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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75

Chapter: 575

   자신의 얼굴 위에 노을을 띄운 에르기누스와 홍색의 꽃이 되어버린 요정여왕이 쭈뼛대는 것을 보던 루시, 아니 그녀의 몸을 빌린 루엘은 에르기누스에게서 계획의 설명을 듣고는 고갤 끄덕였다.

   

   “동정 대가리에서 나온 것치곤 나쁘지 않은 계획이네. 근데 찐따야. 자신 있어? 조금 엇나가면 실연의 슬픔 속에서 세계랑 동반자살하게 될지도 몰라?”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죽어도 나 혼자 죽을 테니.”

   

   눈동자에 새겨진 각오를 본 루엘은 무릎 부근을 걷어차 에르기누스를 꿇게 만든 후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루시의 신성이 바닥난 지 오래라 특별한 축복은 걸어줄 수 없지만 고행을 택한 자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도하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다.

   

   “…고맙다.”

   

   루엘의 가벼운 웃음에 감사를 전한 그는 퍼뜩 일어나 전원에게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루시의 옆에 서 있던 베네딕이 그걸 가로 막았다.

   

   “감사인사는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듣겠습니다. 돌아 올 자신이 없으신 건 아니시잖습니까.”

   “허.”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뜬 에르기누스는 주변의 다른 이들이 고갤 주억거리는 걸 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내 웃음을 지었다.

   

   “알겠다. 그럼 다녀오마.”

   “안 와도 돼. 너 같은 동정찐따를 좋아하는 건 폐기되기 직전인 닭장아줌마밖에 없는 걸.”

   “하하. 그래도 감사인사는 전해야지.”

   

   에르기누스와 요정여왕, 그리고 그들의 손에 속박된 어둠의 악신이 숲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난 후. 루엘은 길게 숨을 내뱉다가 기지개를 켰다.

   

   루시의 몸을 빌린 탓인지 그의 앞에 몇 개의 푸른 색 창이 떠오른 게 보였지만 루엘은 그걸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루시가 확인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저 루엘님.”

   “왜애? 멍청한 트롤아? 네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딸이 잘못됐을까봐 걱정돼? 푸훟. 덩치는 큰데 속은 자그마하네.”

   

   네 딸아이는 안에서 곤히 자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려 했거늘 왜 그 말이 이렇게 바뀐 거지.

   

   루시의 안에 머물 적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 권능의 왜곡은 도저히 계산을 할 수가 없군.

   

   “설마. 루시에게 그런 어투를 가르친 것이.”

   “그게 신경 쓰여? 정말 마음에 들었나보네? 딸한테 매도당하는 게 그렇게나 좋았어?”

   

   베네딕의 눈초리가 좁아지는 걸 보고 루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다! 내가 루시와 만난 것이 재작년의 일인데 어찌 그녀에게 괴상한 어투를 가르친단 말인가! 억울하다!

   

   “장난입니다. 당신께서 루시의 곁에 오신 건 아마 재작년 즈음일 테니까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거람. 징그럽네. 진짜.”

   “그 시기부터 갑작스레 루시의 움직임이 좋아졌는데 그 방식은 저희 알른 가문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거든요. 무언가의 개입을 어렴풋이 추측하곤 있었죠.”

   

   그게 설마 성기사 루엘일 줄은 몰랐다며 웃음 짓는 베네딕의 모습에 루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진즉에 알고 있었다면 기세를 피우지 마라! 하여간에 그 딸에 그 아비라는 것인가.

   

   “그나저나 루시의 어투는 루엘 경께서 몸을 사용해도 바뀌질 않는군요.”

   “허접주신의 취향이 이런 걸 어쩌겠어. 하루 빨리 나가 뒤져줬으면 좋겠네.”

   

   반 강제로 불경을 입에 담게 된 루엘이 입을 다급히 닫자 베네딕이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루엘님이라는 게 느껴지네요. 루시라면 뭐 어쩌라는 것처럼 당당했을 텐데.”

   “야. 트롤. 나랑 비밀놀이 안 할래? 너 같은 짐승이 좋아할 만한 걸 해줄 수 있는데.”

   “아아. 루시한테 비밀로 해달란 것입니까? 알겠습니다. 스승의 위엄은 지켜야죠.”

   

   루시와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덕분인가 해석이 빠르구나.

   

   헌데 이 정도로 말을 잘 알아듣는 녀석이 어찌 루시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처량한 얼굴을 하는 게지?

   

   대충 무슨 소린지 다 이해할 텐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것이죠.”

   

   아아. 자기 딸이 상대라면 알아도 상처를 받는다는 건가.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군.

   

   “저어.”

   “오. 보기만 해도 처량한 성녀네. 안녕.”

   “처. 처량한가요?”

   “페이비! 왜곡된 거에요! 아시잖아요!”

   “처량…”

   

   상처 입은 페이비가 입술을 꾹 깨물자 주변의 다른 시선이 루엘에게로 쏟아졌다. 루엘의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었다.

   

   내가 한 것도 아닌 말 때문에 비난을 당해야한다니! 도대체 루시는 이를 어찌 버티고 있었던 것이냐!

   

   하아.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선 저 아이를 달래야 할 터인데.

   

   대충 무엇을 물으려했는지는 짐작이 가니 그에 대해 대답이나 할까.

   

   “다른 허접들 눈치나 보면서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는 꼴이 처량하단 거야. 여기저기 들러붙는 살마냥 자존감도 늘려. 돼지야.”

   

   저 아이는 스스로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확답을 바랐겠지.

   

   루시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올곧음을 되찾았다한들 그 올곧음은 루시에 의존하여 생긴 것.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완벽히 사라졌을 리는 없다.

   

   그러니 영웅의 지위를 지닌 내게 답을 바라게 된 것이다.

   

   바라는 걸 말해주는 건 어렵잖다만 그래봐야 의존의 대상이 늘어날 뿐.

   

   마지막 답은 스스로 구해야 한다.

   

   이 말 뜻이 전해졌을까 의구심이 들었다만 표정이 진중해진 걸로 봐선 어느 정도 이해한 듯 하구나.

   

   허어. 참. 이미 스스로에 대한 답을 구했으며 그 답을 주신에게 인정받기까지 한 아이가 왜 저리 헤매는지.

   

   루시라는 빛이 너무도 밝은 게 악영향을 끼친 건가.

   

   자기도 충분히 빛나고 있음을 알면 좋으련만.

   

   “저기. 저기. 루엘님.”

   

   루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옆에서 프레이가 슬그머니 그의 옆에 선다.

   

   “뭔데. 짐승 같은 꼬맹아.”

   “대련.”

   “…눈은 장식이야? 연약하디 연약한 내가 너 같은 짐승이랑 놀 여력이 있을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놀아주고 싶긴 하다만 내가 빌린 루시의 몸은 이미 한계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도 남은 여력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행동에 가깝다.

   

   이 이상 몸을 굴리면 나중에 루시가 잔뜩 불평을 해도 할 말이 마땅찮아져.

   

   “응. 있어.”

   “꼬맹아. 난.”

   “안 그럼 루시한테 다 말할 거야. 루엘님도 루시처럼 건방진 꼬맹이였다고.”

   

   …그건 곤란하다.

   

   관계가 편해져서 그런진 몰라도 최근 루시는 날 놀릴 순간만을 노리고 있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몸을 빌려 한 말들이 들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대체 이를 가지고서 몇날며칠을 놀려지게 될지.

   

   “할 말 생겼어?”

   “하아. 개가 짖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짜증나기는 한데. 지금은 안 돼. 기다려 멍멍아.”

   “왕?”

   

   고갤 갸웃거리는 프레이에게서 시선을 뗀 루엘은 고갤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

   하하. 모욕을 참아가면서 그 꼬맹이를 관찰하는 걸 허락받은 보람이 있군.

   

   덕분에 아주 즐거운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게 됐잖은가.

   

   히죽 웃으며 지상의 정경을 바라보던 그는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불청객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언제나 퀘퀘하네. 나까지 오염되는 기분이라 구역질이 나.”

   “책을 보관하기 위한 최적의 구성이다.”

   “하. 핑계 참 웃기네. 그냥 이런 쓰레기장이 네 취향인 거잖아. 곰팡이야.”

   “마음에 안 들면 꺼져라. 까마귀.”

   “그 별명을 허락한 건 한 사람 뿐이거든?”

   

   미와 예술의 여신. 라페토스는 송곳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간슈의 시선을 받아냈다.

   

   “하아. 뭐 하러 왔나. 라페토스.”

   “저 두 사람을 말릴 거야. 협조해. 저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직 이 세상에서 사라지긴 일러.”

   “네 개입이 저 이야기를 더럽힐지도 모르는데?”

   

   간슈의 지적에 라페토스가 입을 다문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저들이 선택한 이야기말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란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 찾아온 건 그녀가 저 두 사람과, 지상에 머무는 여러 이들을 아낀다는 증빙이었다.

   

   “그저 믿고 바라봐라. 멍청한 까마귀.”

   “야. 너. 방금 내가.”

   “저들을 믿으라는 것도. 날 믿으라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주신을 믿으란 거다. 그 분께서 자신의 사도를 시켜 택한 풍경이 바로 이것이니까.”

   

   한바탕 화를 내려던 라페토스는 입술을 붙이더니 눈을 꾹 감았다가 이내 머리를 쓸어올리며 간슈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못되기만 해봐.”

   “하하. 때리기라도 할 거냐?”

   “내가 특별히 준비한 옷을 너한테 입힐 거야. 얼마 전에 우리 아이가 재미난 옷을 그렸거든.”

   “…재미난 옷?”

   

   불길한 예감에 간슈가 되물음을 던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와 예술의 여신은 이미 지상에 찾아오는 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

   

   여신의 사도는 어둠이 권능을 부여받을 이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본디 무언가에 영향을 끼칠 땐 그것에서 영향을 받는 것도 각오해야 하는 법.

   

   어둠이라 하여 이 규율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에르기누스는 요정여왕에게 꿈을 꿔주길 부탁했다.

   

   “꿈의 정경 속에서 절 계속 생각해 주십시오.”

   

   자의가 아닐지라도 요정여왕이 수백년이란 시간 동안 어둠을 다뤄온 건 사실이다.

   

   이미 어둠 속에는 그녀의 의사가 짙게 스며들어 있을 거다.

   

   여기에 더해 요정여왕이란 존재가 한없이 신격에 가까운 개념적 존재라는 부분도 훌륭하다.

   

   그녀의 의사는 여타 다른 생명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발휘할 것이란 소리니까.

   

   “당신께서 절 생각해주신다면 전 분명 저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에르기누스는 학문적 발상 속에서 쏘아 붙이듯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요정여왕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꿈속에서 항상 자길 생각해달라고?

   

   그럼 언제나 자신은 자신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라는 게 아님을 여왕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얼굴이 벌개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휘유. 사랑의 힘으로 내게 맞서겠다는 건가? 아주 멋진데?”

   

   옆에서 이를 구경하던 악신이 비아냥거리자 두 사람의 움직임이 뻣뻣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사랑의 힘이라니 이 얼마나 시적인 문구인가.

   

   “에르기누스님. 마음의 준비는 되셨나요?”

   “저야 말을 한 그 순간부터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당신께선?”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전 수백년 간 오롯이 당신만을 생각해왔는 걸요.”

   “이것 참 절묘한 우연이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서 웃다가 동시에 악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 부디 그 결말이 어둠에 어울리길 바라마.”

   

   악신이 마지막 말을 끝마친 순간 그의 머리가 무너져 내리고 주변으로 어둠이 흘러나온다.

   

   주인을 잃은 어둠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 주변을 살핀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어둠의 한 가운데에 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봤다.

   

   “여왕이시여. 손을 잠시 빌려주시겠습니까?”

   

   여왕이 내민 손을 에르기누스가 붙잡는다. 그가 지닌 마력이 여왕의 육신을 향해 파고든다.

   

   요정여왕은 그 마력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한다. 그것이 지난 수백년의 악몽을 선사한 마력이란 걸 알면서도.

   

   “이번에는 얼마나 긴 꿈을 꿔야 할까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괜찮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이번 꿈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니까. 이 분과 함께라면 수백년의 세월도 얼마든.

   

   “당신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당신은 영원한 꿈을 헤매게 될 테니까.”

   “어. 그거 비유죠?”

   “지적하지 마십시오! 제가 부끄럼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후후. 그렇지만 말이죠. 제가 아는 에르기누스님은 그런 비유와는 한없이 거리가 먼 분이신 걸요.”

   

   주변의 어둠이 짙어진다. 노을이 지고 찾아오는 밤이 더욱 더 선명해진다.

   

   “이번에는 떠나기 전에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있습니다. 당신께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들이 넘칩니다.”

   “그런가요. 음. 그럼 제가 먼저 선수를 칠게요. 사랑합니다. 에르기누스님.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열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요정의 고백에 에르기누스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입술이 그의 숨을 가로 막는다.

   

   “…여. 여왕님.”

   “말했잖아요? 전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고.”

   

   어둠으로 이루어진 장막 속에서 달마저 홀려버릴 달콤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에르기누스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요정들의 여왕이 꿈을 꾼다.

   

   사랑에 빠진 한 여성이 꿈을 꾼다.

   

   수백년 동안 보았음에도 질리지 않는 사랑의 꿈을.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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