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6
요정의 숲에서 일어났던 재앙은 그 모든 게 요정의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숲의 한 가운데에서 피어오른 빛이 숲의 어둠을 물림과 동시에 대지에 파고 들었던 모든 어둠을 정화한 것이다.
이전의 푸르름을 되찾아가는 숲을 보며 성직자들은 주신과 성녀를 찬양했고 이번 일에 동원되었던 여러 기사들과 용병들은 순수한 감탄을 표시했으며 마법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숲의 안에 들어갔던 여러 맹자들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아래로 향하고 노을의 주홍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완연한 밤이 되고 서도 여전히 숲은 고요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불안이 전선을 사로잡을 무렵 멀찍이서 수십이지만 하나인 걸음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명실공히 왕국 최강의 기사단인 알른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화 시대의 전쟁을 거쳤음에도 온전한 기사들의 모습에 환호성을 지르던 군이었지만 알른 기사단의 반응이 미묘한 걸 보고서 하나 둘 목소리를 낮췄다.
“…어라? 다른 분들은?”
그러던 와중 어딘가에서 의문이 흘러나왔다. 복귀 행렬에 속한 건 선두로 숲에 들어갔던 이들과 알른 기사단 뿐이었던 것이다.
“왜 저들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혹시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게.”
명확한 답이 없는 탓에 이런저런 의구심이 불안이 되어갈 무렵 그 분위기를 진정시킨 건 이 전선의 책임자인 1왕비를 비롯한 왕국의 고위층이었다.
“알른 백. 상황을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따로 이야기를 드려도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일단은 이것만 대답해 주십시오. 저희는 승리했습니까?”
1왕비의 의도를 눈치챈 베네딕은 고갤 끄덕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모두는 들어라!”
어둑하게 물든 세상을 한 기사의 목소리가 진동시킨다. 피로에 찌들어 무너져가던 이들은 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고갤 들었다.
“어둠의 악신은 신화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영웅의 의지 앞에 무너져 내렸다! 그대들의 노력이 인간의 의지가 신에 닿게 만들었다! 다른 모두에게 이를 자랑해라! 자신이 신화의 일원이 되었다고! 오늘! 우리는! 승리했노라고!”
피로를 열광으로 바꾸는 영웅의 외침에 전선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울린다. 이를 확인한 베네딕이 입을 다물자 1왕비가 고갤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죠.”
천막 바깥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환호성을 파트란 공작이 차단한 후 사람들의 의문 어린 시선이 베네딕에게 쏟아진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 베네딕은 1왕비에게 눈짓으로 허락을 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우선 승전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요정의 숲은 어둠으로부터 정화되었고 어둠의 악신은 무너졌습니다.”
이 설명에 의문을 표하는 자는 없었다. 숲의 한 가운데에서 피어올랐던 기적의 빛은 누구라도 승리를 납득할 수밖에 없을 만큼 밝았으니까.
“희생자 또한 없습니다. 주신의 기적이 저희에게 보우하신 듯 저희는 온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럼 다른 분들은.”
“숲 안에 남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중입니다.”
베네딕은 여러 문제라고 요약했지만 실상은 좀 더 복잡했다.
어둠의 악신을 이 세상에서 없애기 위한 에르기누스의 선택.
그리고 그를 돕기 위해 잠에 빠져든 요정여왕.
두 사람의 잠이 시작되고서 만들어진 기묘한 형상의 고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주변을 지키는 요정들.
여신의 사도는 모시는 신의 명에 따라 자리를 지키는 걸 택한 사도와 에르기누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며 그 옆 나무에 기대 눈을 감은 검성.
숲이 옛 모습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며 의욕을 내던 늑대와 그에게 반강제로 끌려간 여우.
베네딕을 포함한 일행도 그들과 함께 숲에 남고 싶었다.
어떤 결말이 나더라도 좋으니 끝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리고 최악이 닥쳐왔을 경우 목숨을 걸고 다 함께 싸우길 바랐다.
‘너희 개허접들이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에 제동을 건 건 루시의 몸을 빌린 루엘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을 나무라며 돌아가길 종용했지만 그 뜻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루엘의 말은 루시가 그랬던 것처럼 비틀려 입 밖으로 새어 나왔으니까.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숲 안에 들어 온 카리아가 아니었다면 새벽 동이 틀 때까지도 그들 사이의 대화는 지지부진 했을 것이다.
‘고용주님…이 아니네? 누구야?’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루엘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는 자신의 장기를 이용해 루엘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해석해줬다.
‘최악의 경우. 이 고치에서 우화할 존재는 이전의 어둠보다 더한 무언가일 것이다. 그 때 희망이 될 것은 루시 알른이다.’
‘루시 알른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최악이 찾아왔을 때 그녀를 지탱해주기 위해서 그대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니 복귀해라. 군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라.’
착잡한 마음이 담긴 영웅의 말에 납득한 기사들은 떨떠름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숲을 빠져나왔다.
영웅담을 함께 한 친우마저도 훗날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참아내는데 자신들이 혈기를 못 참아서야 되겠느냐 생각하면서.
‘야. 베네딕. 이제 그 미친년한테 보고하러 갈 거지?’
‘그래야겠지. 내가 책임자니까.’
‘내용은 정해줄게. 괜한 빌미 주지 마.’
여전히 1왕비를 경계하는 카리아가 한 말에 고갤 끄덕인 베네딕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었고, 그녀의 조언대로 다른 이들에게 설명을 건넸다.
오랜 기간 암부에서 일하며 정치적인 식견을 길러 온 카리아의 조언은 1왕비를 비롯한 왕국의 고위층을 가뿐히 납득시켰다.
“당장 요정여왕님과 협의를 할 순 없는 건가요. 아쉽네요.”
1왕비마저도 이런 아쉬움을 드러낼 뿐 베네딕의 말에 의구심을 품진 않았다.
그 뒤에는 여러 절차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누어졌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인물인 요정여왕이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태인지라 결론 자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렇게 새벽 동이 틀 무렵 회의가 끝난 후 베네딕은 다시금 떠오르는 해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일이 끝났는데 왜 이리 마음이 찝찝한 것인지.”
훗날 고치 안에 들어갔던 두 분이 웃으며 날 반긴다면 그때는 이 마음도 가라앉을까.
*
알른의 기사단이 돌아간 뒤 어디선가 이젤과 종이를 꺼낸 프레테는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지는 내용은 오늘 이 숲에서 있었던 여러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지쳐도 해야죠. 이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니까.”
“그럼 땀내 나는 놈들 말고 귀여운 루시를 그려라. 뭣 하러 다른 놈들을 위해 시간 낭비를 하느냐.”
뮤러의 손에 붙잡혀서 강제로 남겨진 리나가 그림으로라도 치유를 받아야겠노라 이야기했지만 프레테는 그를 거절했다.
“영애와 요정여왕님의 그림은 최선의 준비를 한 후에 시작할 겁니다. 이런 장소에선 할 수 없습니다.”
“하긴. 그 둘을 가벼운 마음으로 그려내선 안 되겠지. 그래도 스케치정도라면 괜찮지 않나?”
“거절합니다.”
둘이 티격거리는 소리에 뜬 잠에서 깬 검성은 두 변태가 범죄적인 단어들로 의기투합하는 걸 보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생긴 것만 보면 동화나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둘이거늘 왜 저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헌병을 불러야 할 내용밖에 없는지.
당사자들이 못 듣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손님이 왔네.”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검성이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린 순간 수풀이 베여나가고 그 너머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에 대해 모르는 리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 표정에 혐오를 담았지만 다른 둘은 아니었다.
여러 공식석상에서 노인을 마주했던 이들은 성지에 머물러야 할 거물의 등장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성하? 아니. 성하가 여기에 있을 리가.”
“본인이 맞습니다. 유덴. 저런 기운을 지닌 게 이 세상에 둘일 리 없잖습니까.”
검성의 의구심에 즉각 대답한 프레테는 이젤을 뒤에 둔 채 전투태세를 취했다.
“허허. 너무 경계하지 마시지요. 여신을 모시는 사도님. 저는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 어떤 공식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홀로 말입니까.”
“그러면 늦으니까요.”
“거기 노친네. 움직이지 마. 성하인지 뭔지 몰라도 짐승하고는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이거든?”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연기의 여우를 본 교황은 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위대하신 주신께 맹세하지요. 저는 여러분들을 해하지 않을 것이며. 오롯이 여러분께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하. 그딴 맹세가.”
“주신께 내건 맹세가!”
숲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나무에서 막 피어난 잎 중 일부가 떨어진다. 그를 본 교황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찌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이를 어길 바에 전 차라리 혀를 깨물 것입니다.”
“…그래?”
순간 교황이 보인 광증에 멈칫한 리나지만 그녀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주신의 사도인 루시가 교황이란 작자를 경계하는 이상 저 자의 신앙심이 진실될 가능성은 적었으니까.
“아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겁니다.”
“그게 뭐가 문제죠?”
“요정여왕의 꿈은 어둠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헌데 낮이 찾아온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어떻게 그걸 아느냔 말이 전원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 중에서 의문을 꺼낸 자는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말 안에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다시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는 그저 주신의 기적이 기적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떻게 돕겠다는 건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나약해진 어둠이 영웅을 인정하게 만들면 됩니다.”
영문도 모를 말을 한 교황은 이럴 여유가 없다는 말을 꺼내더니 자신이 옆에 띄워 둔 가죽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술 교단의 지하에 포박되어 있어야 할 옛 어둠의 사도였다.
“어찌 그 자를!”
“어허. 움직이지 마. 만전도 아닌 너네랑 싸우고 싶진 않거든?”
앞으로 나아가려는 프레테를 가로 막은 건 강자사냥이란 별칭을 지닌 여성이었다.
대륙 최강의 일각이자 파괴를 관장하는 신의 사도인 라샤. 소모가 극심한 현재의 이들로썬 감당할 수 없는 대적자.
“저 개같은 할배 때문에 또 사냥감을 해치고 싶진 않아. 덤비면 받아쳐 주겠지만 되도록 가만 있어 주면 좋겠어.”
어깨를 짓누르는 라샤의 살기에 세 사람이 굳어 있는 동안 교황은 콧노래를 부르며 옛 사도의 머리를 집어 들더니 고치 앞에 때려 박아 넣었다.
“따라해라. 어둠은 자신의 주인을 인정했노라고.”
“…어둠은 자신의 주인을 인정합니다.”
교황의 말을 옛 사도가 힘없이 따라한다.
“어둠은 주인에게 굴복했노라고.”
“어둠은 주인에게 굴복했습니다.”
그러자 고치의 내부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제 새로운 주인을 모실 것이라고.”
“이제 새로운 주인을 모시겠습니다.”
여태 고요를 지키던 고치가 심장이 뛰는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하고.
가만 주변에 자리하던 요정들이 날개를 펼쳐 고치의 주변을 날아다니고.
옛 사도가 미친 듯이 중얼거리길 반복하고.
교황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지고.
새벽녘을 다시금 어둠이 집어삼키고.
고치에 금이 가더니.
*
– 언제 일어나는 걸까?
–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
– 그래야 우리랑 같이 기뻐해 줄 텐데!
“…끄러. 허… 흡!?”
퍼뜩 몸을 일으킨 나는 세 요정이 내 주변에서 재잘대는 것을 들으며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았다.
으. 결국 뻗어버렸나. 한계까지 이른 몸을 억지로 움직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숙소로 무사히 돌아온 걸 보면 어떻게 잘 된 것 같기는 한데.
“야. 벌레들. 너네 닭장은 뭐 하고 있어?”
– 여왕님?
– 여왕님 방금 전에 깨어나셨어!
– 지금 엄청 기뻐하고 계셔!
– 루시도 같이 가서 놀자!
– 춤추자!
– 무척 즐거울 거야!
깨어났다는 건 다 좋게좋게 끝났다는 소리려나.
다행.
음? 어라?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왜 요정들의 날개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