니까!?
아드득. 빠드득. 그르케. 하능거. 으능데에에에…
‘흐악!?’
기적의 대가로 병약 루시가 되어버린 탓일까. 조금 화를 냈다고 머리가 빙그르르 돌았다.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부여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은 난 흐트러진 호흡을 다잡고 얼굴을 들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괜찮아요. 어차피 전선에 나서는 것도 아닌데요. 뭘.’
정화의 기적을 막 사용했을 때보다는 훨씬 상태가 낫다. 지쳐 쓰러진 내 주변에서 요정들이 돌아다니며 힘을 더해준 덕이다.
방금 막 악신의 어둠에서 벗어난 이들인지라 날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진 못했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난 이제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싸우게 될 텐데.
<허나.>
‘할아버지. 저 저 녀석한테 당한 게 꽤 많거든요? 되돌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그렇지.>
할아버지를 납득시킨 나는 지금도 내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는 요정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요정들은 여왕의 명령에서 벗어난 별종들이다.
다른 요정들이 자신의 어미를 따라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안 이들은 내 옆을 돌아다니며 날 걱정했다.
내 주변에 어느새 자리 잡은 변태들이 생각나서 좀 불안하지만 그래도 내 말을 잘 따라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부여 넣으며 어둠과 인간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향한다.
숲을 장악하려는 검정과 숲을 지키려는 초록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곳으로.
신성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의 난 짐승들에게 둘러 쌓이게 되면 목숨을 걱정해야 할 처지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이 곳에는 날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기사가 있었고, 내가 다치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여우가 있었고, 날 위해 목숨을 내 걸어 줄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루시 알른!? 몸이 회복된 건가!?”
“왕자님의 육신에는 제 역할을 하는 곳이 없나요?”
“아니면 왜 여기에 있나! 돌아가라! 지금 우리에겐 그대를 지켜 줄 여력이 없다!”
안내를 해달라는 어리광만큼은 사양이라 말하는 아서를 툭 밀어 마물의 한 가운데로 던져 넣은 난 그 옆에서 여러 자잘한 마법으로 친구들을 지원하고 있던 조이의 목덜미를 붙잡아 당기려 했지만.
“흐엥!?”
오히려 조이에게 내 몸이 딸려가 버렸다.
으으으. 병약 루시 상태 진짜 끔찍하네. 내가 얼빵이한테 힘으로 지는 날이 올 줄이야.
“루. 루시!? 왜 여기에!?”
“날 위해 일할 기회를 주러 왔어. 얼빵아. 기쁘지?”
“루시가 도와달라 말한다면 당연히 도와드리겠지만 일단은 뒤로 물러나죠! 여기는.”
말을 하다 말고 옆으로 시선을 돌린 조이는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린 괴물의 입 안에 불꽃을 쏘아 머리채로 터트리고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위험하니까요!”
“괜찮아.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아닌가? 얼빵이라면 오래…”
“그러니까 그게! 아아! 됐어요! 빨리 말해주세요!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여기 이 벌레들 옆에 마법 하나씩 달아줘.”
지금 내 몸 상태로는 전장에 끼어들어 지휘하는 건 불가능하다.
몸이 멀쩡한 상태였어도 이를 악물어야 할 게 저 괴물들의 전장인데 이 꼴로 끼어들었다간 비명횡사할 게 뻔해.
그러니 차선책을 쓴다. 내가 아니라 요정들을 이용한다. 이들을 나 대신 전장으로 보내 내 지휘를 따른다.
“…요정분들이 루시의 말을 들어주나요?”
“그럼. 이 페도벌레들은 어린 것보다 더 어린 걸 좋아하거든.”
– 맞아! 루시 좋아!
– 루시 너무 예뻐!
– 계속 루시랑 있을래!
내가 시선을 주기 무섭게 재잘재잘거리는 요정들의 모습에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이 짜게 식은 조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들의 앞에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지금 제 마력도 아슬아슬해서 이 마법이 오래가진 못 할 거에요.”
“괜찮아. 개허접얼빵이한테는 크게 기대 안 했거든.”
“…아악! 알겠어요! 모든 걸 쏟아 부어 드리면 되잖아요!”
대체 어디에서 열이 오른 건지 조이는 언젠가 내가 주었던 보석을 꺼내 그 안의 마력까지 써가며 마법을 보충했다.
난 딱히 긁으려는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음.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오케이려나.
“자. 벌레들. 귀엽고 귀여운 내 노예로 삼아 줄게. 기쁘지?”
– 와아!
– 응! 완전 기뻐!
– 뭐 하면 돼?
매도를 들었음에도 환희 웃는 요정들의 모습에 죄책감이 차올랐지만 애써 양심이 따끔거리는 걸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
“하하하! 이 정도냐! 이 정도 밖에 안 되더냐!? 가소롭구나!”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몸이 터져나간 남자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만 한다.
죽음 따위 알지 못 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 몇 번을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금 부활했다.
이 불사성이 어둠의 권능에 속한 것이라면 에르기누스님께서 권능을 탈취한 순간 결말이 날 터이나 이래서야 밤이 오는 게 더 빠를 터.
허.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군.
내 딸아이에게 자신만만하게 소리치고 오는 길이란 말이다.
이래서야 허접 파파가 되지 않으냐!
짜증이 난다만 그렇다 해서 마땅한 방법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신의 권능을 파훼하지 못하면 무작정 힘을 퍼붙는다 해서 답이 나오지 않아.
…이렇게 된 이상 도박수를 둬볼까. 아예 어둠 채로 터트려 버린다면 저 녀석도 부활하지 못할 터 아닌가.
[바아~보 파파. 금방 끝내고 온다 하지 않았어? 개허접파파 기준으로는 이게 금방이야?]
“무능한 파파라 미안하다! 루시! 할 말이 없구나! 허나 조금만 기다려다오! 그럼 금방. 흠?”
[푸하핳! 방금 얼굴 진짜 멍청한 오크 같았어!]
루시의 비웃음에 고갤 돌린 베네딕은 키득거리고 있는 요정을 발견하고 눈을 끔뻑였다.
[나이만 잔뜩 먹은 바보들이 한 가득이라 답답해서 죽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뇌가 썩어버린 노친네들 대신 내가 지휘를 할 거야!]
과거 불의 악신를 물리치기 위한 길에서 루시의 능력을 마주했던 베네딕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뇌 빼고 병정 노릇이나 하세요. 자그마한 뇌를 굴려봐야 답 안 나오잖아요?]
“기꺼이 그러마.”
[좋아요. 바보 파파. 멍청한 파파한테 큰 건 안 바래요. 그냥 다 터트려 주세요.]
“하하하! 그거야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지!”
*
아. 진짜 귀찮고 재미 없네. 이런 소모전은 질색이야.
체계를 무시하고 무작정 달려들어 볼까.
회복되는 것마다 목을 날리다 보면 언젠가 끝이.
[혼기가 가득 찬 아줌아줌마. 왜 그렇게 표정이 다급해? 바보 파파가 싸우는 걸 보니까 심장이 쿵쿵거려?]
“무슨 헛소리를…! 요정?”
[저기 있잖아. 파파한테 멋진 모습 보여주고 싶지? 바보파파가 마구 날뛰는 데에 기여해주고 싶지? 그래야 나중에 합작을 했다며 으헤헤 거리면서 좋은 밤을 보낼 수.]
“뭘 해야 하는 지나 말해라! 이 쪽도 나름대로 필사적이란 말이다!”
[검밖에 모르는 노처녀가 할 일이 뭐 있겠어? 베는 거지.]
*
여신께서 위험을 알려 주시지만 그렇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여신께서 내게 내린 권능은 뛰어나지만 그걸 다루는 인간인 내가 무능하여 저 어둠을 떨치지 못하니까.
이러다 밤이 찾아오면 정말 위험해질 터인데. 최악의 경우에는 여신께 부탁을 드려서.
[야. 변태 사도.]
“영애? 벌써 몸이. 아. 요정의 육신을 빌리셨습니까. 과연. 이를 보니 요정들 사이에서 춤을 추시던 영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꽃보다 더욱 꽃 같던.”
[아아. 역겨운 입 닥쳐. 넌 말 할 필요 없어. 목줄을 붙잡힌 개는 말을 모르잖아.]
“아. 과연. 이해했습니다. 부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변태까마귀한테 말 해. 기적을 내려 달라고. 그럼 나중에 잔뜩 매도해줄 테니까.]
“…그 매도. 저를 통해서 해주시는 겁니까?”
*
보름달이 떠오른 하늘은 늑대의 시간이지만 하늘을 가득 채운 어둠 앞에선 보름달은 자그마한 존재에 불과하니 이대로 가다간 소모전 끝에 패배하게 될 터.
하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신은 신이란 것인가.
오냐. 좋다. 은혜를 갚고자 마음 먹은 그 순간부터 이 목숨은 하찮은 것이었으니.
기꺼이 그 분을 위해 나의 존재를.
[야. 멍멍아. 저 병신한테 안 짖고 왜 가만 있는 거야. 벌써 지쳤어? 체력조루야?]
“알른 영애. 나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게 방법이.”
[멍청한 멍멍이가 왜 사람 말을 하지? 짖어. 멍멍아. 할 일은 내가 알려줄 테니까 넌 달려들기만 해. 방해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주신의 사도시여. 부디 명령을.”
*
“닭장 아줌마. 몸도 뇌도 썩어서 그런가 퀘퀘한 냄새가 나는 짓밖에 못 하네?”
“주신의 사도시여. 몸은 괜찮으십니까?”
“개판난 닭장 아줌마의 얼굴보단 괜찮지.”
“아직 움직일 상태는 아니신 듯 한데.”
“어쩔 수 없잖아. 네가 너~무 좋아하는 동정찐따가 도와달라면서 질질짜는 데 어떻게 해?”
“…네?! 아니. 전. 그.”
“뭐야? 싫어했었어? 저 동정의 순정을 가지고 논 거야? 흐응. 겉만 아니라 속도 썩어 있었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전 에르기누스님을 좋아합니다! 정말 좋아!… 으. 으으.”
“키힣. 큽. 아. 나중에도 그렇게 지껄여줘. 저 찐따라면 너무 좋아서 그대로 성불해버릴지도 몰라.”
얼굴이 벌개진 요정여왕을 보며 한참 웃음을 흘리던 루시는 현기증이 올라온 듯 비틀거리다 요정여왕의 몸에 기댔다.
“아줌마 하나 때문에 죽어라 고생한 거거든? 살아서 추하게 질질 짜는 꼴을 보여주지 않으면 곤란해. 그거 보면서 잔뜩 웃어줘야 한단 말야.”
“…그. 죄송합니다.”
“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저 벌레들한테 명령이나 내려. 썩은 뇌로도 앵무새 역할은 할 수 있을 거 아냐.”
“뭘 하면 되겠습니까?”
“장난. 저 성질 더러운 벌레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
*
온다.
밤이 온다.
저주스러운 태양이 떨어지고, 쳐죽여 마땅한 아르마디의 시간이 끝나 나의 시간이 도래한다.
저 미물들에게 심판을 내릴 시간이 찾아온다!
얼마든 발악해봐라!
그런다 한들 어둠은 짙어지기만 할 터이니!
– 저 사람 왜 웃어?
– 자기가 멋있는 줄 아나봐.
– 만날 맞기만 하는 게 멋있어?
– 몰라.
– 불쌍해. 자기가 잘났다고 상상해야 하나봐.
– 맞다가 미쳐버린 거구나.
“하! 마음대로 지껄여라. 벌레놈들! 그래봐야 난…!”
남자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그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중력을 따라 떨어진다.
휙휙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뒤 편을 본 남자는 숲 채로 찢어져 버린 어둠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