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3
어둠이 베였다.
단순히 파도를 베어내는 것이 아니다.
바다를 갈라 대지를 드러내듯 검성이 내지른 검이 어둠을 반토막 내고서 주홍빛의 노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의 인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어둠이 갈라진 게지? 인간의 검이. 권능 하나 지니지 못한 평범한 인간의 무력이 어떻게 신의 격에 닿은 거냐!
남자가 품은 당혹이 눈동자를 떨리게 만들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강구할 시간은 없었다.
허공을 빙그르르 도는 그의 머리 앞에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음유시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달을 삼킨 늑대처럼 거대한 입과 날카로운 송곳니는 개념마저도 찢어발길 것 같은 위용을 풍겼다.
침이 뚝뚝 떨어지는 지옥의 입구를 보던 남자는 이내 잠시나마 생각이 끊어졌다 부상하는 걸 체험했다.
하하! 그래! 잠시나마 어둠을 갈라봐야 무얼 하느냐! 결국 내 권능을 끊어낼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반갑다.”
자신의 육신만한 대검을 든 기사의 인사는 담백했고.
“그리고 잘가라.”
작별인사와 함께 내질러지는 검격은 대지를 깨부술 것처럼 끔찍했다.
콰아아앙! 벼락이 내리칠 때와 같다. 남자의 전신이 터져나가고서 충격음이 따라 붙는다.
거구의 기사가 내지른 검이 소리보다 먼저 세상에 내려와 충격을 선사한 것이다.
끊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를 이해한 남자는 훗날 밤이 찾아오면 이 놈부터 끌어들여야겠노라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서 남자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이번에 자리한 것은 귀기 어린 눈을 하고 있는 권사였다.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라면 제 권능마저 내다버릴 여신이 택한 사도답게 상당한 외견을 자랑하는 남자였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그의 광증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죽어라! 여신의 적이여!”
사도의 광증에 홀렸던 남자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머리는 이미 터져나가고 있었다.
이쯤 되니 거만함으로 가득 차 있던 남자라 한들 기이함을 느끼게 됐다.
저들이 내가 부활할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두 번이라면 운이 좋았다며 웃어넘길 수 있을 터이나 이번 일은 다르다.
저들은 분명히 내 행동을 읽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안뇨오오옹.”
장난스러운 어투와 그렇지 못한 검격이 남자의 얼굴이 생겨나자마자 쏟아진다. 잘게 잘려 가루가 되어가면서 남자는 생각을 거듭한다.
에르기누스? 아니다. 그 놈은 자신이 어둠을 이해하고 있노라 생각하지만 그래봐야 인간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제가 파악한 부분에선 나와 대등하려 들지만 정작 자신의 인지가 닿지 못한 부분에선 무능하다.
여태 내 부활을 가로막지 못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쓰러져라.”
요정여왕? 이 쪽은 설득력이 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수백 년간 어둠과 교감을 나누어왔다.
고독 속에서 길고도 긴 세월을 버텼다.
그러니 어둠을 이해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만.
문제는 그녀가 기적에 의해 정화되었다는 점이다.
영원토록 비명을 지르게 만들고픈 꼬맹이가 짜증나는 것과는 별개로 저 녀석이 펼친 기적이 진짜란 부분에선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적에 의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을 요정에게 어둠에 대한 이해만이 남는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너무도 형편이 좋은 이야기이지 않나.
“죽어!”
그럼 어디지?
여신의 사도?
아름다운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골빈년에게 내 권능을 이해할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저 사도에게 어둠을 파훼할 재능이 있을 순 없다.
간슈? 더더욱 논할 가치가 없다. 신화시대의 전쟁 속에서도 제 서책을 쓰느라 골방에 틀어박혔던 쓰레기가 그 놈이다.
어둠을 마주한 적도 없는 겁쟁이가 어찌 어둠을 이해할까. 아르마디? 아냐. 이건 더더욱 말이 안 돼.
그 녀석이 개입했다면 어둠이 밀려나야 한다. 저 쓰레기들이 어둠을 파악한 것처럼 굴 순 없어. 빛은 결코 어둠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수렁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남자가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의 육신은 계속해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부활하는 것과 동시에 내리 꽂힌 대검이 어둠과 함께 그를 터트린다.
부활하는 것보다 먼저 내질러진 검이 어둠과 함께 그를 가루로 만든다.
늑대의 송곳니가 어둠과 함께 그를 물어뜯는다.
사도의 주먹이 또 다시 그의 육신을 터트린다.
제기랄. 어둠만 완전했다면! 주변의 어둠이 조금만 더 짙었더라면! 본래의 권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면! 이딴 장난질에 놀아날 필요는 없었을 터인데!
저들이 아무리 뛰어난 수준을 지니고 있어 봐야 인간이란 사실을 마음 깊은 곳까지 깨닫게 해주었을 터인데에에에!
언제 오는 것이냐. 밤은 언제 찾아오는 것이냐. 저주 받을 아르마디의 시간에 언제 종말이 찾아오는 것이냔 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 속에서 남자의 인내심이 점차 바닥나던 그 때. 남자의 주변에 짙고도 짙은 어둠이 자리한다.
분명하다. 착각일 리 없다. 드디어. 드디어! 이 세상에 밤이 드리운 것이다!
“점점 더 빨리 돌아오시는 군.”
남자가 내리치는 대검을 마주한 남자는 지침을 모르는 기사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 공격을 어둠에 받아 들였다.
어둠이란 것은 단순한 검정이 아니다. 모든 것을 물들여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힘이며 그 어떤 것보다 압도적인 포용이다.
제 아무리 강대한 힘일지라도 어둠은 그 힘을 보란 듯 집어삼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네 마음에 자리한 어둠이 보이는 구나.”
남자는 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재차 치켜드는 걸 보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밤이 찾아 온 이상 인간의 겸은 결코 그에게 닿을 수 없었으니까.
“네 아내를 구해주지 못한 하늘이 증오스럽지 않더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남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자가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한 마디를 할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이 훤히 보이는 데 대답이 무어 필요하겠는가.
“죽음은 순리라고? 어째서 죽음이 순리지? 누가 그걸 정했지?”
귓가로 파고 드는 어둠 앞에서 저항할 수 있는 자는 존재치 않는다.
과거 어둠의 악신이 가장 강대한 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마음에 어둠을 품은 자는 결코 악신의 권능에 저항할 수 없으니까.
용사라 불리던 그 작자가 너무 기이한 존재였을 뿐이다. 마음에 어둠 하나 존재치 않는 영웅이란 게 어찌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이상만 아니라면 나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는다. 저들의 마음에 어둠이 존재하는 한. 저주 받을 아르마디의 빛이 세상에서 저문 이상. 나는 결코.
“그 더러운 입으로.”
허?
“아내의 결심을.”
뭐냐. 이 놈이 어떻게 어둠에 저항한 것이냐. 마음 속에 이렇게도 커다란 미련을 품고 있는데 어찌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더럽히지 마라!”
멀뚱히 기사의 검을 바라보던 남자는 그 검 위에 빛이 스미는 것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위기감을 느꼈느냐. 저주 받을 아르마디여.
허나 늦었다. 발악을 시도하기엔 너무도 늦었어.
네 시간이 끝나고 나의 시간이 찾아왔는데 어찌 네 이적이 나를 가로 막을 수 있겠느냐.
대지를 짓뭉개는 것으로도 모자라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내는 일격을 온 몸으로 받아낸 어둠은 히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기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의미한 발악이구나.”
과연. 개같은 꼬맹이의 아비 되는 자 답구나. 영웅의 자질을 품은 자의 부모는 당연히 그 자질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왜 그러느냐? 더 검을 휘둘러 보거라. 네가 지칠 때까지 분풀이를 해보아라. 어둠은 모든 것을 포용할 지어니 그대의 분노를 쏟아내라.”
“거절하마. 이제 내 차례는 끝났으니까.”
“허. 벌써 포기를 하는 게냐?”
“내 말 못 들었나? 나는 내 할 일을 끝마쳤다고 말했다.”
기사가 그리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의 아래에 마법진을 숨겨뒀다고!?
나조차 찾아낼 수 없는 장소에?!
남자는 이전에 그 마법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를 궁지로 밀어 넣었던 에르기누스의 마법.
어둠의 권능을 봉쇄하는 힘을 지닌 족쇄. 수십을 겹쳐 만들어낸 일종의 대마법은 어둠의 악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풉♡ 정말 한~심하네♡”
귓가에 닿을 때마다 이성을 뒤흔드는 저주와 같은 목소리가 그의 앞에서 들려온다.
퍼뜩 얼굴을 치켜 든 남자는 요정들 사이에서 보란 듯 쿠후후 웃는 여자아이를 보고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밤이 된 줄 알고 흥분해선 난리를 치는 꼴이라니♡ 땅 속에 하도 처박혀 있다 보니 밤이 뭔지도 잊어버렸나봐?♡”
“…뭐?”
“뭐야?♡ 말해줘도 눈치 못 채는 거야?♡ 크흫♡ 큽♡ 정말 폐급이네♡ 이런 게 어떻게 신이 된 거람?♡”
여자아이가 흘리는 비웃음의 너머로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은 밤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해는, 태양은, 빛은, 하늘에 자리해 세상을 밝게 만들고 있었다.
“푸하하하핳♡ 표정 봐!♡ 호구가 된 게 그렇게나 충격적이었어?!♡”
“어…떻게.”
“궁금해?♡ 알고 싶어?♡ 무슨 장난질에 당해서 쭈굴이가 된 건지 알아도 마음만 더 아플 텐데?♡”
“…내가. 속았다고? 왜?”
“궁금하면 한 번 빌어봐♡ 루시님~♡ 저 병신은 당신한테 쳐발렸습니다~♡ 이렇게 부탁드릴 테니 제발 알려주세요~♡ 하고♡ 그럼 착한 내가 말해줄지도 모르잖아♡”
이해할 수 없다.
분명 이 세상에 드리운 것은 밤이었다.
어둠이었다. 나의 시간이었다.
헌데 어떻게 바깥에 태양이 떠있을 수 있단 말인가!
“흐으응♡ 말라 비틀어진 눈을 보고 있자니 좀 불쌍하네♡ 그냥 알려줄까?♡ 어떻게 널 속은 건지 보여줄까?♡”
여자아이의 비아냥이 자신을 가지고 놀기 위한 도발임을 남자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아이의 입을 바라보고 말았다.
자신의 이지를 벗어나버린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답을 바랐다.
“으응♡ 역시 싫~어♡”
자그마한 입가에서 흘러나온 건 당연하게도 비아냥이었다.
“뭐야?♡ 왜 충격 받은 거야?♡ 설마 기대했어?♡ 크흑♡ 큭♡ 진짜 병신이네♡”
“네 년! 죽여주마! 반드시 죽여주겠다! 내가 여기에서 끝나리라 생각하지 마라!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둠은 반드시 이 곳에 돌아온다!”
“푸하핳♡ 뭐래?♡”
자그마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는 여자아이의 대답에 기이함을 느낀 남자는 문득 자신의 권능을 관조했다.
그리고서 깨달았다. 자신이 지녔던 권능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안 돼.”
“흐아암. 나 피곤해. 그러니까 알아서 끝내.”
“안 돼.”
“기꺼이 그러겠다. 주신의 사도이며 영웅의 후계자여. 길고도 길었던 인연의 끝을 마주하마.”
“안 돼.”
“왜. 두렵느냐? 타인에게 강요했던 죽음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 무서우냐!?”
“안 돼애애애애!”
“잠시.”
남자의 비명과 에르기누스의 비정함 사이에 여신의 사도가 끼어든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뭐냐. 알랑한 동정이라면.”
“여신께서 당신을 말리라고 하십니다.”
“왜지?”
“이대로라면 당신이 권좌를 잇게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