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8
탈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의 발을 가뿐히 압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개에 불과하다.
예외에 속한 이들은 이 대륙에 차고 넘치고 심지어 그 예외는 대부분 탈 것을 이용하는 고위층이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탈 것이 멀쩡히 남아있는 건 탈 것을 이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권위가 되기 때문이며 때때로는 볼품없는 외견이 그 안을 가려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썩어 문드러지는 나무로 이루어진 차체와 망아지인가 말인가 구분도 되지 않는 저급한 말이 이끄는 마차 안에 주신 교회의 교황과 대륙 최강의 반열 중 하나가 타고 있으리라 상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않나.
평상시라면 죽어도 이딴 느려터진 물건에 탑승하지 않을 라샤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불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라도 창 밖의 초록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괴물은 껄끄러운 존재니까.
“이봐. 노친네. 최근 들어 너무 뽈뽈 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거 아냐?”
이 노친네가 좋을대로 사용된 것에 대한 불만을 담아 라샤가 으르렁댔지만 교황은 느슨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만큼 이 대지에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단 거겠지. 기쁜 일이다. 이 노구가 죽을 때까지 대지가 고요했다면 난 침묵 속에서 침전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지랄하네.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최악의 방식으로 일을 일으킬 놈이. 이래저래 교황이 교황이기 전부터 얽히며 그의 본성을 마주했던 라샤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마라. 내 곁에서 일을 한 덕에 여러 강자들을 편히 상대하지 않았나.”
“뭣 같은 소리 하지 마. 나는 내 혼을 섬짓하게 만들어 줄 투쟁을 바라는 거야. 다 지쳐 쓰러져가는 떨거지나 버림 받았단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짐승들의 목을 거두는 게 아니라.”
여태 라샤가 교황의 아래에서 처리했던 작자들이 강했냐 약했냐고 묻는다면 라샤는 기꺼이 그들이 강자였노라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 개인은 분명 대륙에서 능히 이름을 떨칠 수 있을 만한 존재였다. 그들이 만전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기껏 강자들을 만나게 됐는데 연전 끝에 지쳐 쓰러져가는 상태라니! 이게 뭐야! 덕분에 노친네만 재미 봤잖아!”
“음. 확실히 재미를 보긴 했지. 신이 지상에서 피어나는 광경이라니. 꽤 오래 살아오며 많은 걸 보았지만 저만큼 재미난 건 몇 되지 않았어. 하물며 새로이 피어난 신이 에르기누스라는 천재가 만들어낸 그릇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저 개같은 숲에 들어가기 전부터 생각한 건데. 대체 그릇이란 게 무슨 의미야?”
몸을 움직이는 부분에 있어서는 만능에 가까운 라샤지만 마법 쪽은 아는 것만 알고 모르는 건 모른다. 심지어 그게 여러 학파에 속한 마귀들이 떠들어 댈만한 것이라면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평소 같았다면 이런 건 물어보지도 않았겠지만. 모르는 체 넘어가기엔 숲에서 보았던 광경이 너무도 경이로웠어. 이 나이를 먹고 소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고.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역사에 남을 천재란 이야기는 들어봤겠지?”
“그야 당연하지. 신화 시대를 구원한 용사 일행에 대한 이야기는 음유시인들이 지겹도록 떠들고 다니는 물건이라고. 방랑하다 보면 듣기 싫어도 알게 돼.”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재라는 표현은 그의 대단함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제약에 불과하다네.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지혜를 넘어선 자가 없으며, 인간의 몸으로 마법의 신을 압도한 존재를 어찌 천재라고만 이야기하겠나.”
교황의 말을 들은 라샤는 입을 헤벌렸다. 인간이 신을 신의 분야에서 압도한다고?
그런게 가능해?
서로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어쨌건 악신의 사도라서 잘 알아.
신이란 작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념이 형태를 갖춘 존재. 교황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에르기누스는 마법 그 자체보다도 마법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되잖아.
“지상에서 피어난 마법의 새로운 신이 자신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 한 분야를 파고 들었을 때. 과연 해내지 못 할 일이 있을까?”
“복잡한 거 묻지 말고 그냥 말 해.”
“정답은 ‘없다.’ 다. 대마법사 에르기누스는 길고 긴 연구 끝에 자신의 사랑을 구원할 방법을 찾았고, 또한 후대의 후대로 이어질 업을 끊어낼 방법을 찾아냈지.”
신을 이 세상에서 지우는 유일한 방법. 격의 대체. 본래 신격이 머무르는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게 만드는 것.
“이론적으로는 한없이 옳은 이야기다만 이를 실현시키는 건 어렵네. 어쨌건 악신들이 비틀린 건 자신을 이루는 권능이 그를 바랐기 때문이니까.”
어둠은 세상이 더 어두워지길 바란다. 공허는 끝없는 고요를 원한다. 세상은 대지에 꺼지지 않을 불을 피우고자 한다. 파괴는 대지는 물론이고 자신마저도 파괴되길 바란다.
“평범한 정신을 지닌 자가 신격을 얻더라도 또 다른 악신이 태어날 따름이지.”
태고의 시절부터 이어져 온 격은 상대를 간단히 무너트리고 자신의 의사를 강제한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범상찮은 정신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
지상의 생명을 뛰어넘어 신격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존재가.
예를 들자면, 에르기누스 자신을 포함한 영웅 같은 존재가 말이다.
이 정도쯤 오면 아무리 라샤가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어도 자연스레 알 수밖에 없다.
“그럼 그 고치 안에 들어있던 에르기누스가.”
“신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지. 영웅의 정신과, 영웅의 지혜와, 영웅의 미련을 갖추었으며, 저도 모르는 사이 신격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자.”
과거의 영웅은 수백년이란 시간을 넘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루어냈단 거야? 이야. 피가 끓네. 그런 괴물이 있다면 꼭 한 번 싸워보고 싶은 걸.
“물론 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그의 간절함을 보우하시지 않았다면 에르기누스는 기적에 도달하지 못했겠지.”
“당신의 도움을 이야기하는 거야?”
악신의 사도인 라샤가 보기에 고치의 안은 무척이나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이런저런 사정에서 그녀가 기원을 바치고 있는 악신마냥 변모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교황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고치에서 우화한 건 다시 피어난 요정이 아니라 새로운 악이었겠지.
“흠? 아니. 그럴리가. 내가 한 일은 그저 마무리에 불과하다.”
칭찬할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정작 거기에 돌아온 건 기겁이었다. 교황은 진심으로 자신이 한 일이 별 것 아니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주신의 보우란 게 뭔데.”
“좀 더 본질적인 부분, 신격이 인간의 아래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거다.”
교황은 정화의 빛에 대해 언급하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늙어빠진 노친네의 얼굴에 서린 희열만큼 꼴보기 싫은 것도 없었기에 라샤는 혀를 차며 고개를 틀었다.
…아예 이해 못할 건 아냐. 확실히 숲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았던 빛은 굉장했으니까. 저게 신의 빛이 아니라면 무어가 기적이냐는 생각이 들 만큼.
“혹여나 오해할까 싶어 말하자면 그건 성녀님께서 벌인 기적이 아니다.”
“아. 그러… 뭐?”
“성녀님께서는 자신의 고결함으로 주신의 사랑을 받고 계신다만. 방황하는 발자국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순 없으니.”
“아니. 잠시만. 성녀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나. 이미 겨루어 봤으니 모를 수가 없을 터인데.”
“…너. 알고 있었어?”
“그야 당연하지. 내가 어찌 신의 사도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그 분을 뵙게 될 날이 너무도 기대된다 말하는 교황의 어투에서는 평소의 근엄함에선 찾아볼 수 없는 아이 같은 들뜸이 묻어나왔다.
*
어둠의 신이 된 에르기누스에게서 대략적인 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이곳에 머물던 자들이 왜 저리 축 처져 있는지 이해하게 됐다.
아무리 고된 싸움을 거쳤다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모인 면면이 면면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교황이 하는 일을 지켜보기만 하다 그들이 떠나가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차오를 법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라샤도 라샤지만 교황 본인도 만만찮은 괴물이니까.
베네딕이랑 정면에서 맞붙을 수 있는 투사에 죽지만 않으면 뭐든 회복시킬 수 있는 성직자가 붙으면 답 없잖아.
그리고 말야. 어쨌든 간에 결과는 좋잖아? 그럼 뭐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내버려 두자고.
<교황이 이 자들을 도왔다는데 크게 놀라지 않는 구나.>
‘그야 교황이잖아요? 악신이 사라진다는 데 두 손 들고 환영하겠죠.’
<네가 극심하게 교황이란 자를 혐오하기에 그 자도 악신과 관계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만.>
‘아뇨. 개인적인 호불호랑은 별개로 교황의 신앙심은 진짜에요.’
극도로 교황이란 존재를 경계하던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믿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그의 신앙은 진짜다.
이 세상이 현실이 되어 교회라는 장소가 많이 변했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큼은 바뀔 리 없다.
‘신앙이 진짜라고 한들 그게 멀쩡한 인간이란 의미는 아니잖아요?’
<아아. 그거야 그렇지. 내가 아직 살아있을 적에 지겹도록 보았다.>
그렇겠네. 그 때는 신화의 시대니까. 신이 인간의 곁에 머물던 때이니만큼 미친놈들도 많았겠지.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분노가 깃드는 걸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곳에 찾아왔다는 교황에 대해 생각했다.
그 인간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기에 찾아온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
어쨌건 우리는 교회랑 협력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쪽에 정보가 흘러 들어갔다면 교황이 여길 주목할 건 당연해.
당연하지만.
그 미친 놈이 기적의 광경을 보고서 페이비를 만나지도 않고 돌아갔다는 건. 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제에에엔장.
“상황이 어찌되었건 그 자의 도움으로 내 신격이 안정된 건 사실이다. 아직은 권능을 다루는 데 서투르다만 금새 적응할 수 있을 거다. 마법을 연구하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변태 까마귀한테 들려주면 눈을 치뜰 이야기지만 이는 사실일 거다. 방금 전에 나한테 보낸 메시지만 봐도 이는 명확하다.
인간일 적에도 마법으로 신에게 다가섰던 천재다. 신이 되어 권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근데 동정찐따님. 닭장여왕은요?”
“여왕님이라면 왕국의 우두머리를 만나러 가셨다. 어쨌건 그들은 이 일에 여러 이권을 바라고서 협력한 거니까. 숲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선 그 분이 직접 가는 편이 낫겠지.”
엑!? 머리가 꽃밭인 아줌마가 1왕비를 만나러 갔다고?!
너 미쳤어!? 그러다 요정여왕이 1왕비한테 뭘 뜯길 줄 알고!
“무얼 걱정하는 지는 알겠다만 괜찮다. 앞서 그 분이 내게 직접 말했듯, 여왕께선 더 이상 순수하지 않으시니까.”
다 생각하고서 보내 드린 것이라고 에르기누스는 이야기했지만 난 차마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괜… 찮겠지? 괜찮은 거겠지?
*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향취와 어제 하룻 동안 너무도 좋아진 향취가 동시에 나는 게 신기하단 이유에서 요정여왕의 안내인 역할이 강제된 카리아는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하며 웃는 걸 보고서 식은땀을 흘렸다.
1왕비 저 인간이야 예전부터 저 꼴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요정여왕 쪽은 왜 저렇게 속이 거무티티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