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1
내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스스로 납세한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만약의 경우 계획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내 몸을 움직일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라니.
왜 이렇게 쓰잘데기 없이 고결한 거야! 짜증나게! 좀 더 욕망에 충실하라고!
그럼 진지하게 메이스를 들고 다녀야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을지언정 놀릴 맛은 있었을 거 아냐!
‘왜 굳이 숨기려고 하신 거에요? 괜히 기대했잖아요.’
<…말할 수 없다.>
‘제 몸을 빌렸을 때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요?’
<어. 어떻게 그걸!>
아아. 메스가키 스킬의 저주에 당한 거구나.
처음에 왜곡 당하면 당혹스럽지. 어느 정도 적응된 지금도 왜 그따위로 번역이 되느냐는 소리가 매번 튀어나오는 걸. 응. 응.
‘적응되면 꽤 재미있어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하지 않던가.
메스가키 스킬은 여전히 욕지거리를 하루 종일 선사할 수 있을 뭣 같은 스킬이다만 아예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스킬의 핑계를 대면서 장난을 치면 꽤 즐겁거든.
‘할아버지도 에르기누스님께 동정찐따라고 부르면서 은근히 즐기셨을 거 아니에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냔 답을 기대하며 내뱉은 말이었지만 할아버지에게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 할아버지. 설마.’
<대답하겠다! 대답을 할 테니 그 이상 추궁하지 마라!>
‘괜찮아요. 할아버지. 사람은 누구나 미혹에 흔들리는 거잖아요. 전 그걸 포용할 수 있어요.’
<그 이상 파고 들지 말란 말이다!>
자괴감 서린 외침을 듣고 있자니 가학심이 마구마구 치솟았지만 이러다 할아버지가 진짜로 울 것 같아서 그만뒀다.
실로 두렵구나! 성기사마저 타락시키는 메스가키의 능력이란!
‘그러게 왜 숨기고 그래요.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요.’
<…옛 친구놈과 싸우다 헤어졌단 이야기를 어찌 당당히 하겠느냐.>
‘싸웠어요?’
<너도 잘 알겠지만 우리의 싸움은 제대로 된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우리가 택한 것은 그저 미봉책일 뿐. 후대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어.>
신화시대의 영웅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바라는 바를 이루진 못했다. 악신이란 존재는 그들의 힘으로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남들이야 우리를 보면서 영웅이라 불러줬다만 정작 우리 자신은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다.>
영웅들은 그 호칭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신의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고결함을 품은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영웅들은 스스로에게 한없이 엄격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들이 이룬 업적을 찬양해도 영웅들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랬으니 서로 간의 사이가 좋을 수 있겠느냐? 당연히 아니지. 다른 이들의 앞에 설 때는 웃는 체를 해도 그 뒤편에서는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누군가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싸움이 났거든.>
에르기누스는 자괴감 어린 한탄과 함께 스스로를 원망했다.
가라드는 체념하지 말았어야 무작정 소리치다 다른 방도가 있었느냔 루엘의 다그침에 입을 다물었다.
정작 가라드를 다그친 루엘도 속으로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자괴감을 감추기 위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용사는.
침묵을 지켰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웃음을 지으며 여느 때처럼 이야길하고 다녔지만 그 뒤 편에선 공허한 눈으로 자신의 망가진 검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참 한심스럽다고 생각을 한다만 그 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악신에게서 세상을 구하겠단 일념으로 모든 시련을 뛰어넘은 끝에 맞이한 결과가 후대에 짐을 미룬단 것이었으니까. 모두들 자기자신이 너무도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야.>
회한 어린 성기사의 이야기는 실로 잔혹한 것이었다.
수많은 것을 희생한 끝에, 무수히 많은 시련을 넘어선 끝에, 오롯이 세상을 악에서 구하겠노라는 일념으로 내달린 끝에 도달한 결말이 그런 것이라면 그 누가 웃을 수 있을까.
<차라리 대판 싸우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거다. 다시금 하늘에 올라간 이들에게 대들고 소리쳤다면 그 꼴은 나지 않았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밤을 지새울 일도 없었을 거야.>
허나 영웅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선했다.
자신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한 길에 걸음을 내딛을 만큼 고결했다.
다른 이들이 불가능하다 만류할 일에 웃으며 달려들 만큼 바보 같았다.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 모든 걸 감내하고자 했다.
<뭐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인간이다. 곪아버린 마음은 서로를 향할 가시를 만들어 냈고 우린 자연스레 소원해졌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으면 잊고 싶은 일이 자꾸만 떠오르는 탓에 서로에게서 도망친 게다.>
‘그래도 결국 할아버지랑 동료분들은 잊고 싶은 걸 마주했네요?’
<음?>
‘그렇지 않았다면 후대를 위해 무언갈 남겨둘 리가 없잖아요?’
후대를 위해 무언가를 남겨뒀다는 건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일지 생각했단 이야기고, 이는 곧 잊고 싶었던 악몽을 마주했단 소리다. 영웅들은 넘어졌을지언정 무너지진 않았다.
‘할아버지?’
<…아. 그래. 미안하구나. 잠시.>
물기가 묻어나오는 듯한 목소리에 고갤 갸웃했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꽤 괜찮은 말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우리가 흩어지고서 대략 오 년이 지났을 무렵. 용사가 다시금 날 찾아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추레했는지 처음에는 그가 용사라는 것도 알아 보질 못 했어.>
경비에게 붙잡혀 있던 용사를 마주한 루엘은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의 일들에 대해 사과하려 했다.
그 때 미혹에 사로잡혀 동료를 동료로 보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용사의 마음에 남은 미련이 있다면 성직자답게 고해성사를 받아주려고도 마음 먹었지.
<허나 우리의 재회는 최악의 방식으로 끝났다.>
‘…용사가 뭘 한 건가요?’
<내가 무언가를 저질렀을 거라 생각하진 않으냐?>
‘뭔가 저지를 사람이 사과할 생각은 안 하죠.’
<하하. 그것도 그렇군.>
가볍게 웃던 할아버지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일 분이 넘게 지나서야 침묵을 깼다.
<그 놈은 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리자고 했다.>
‘…네?’
<말 그대로다. 용사는 이 세상에서 신이 사라지면 된다고 말했다.>
빛이 있기에 어둠이 더 짙어지고 어둠이 있기에 빛이 더 밝아지는 것이라면 둘 다 없어지면 되는 것 아니냐고 용사는 루엘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론적으로 틀린 부분은 없었다. 에르기누스가 있었다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화를 내면서도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 그랬을 만큼.>
‘대체 할아버지 안에 있는 에르기누스님은 어떤 인간인 건가요.’
<그걸 설명하자면 하루가 넘게 걸리니 넘기고. 아무튼 용사가 한 말은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지금에 와서 단언하자면 머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미친 놈. 악을 없애기 위해 선도 없애자고? 역병을 막기 위해 마을을 불태우잔 소리잖으냐.>
처음에는 온건하게 설명하려 했던 루엘이지만 용사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지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래서 쫓아냈다. 내게 매달리는 녀석을 성지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머리에 열이 식고서 바깥으로 나가봤다만 용사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더군.>
그 후로 할아버지는 자신이 결심한 바를 이루기 위해 돌아다니는 한편 용사에 대한 정보를 취하려 했지만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실로 시시한 이야기이지 않으냐?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도 굳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었을 뿐…>
‘용사 그 분이 마지막에 나타났던 곳이 어디죠?’
그거면 충분하다. 마지막 목격정보만 있어도 수색의 범위를 상당히 좁힐 수 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전혀 시시하지 않았단 거다!
<…하아. 그래. 루시 너라면 이렇게 대답하겠지.>
‘가. 갑자기 왜 그래요?’
<루시야. 난 말이다. 네가 용사의 흔적을 찾지 않길 바란다. 설령 요정의 노래가 한없이 예언에 가까운 무언가라 한들 신을 떨어트리고자 했던 광인의 유지를 이어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아냐.>
그의 목소리에서 짙은 걱정이 묻어나온다.
깊은 절망 끝에 추악해 져버린 용사의 끝을 본 할아버지는 용사가 남기고 간 것이 내게 해가 되리라 생각하는 거다.
그래도 퀘스트를 하지 않을 순 없단 효율충의 생각이 내 안에 넘실거리는 걸 꾹 눌렀다.
이런 말을 해봐야 할아버지의 입장에선 전혀 와닿지 않을 테니까.
지금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 아냐. 할아버지에게 말해야 하는 건 신화의 시대를 살았던 영웅의 유지를 잇는 다음 세대의 영웅이야.
‘할아버지.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렸죠? 영웅분들은 도망치지 않았다고. 스스로가 죄라 여긴 걸 마주 했다고.’
<맞다. 넌 네게 그리 이야길 했지. 허나 루시야. 나의 말이 모든 걸 담았다고 생각하진 말거라. 옛 친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난 많은 걸 생략했다.>
그렇겠지. 실제로 루엘이 보았던 용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추악할 거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눈동자 속에서 선명히 비칠 만큼 끔찍할 거다.
‘그래도 용사잖아요.’
설령 그렇다 해도 그는 용사다.
대마법사 에르기누스보다도. 기사 가라드보다도. 성기사 루엘보다도. 더욱 고결하고. 더욱 선하며. 더욱 희망차고 순수한. 주신의 선택을 받은 영웅이다.
‘높이 날아오른 새는 그만큼 더 오래 떨어져야 해요. 그렇지만 새는 새에요. 지상에 떨어져도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겠죠. 용사님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그 분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지 않았을까요?’
<그건 너무 희망적인…>
‘할아버지가 용사라고 인정한 분이잖아요? 전 그 안목을 믿을 뿐이에요.’
절대 허접주신이 안목이 옳았다고는 말 못하겠어. 그랬다가 용사가 사실은 귀여운 여자애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되면 진짜 주신을 혐오하게 될 것 같거든.
이런 속사정을 숨기고서 대답을 했더니 할아버지가 허.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참. 어린 아이들은 훌쩍훌쩍 자라나는 구나.>
‘저 키컸어요? 또 기적을 일으킨 덕분에 격이 올라서 신장이 성장을…’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꼬맹아.>
‘꼬맹이!? 방금 저보고 꼬맹이라고 한 거에요?!’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나를 꼬맹이라고 부르는 건 결코 참을 수 없어! 전쟁이다! 루엘!
<하하하. 전쟁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만 그 전에 네 물음에 답해야겠구나. 용사가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 그 곳은 지난 번에 너와 함께 갔던 섬이다.>
‘…섬. 이요?’
<그래. 그 괴상망측한 던전이 있던 곳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