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
“오늘 하루 고생했다.”
전투학 교수 안톤의 말에 칼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아침에 소울 아카데미에 들렸던 칼은 하루 종일 여러 가질 인수인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교수가 부임할 땐 한 달 전에 와서 가르쳐줘야 하는 것들이 하루 만에 쏟아졌으니 아무리 칼이 소울 아카데미가 굴러가는 걸 안다 한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봐라. 나머진 내일 수업을 진행하면서 익히자꾸나.”
안톤은 그리 이야기를 하면서 칼에게 서류 더미 하나를 건네주었다.
“교수님. 이건?”
“그것도 내일까지 다 읽어 놔라. 알겠지?”
어지간한 책 두 권은 겹친 듯한 두께에 당황한 칼이지만 그는 못하겠단 소리를 하지 않았다.
분량이 꽤 되기는 하지만 못할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안톤에게 인사를 한 후 교수실에서 빠져나온 칼은 저녁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기지개를 폈다.
근 몇 년간 매일 고된 훈련을 반복하다가 앉아서 종이와 씨름을 하고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렸다.
아가씨의 호위를 맡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때려치우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 홀로 웃던 칼은 루시를 보러 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아가씨께선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태까지 칼이 봐온 루시는 결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신에게 축복을 받고서 달라진 루시는 지극히 알른 가문의 사람다웠다.
쉬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걸 선호한다는 이야기다.
분명 수련을 하고 계시겠지.
그리 판단을 내리고 대련장을 향해 발을 움직이던 칼의 귓가에 한 여자아이가 내뱉는 말이 들어왔다.
“그래. 망나니 영애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니까.”
망나니 영애라면 아가씨의 별명인데.
칼은 걸음을 늦추며 여자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는 들러리 영애라면서 말을 걸었어.”
“들러리 영애? 진짜 너무하네.”
“그러니까.”
루시 아가씨. 아카데미에 와서도 다른 사람을 깔보듯 부르는 버릇은 고치지 못하셨군요.
하기야 파트란 공작 영애도 얼빵 영애라 부르셨는데 다른 사람을 평범히 부를 리가 없으시겠죠.
“무슨 지랄을 할까 싶어서 웃으면서 말을 들어줬거든? 그러니까 나보고 무슨 곤란한 거 없냐 그러더라.”
“갑자기?”
“그래. ‘당신 같은 들러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해 줄게요.’ 라면서.”
“힘만 생겼지 예전이랑 달라진 건 하나도 없구나.”
“진짜로. 알른 가문만 아니었어도 들이받아 버리는 건데.”
자기 주인의 평판이 점차 내려가는 걸 듣고 있던 칼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마디의 축복을 받은 후부턴 말하는 건 험해도 정말로 좋으신 분인데 평판이 이래서야 친구를 사귀실 수 있으실까.
빨리 아가씨의 선한 본질을 알아차릴 사람이 나오면 좋으련만.
“근데 신기한 건 진짜로 나한테 곤란한 일이 있었단 거야.”
그 말을 들은 칼은 떠나가려던 발을 멈췄다.
정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은.
또 아르마디께서 아가씨께 무언가 말을 했나보구나.
그렇단 건 아가씨께서 저 아이의 고민을 해결해야 한단 것일 텐데.
“에. 진짜? 뭔데?”
“비밀이야.”
“저기.”
칼이 말을 걸자 여자아이 둘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처음엔 의심의 시선을 보냈지만 칼의 얼굴을 보고선 그 경계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전투학 교수가 된 사람입니다만 길을 잘 모르겠어서요.”
길은 모르겠다는 건 핑계였다.
이전에 소울 아카데미에 재학했던 그가 길을 모를 리가.
다만 그런 식으로 경계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아. 새로 온 교수님이시구나! 어디로 가시는데요?”
“수련장으로 갈 생각입니다.”
“거기라면…”
교수라는 이야기에 경계가 풀린 듯 여자아이는 잔뜩 들뜬 어투로 칼에게 길을 알려 줬다.
“…그렇게 가면 돼요! 다시 한 번 설명 드릴까요?”
“아뇨. 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칼이 웃으며 알겠다 말을 하자 여자아이가 아쉬워하는 티를 냈다.
그를 본 칼은 일부러 들은 것은 아니란 말로 어미를 떼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나 고민이 있으시면 상담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테니까.”
칼은 그리 말을 하고서 자리를 떴다.
여자아이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걸 확인한 칼은 저 여자아이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걸 확신했다.
나중에 이를 말씀드리면 아가씨께서 분명 기뻐하시겠지.
루시에게 칭찬을 들을 걸 생각하며 기뻐하던 칼은 학교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은 알른 가문의 기사잖아.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조이 파트란.
루시에 의해 얼빵 영애라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어버린 파트란 공작가문의 영애.
그녀는 칼의 얼굴을 보고는 질책하듯이 목소리를 냈다.
조이의 행동이나 몸짓은 무척이나 위압적이었다.
숙련된 기사인 칼조차 자기도 모르게 예를 차릴 정도로.
아가씨는 어찌 저런 분을 얼빵 영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역시 알른 가문의 핏줄을 이으신 분답게 담이 크셔서 그런 건가.
칼은 속으로 아가씨 대단해!를 외치며 조이에게 답을 건넸다.
“저는 소울 아카데미의 교수 신분으로 이 곳에 있는 겁니다.”
“아. 그런 식이야? 알른 가문도 지극정성이네. 알른 영애가 무슨 일이 생긴다고 쓰러질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귀하신 분이니까요.”
귀하신 분인가.
조이는 칼의 말을 듣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알른이라는 힘 있는 백작 가문의 영애이니 귀하다는 말을 써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지만 귀한 만큼 언행이나 행동을 조심해 줬으면 좋을 텐데.
조이는 루시가 이전처럼 마냥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조이가 죽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 준 사람이 루시니까.
갑작스럽게 꺼져버리던 바닥.
그 안에서 마주했던 기괴한 몬스터들.
그리고 그들의 주인.
조이는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를 악몽 속에서 마주하곤 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수천 개의 눈동자를.
자신을 향하던 썩어 들어간 손을.
그 안에서 새어나오던 죽음을 고하던 목소리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파트란 영애님?”
칼의 목소리에 악몽에서 빠져나온 조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 최근엔 안 이랬었는데.
어쨌든 그 던전 안에서 보여준 루시의 모습은 이전의 무책임하고 신경질적이던 루시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믿음직스러운 기사의 것이었다.
말은 여전히 험하긴 했지만.
그 날 이후로 조이는 루시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
한 사람에게 목숨을 구원 받았는데 어떻게 계속 예전처럼 생각을 하겠는가.
그랬기에 조이는 오늘 루시가 아서에게 불쌍왕자라 그런 것도 아무 사정을 모른 채 평소처럼 행동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상대의 민감한 부분을 비꼴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조이는 오늘 하루 종일 고민을 한 끝에 루시에게 아서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주기로 결심했다.
너무 민감한 부분은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서가 불쌍하다는 단어를 얼마나 싫어하는 지를 알려주자고.
그럼으로써 루시가 더 이상 아서를 불쌍왕자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자고.
허나 조이의 이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루시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 잘됐네요. 당신. 알른 영애가 어디있는지 아나요?”
“아가씨께서라면 아마 수련장에 계실 겁니다.”
“수련장이요?”
아카데미 입학 첫 날에 아카데미를 둘러보지도 않고 수련장에 가서 몸을 움직이고 있다고?
조이가 의문을 표했지만 칼은 자신만만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 네가 알른 영애의 기사니까 잘 알고 있겠지.
칼의 말은 옳았다. 루시는 수련장에 있었다.
다만 칼이나 조이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그 곳에서도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대련을 하고 있는 거죠?”
루시는 창을 든 남성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남성이 입고 있는 교복의 스카프 색깔을 보아 그는 소울 아카데미의 3학년 재학생으로 보였다.
“그것도 3학년이랑.”
“그런 것 같습니다.”
대체 어쩌다 저 두 사람이 대련을 하고 있는 걸까 같은 질문은 필요치 않았다.
평소 루시가 하고 다니는 기행을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왔으니까.
“알른 영애가 시비를 건 거겠죠.”
“…”
“그녀는 얌전히 있는다는 단어를 모르는 걸까요?”
조이의 한숨을 들으면서도 칼은 차마 자신의 아가씨를 변호하지 못했다.
“도대체 3학년을 어떻게 이기려고.”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1학년과 3학년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한다.
소울 아카데미는 철저히 실력제로 운영되니까.
이러한 기조는 아카데미의 학년제도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아카데미 내에서 윗 학년으로 진급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아카데미 내에서 정한 기준을 넘을 필요가 있다.
바깥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와 권세를 지니고 있는 지는 중요치 않다.
정해진 기준을 넘지 못하면 결코 윗 학년으로 진급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아카데미의 고학년이 되었단 소리는 아카데미 내에서 여러 시험을 통과한 실력자라는 이야기였다.
알른 영애가 아무리 알른 가문의 피를 이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고 하지만 3학년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학년 간의 격차는 그만큼이나 거대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지금 싸움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공세를 유지하는 쪽은 어디까지나 3학년의 선배.
루시는 쏟아지는 창을 받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파트란 영애께선 저희 아가씨가 패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루시의 패배를 기정사실처럼 생각하고 있던 조이에게 칼이 물음을 던졌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저는 저희 아가씨가 이기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리 당신이 모시는 사람이라지만 너무 콩깍지가 낀 것 같네요.”
“콩깍지라니요. 억울하군요. 알른 가문의 기사는 결코 이러한 싸움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알른 영애가 이길 것 같다고?”
“예.”
“어째서?”
조이는 칼의 확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그의 말을 기다렸다.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알른 가문의 기사가 자기 가문을 들며 승리한다고 말한 것이다.
분명 거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
“아가씨께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으셨으니까요.”
칼은 말했다.
창병에게 싸움이란 일종의 시한폭탄 같은 것이라고.
상대가 거리를 좁히기 전에 상대를 무너트리면 승리.
그렇지 못한다면 패배.
창을 든 이의 수준이 높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일반적인 경우엔 이게 보통이라고.
“제가 보기에 저 창수의 실력은 무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준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칼이 담담히 현 상황을 읊는다.
대련이 시작되고서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루시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다.
3학년 선배가 창을 움직일 때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차 줄어든다.
“폭탄이 터지려 하는군요.”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조이에게도 저 대련의 양상히 전혀 다르게 보였다.
여유롭게 승기를 굳혀가는 루시와 점차 짙어져가는 패색을 떨쳐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3학년 선배.
칼의 말이 옳았다.
“알른 영애가 이기겠네요.”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