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2
파트란 가문의 사람들이 자리한 곳에 도착한 조이는 몸을 씻어내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몸을 가득 채운 피로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조이는 퍼뜩 고갤 들고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자신이 돌아왔다는 걸 확인하곤 느릿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맞다. 다 끝났지? 이 곳에 더 이상 우리의 적은.
“그리 쉽게 경계를 풀어선.”
“히야아악!?”
“안 된다.”
옆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비명을 내지르면서 마법을 형성한 그녀는 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저주가 담긴 탄환을 쏘았다.
“추레한 꼴과 달리 마법은 괜찮군. 알른 영애가 잘 훈련을 시키긴 했어.”
허나 그 저주는 상대에게 닿지 못했다. 침입자가 슬그머니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저주를 흩어버린 것이다.
조이는 상대의 실력에 기겁하면서도 다급히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상대는 나보다 압도적인 실력의 마법사야. 정면으로 붙는다면 상대도 안 되겠지.
근데 그렇다 해서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없어. 최소한 파트란의 마법사들이 달려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정도는.
“눈빛에 날을 세우기 전에 입가의 침부터 닦아라. 공작 영애란 녀석이 품위를 잃어서 어쩌잔 거냐.”
“…스. 스승님?”
“그래. 나다.”
위대한 대마법사 에르기누스는 자신의 제자를 한심한 듯 바라보다 이내 근처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어둠을 물리치는 일은.”
“보시다시피 잘 끝났다. 바란다면 어둠의 신이라고 불러도 된다만.”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어둠의 신은 조금 그렇잖아요?”
“음. 긍정적이지 못한 호칭이긴 하다. 전대가 적당히 개판이었어야지.”
가볍게 웃은 에르기누스는 다급히 얼굴을 정리하는 조이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는 고생했다. 겨우 며칠 동안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실력이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칭찬이었지만 조이는 그 말을 듣고서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아뇨. 저는 부족해요.”
어제 조이는 루시를 따라 요정의 숲을 구원하고 어둠의 악신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조이가 얻은 건 무력함에 대한 한탄뿐이었다.
“제 잘못 때문에 친구들이 죽을 뻔 했어요.”
루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게 최선이었다고 말했지만 조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 루시가 악신을 상대해주지 않았다면, 고통과 공포 속에서 악신을 함정에 빠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야.
자신만만하게 방법이 있다고 말한 건 나다. 그러니까 실패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전 정말 답도 없는 얼빵이인가봐요.”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번에야말로 루시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나는 또 다시 처참한 실패를 저질렀고 친구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공포를 겪게 만들었다.
“원래 다 그러는 거다.”
친구들에게 방해만 될 뿐이란 생각에 울먹이던 조이는 무미건조한 대답에 놀라 고갤 들었다.
에르기누스는 턱을 괸 채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 그러고 산다.”
“그치만 전.”
“친구들을 죽일 뻔 했다고? 나도 그랬었다. 호기심에 미쳐 무언가를 하다가 다른 이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어.”
용의 피를 채취해야 한답시고 난리를 치다 죽을 뻔한 일. 상대의 힘을 다 까발린 탓에 좋게 넘어갈 수 있었던 상대와 적대하게 된 일. 마법의 신에게 대들다 마법을 못 쓰게 된 일.
“이외에도 내가 잘못한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당장 요정의 숲이 어둠에 물들게 된 것에도 내 지분이 존재하고.”
무덤덤하게 자신의 잘못을 읊은 그는 입을 헤 벌린 채 가만있는 조이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헌데 말이다. 다른 녀석들이라 실수를 하지 않았을 성 싶으냐? 그럴 리가. 용사놈은 시도 때도 없이 길을 잘못 들어서 우리를 고생시켰지. 가라드는 마을에 들를 때마다 여자를 꼬시다 문제를 일으켰고. 루엘은 타협 없는 꼰대놈이어서 좋게 넘어갈 수 있었던 부분에서 싸움을 만들었다.”
에르기누스만이 잘못을 한 게 아니다. 모두 다 자신의 성격과 행동에 따라 잘못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함께 다닐 수 있었다.
내 옆에 있는 것이 똑같은 등신이란 걸 알았기에 어떤 실수에도 한숨 한 번 내쉬고 욕지거리를 해준 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논의한 거다.
“알른 영애가 주신의 사도로 간택될 만큼 고결한 이인건 맞다만 그렇다하여 아예 실수를 하지 않는 초인인 건 아니잖으냐. 당장 이번 일만 해도 영애가 너흴 죽일 뻔 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아니에요. 그건.”
“이 일에 너희를 끌어들인 게 알른 영애인 이상 그녀에게도 책임은 있다. 알잖으냐.”
부정하려는 말을 가뿐히 끊어낸 에르기누스는 갈 곳 잃은 눈동자 가운데에서 손바닥을 부딪혀 소리를 냈다.
화들짝 놀란 조이가 어깨를 움츠리자 에르기누스가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알른 영애는 네 친우냐?”
“…네. 물론이에요. 루시는 제 소중한 친구에요.”
“그렇다면 부채의식 따윈 내다 던져라. 손익으로 이루어지는 건 친구라 부르지 않는다.”
조이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숨을 거두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친구란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주는 존재. 거기에 손익의 계산따윈 필요치 않다.
상대가 내 도움이 되고 싶어하고. 내가 상대의 도움이 되고 싶어 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에르기누스님께서 하려는 말씀은 이런 것일 테지.
이해는 했고 납득도 했지만.
응.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네.
그러기엔 내가 루시에게 받은 게 너무 많으니까.
“참. 겉으로 보기엔 칼로 찔러도 피 하나 안 날 것 같은 녀석이 왜 이리 속은 소녀 같은지.”
“그것대로 매력이 넘쳐서 좋지 않나요?”
“네. 매력이 넘치신답니다. 질투가 날 정도에요.”
어깨 위에 내리앉는 손에 감촉과 함께 들려온 여성의 말에 흠칫 놀란 조이가 허리를 핀다.
“요. 요정여왕님?”
“네에. 저랍니다. 놀라셨나요?”
거뭇하게 물든 것 같은 여왕의 눈초리에 에르기누스가 다급히 말을 건다.
“여왕이시여. 부디 진정해주십시오. 이 아이는 그저.”
“알아요. 제자잖아요? 이 분께서 제가 부리는 어둠을 파훼한 걸 기억하는걸요.”
“그럼.”
“장난친거에요. 겨우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 질투를 할만큼 치졸한 여자는 아니랍니다? 뭣보다 에르기누스님의 취향은 좀 더 성숙한 쪽이잖아요?”
“쿠흡! 큽!”
얼굴이 벌개져서는 연신 헛기침을 하는 에르기누스의 모습에 여왕이 쿠후후하는 웃음소리를 낸다.
온기가 돌아온 풍경 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조이는 자신의 귓가에 재차 닿은 목소리를 듣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현대의 마법사님.”
여왕의 감사가 마음에 닿고 나서야 조이는 자신이 한 일을 체감했다.
계획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실수를 저지른 것도 무수히 많았지만, 그녀는 루시를 도와 요정의 숲을 구원했다.
신화 시대에 에르기누스가 남긴 미련을 해소했다. 죄책감에서 벗어난 조이는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나는 것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라신다면 제가 직접 당신의 정령이 되어줄 수도 있는데.”
“그건 곤란합니다. 여왕님. 정령마법은 너무 편리하기에 의존하기 쉽습니다. 마법사에겐 높은 확률로 독이 될 겁니다.”
“제자를 뺏길까봐 불안하신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 아이의 재능은 제가 괴팍하던 적에도 거두어들이고자 했을 정도니까요.”
“…네?”
“네는 뭐가 네냐. 이제 볼 일 끝났으니 인연도 끊겠다 그거냐?”
“아. 아뇨! 그럴리가요! 그게. 전. 그러니까.”
“후후. 곤란해하는 모습도 참 귀엽네요.”
신격에 가까운 존재 둘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얌전히 귀여움 당하는 처지에 만족해야만 했다.
*
점심이 되어갈 무렵. 1왕비에게 호출 받은 아서는 애써 피로를 무시하며 1왕비가 머무는 천막을 향해 걸었다.
– 그 자는 네게 참 관심이 많구나.
“딱히.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걸테지.”
– 흐음. 글쎄. 내가 나라를 관리하는 입장이라면 널 가만 내버려 둘 것 같진 않은데.
“그런가?”
– 너 개인의 능력은 그렇다 치고서라도 너와 연결된 이들의 면면이 상당하니까. 이용할 수 있으면 써먹어야지.
국가를 이끌어가는 이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나는 꽤 쓸만한 패인가.
초대 솔라딘의 조각이 하는 말이니 그럭저럭 설득력이 있군. 정작 나란 놈이 쓸모 있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어서오세요. 3왕자님. 몸 상태는 괜찮으신가요?”
“예. 물론입니다. 제가 한 일이 그리 많지 않은지라 피곤한 게 더 이상하죠.”
– 피곤하지 않다고? 밤 중에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놓고는?
아서는 속으로 닥치라는 말을 전하며 웃음을 가장했다.
“1왕비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어제 전투가 시작할 때부터 쉬지 않고 일을 하시고 계신 듯 한데.”
“저야 전선에서 살짝 물러나 있었으니까요.”
– 저 또한 거짓부렁이군. 허리에 찬 검에서 여전히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아서도 다른 기사들에게 들어 알고 있다. 1왕비가 전선에서 물러선 적이 없음을.
그녀는 베네딕 알른과 그 기사단이 자리를 비우고 난 후 항시 맨 앞에 서서 기사들을 독려했다. 그러고도 여태까지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일을 해왔다.
루시 알른의 정보원은 1왕비님을 껄끄러워하는 듯 하나 저 분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안부인사는 이쯤하고 제가 3왕자님을 부른 이유입니다만.”
“예. 말씀해주십시오.”
어제의 일에 대한 설명인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일단 대부분의 공은 성녀님에게로 돌리고 그 후엔.
“알른 가문의 영애와 약혼하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나요?”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