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8
당장 섬에 들어가는 일이 중요해서 뒷전으로 미뤄놓고는 있었지만 내가 할 일은 섬에 들어가서 던전을 공략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내가 요정여왕에게 인도받은 것은 영웅들이 남기고 간 것을 취하는 거니까.
에르기누스가 남긴 할아버지와 용사의 인형도 만나러 가야하고, 가라드의 성을 공략하러도 가야 한다. 이 중에서 베네딕과 함께 가기로 마음을 먹은 장소는 가라드의 성이었다.
용사의 해골은 후일 만나서 진득한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은 대상이고, 할아버지의 해골은 꼭 나 혼자서 만나고 싶은 상대인 걸.
왜냐고? 그래야 할아버지를 놀릴 수 있을 거 아냐! 모니터 너머로도 꼰대 같음이 전해지던 할아버지의 해골인데 현실에서는 어떨지.
아. 너무 기대된다. 목소리만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부들댈 할아버지를 상상하니까 너무 신이 나!
<…나는 전혀 기대가 안 된다만. 그 땐 차라리 날 내버려두고 가면 안 되더냐?>
‘할아버지가 제 무기인데 어떻게 안 들고 가요?’
<그건. 그렇지만.>
자신의 흑역사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절로 우울해지는 듯 할아버지가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음. 나도 중2병에 걸려서 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니던 시절의 나를 만나다 생각하면 경기를 일으킬 것 같으니까. 할아버지도 그런 거겠지.
“리나님. 굳이 이 곳에서 그리 경계심을 올릴 이유가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 그 쓰레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게 현상이다. 그러니 그 짜증나는 얼굴에 상처를 남길 준비는 해야지.”
“…왕자의 얼굴에 피해를 입히면 문제가 커집니다만.”
“인간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 내 알바 아니다. 나는 그저 루시의 번견이 되어 그녀를 지킬 뿐!”
내가 바깥에 나갈 것이란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합류한 리나는 마차를 모는 말 위에 서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옆에서 변태짓을 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짐승마냥 잠만 쿨쿨자던 리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번에 한해서는 너무도 눈치 없는 짓거리였다.
베네딕의 눈에 담긴 실망감을 보라. 딸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내겠답시고 호위도 내다 버린 채 나왔는데 자신이 무어라 할 수 없는 상급자가 끼어들었단 사실에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바아보 파파~”
이래서야 베네딕을 바깥으로 끌고 나온 보람이 없잖아!
마차 뒤쪽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옆에 앉았더니 베네딕이 흠칫했다가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피곤하다면 더 자도 된다만.”
“변태파파. 눈이 엉큼한 거 알아? 자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그런 오해를 하면 곤란하단다! 나는 리나님이 아니야!”
“그런 음해는 슬프구나. 나는 잠든 루시를 건드리진 않는다. 그러면 미움받을 게 훤하잖으냐.”
<대신 고로롱대면서 자는 너를 감상하긴 하지만.>
할아버지. 그런 끔찍한 사실은 자신의 마음 속에 묻어두시면 안 될까요?!
내일 잘 때는 얼빠여우를 우리 같은 곳 안에 가둬야겠다 생각하던 나는 베네딕이 큼직한 손으로 꺼낸 로브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도착하기 전까진 이걸 입고 있거라. 루시 넌 너무 눈에 띄니까.”
“그러니까 보여줘야지. 허접들이 쩔쩔매는 꼴을 구경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그게 말이다.”
“아님 뭐야? 딸의 귀여운 모습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싫어? 혼자 독점하고 싶은 거야? 푸하핳. 변태파파는 욕심쟁이구나아?”
“그. 변태라는 말만 어떻게 해줄 수 없겠느냐. 정말 마음이 아프단다.”
죄송한데 이건 제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부디 흘려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바보 파파. 비도를 즐기던 쓰레기의 성까진 얼마나 남았어?”
“가라드님의 성이라면 아직 두 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한다.”
가라드의 성은 일종의 마경이다. 자격이 없는 자는 들어올 수 없도록 가라드가 여러 수를 써 둔 탓에 던전보다도 더 던전 같은 장소가 완성되어버렸지.
그 덕에 가라드의 성 일정 반경의 땅에는 그 어떤 사람도 살지 않게 됐다.
여기에서 마을을 만들면 말을 탄 기사들이 찾아와서 정중히 기절시켜서 쫓아내거든. 다시 마을로 찾아가면 그 마을은 이미 불타서 사라진 지 오래고.
이러한 사정 탓에 가라드의 성으로 향하기 위해선 그나마 가까운 영지로 순간이동을 한 후 물리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움직여야만 한다.
공간마법사를 고용하는 방법이 제일 효율적이긴 하다만 이번의 경우에는 가라드의 성을 공략하는 건 부가적인 일에 불과하니까.
베네딕이랑 느긋한 시간을 보내려면 마차여행을 선택하는 쪽이 낫지.
“저어기 바보 파파. 나 심심해. 재밌는 이야기 해 줘.”
“…어. 재. 재밌는 이야기? 잠. 그래. 내가 용을 쓰러트렸던 이야기는 어떠냐.”
“너무 진부하네. 과거의 추억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 아저씨가 우리 파파라니. 나 좀 슬퍼졌어.”
“그. 그러면 미라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줄까?”
“그거 겨울에 지겹도록 들었거든? 바보파파가 얼마나 주접스럽고 변태처럼 말하는 지 묘사해줘?”
“주접. 변태.”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단 사실을 몰랐던걸까. 베네딕의 고개가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진다.
평소라면 그걸 보며 죄책감을 품을 나였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베네딕은 진짜 주책맞은 아저씨 그 자체였는 걸. 술자리에서 절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순위를 꼽으면 탑3 안에는 들 것 같았다고.
“어쩔 수 없네. 바아보 파파처럼 재미없는 아저씨한테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다시 한 번만 기회를 다오! 우리 루시가 재밌어 할만한 이야기를 반드시 찾아낼 테니!”
“시끄러워. 분위기 파악 좀 해. 바보 파파. 개허접파파대신 내가 떠들어주겠다잖아.”
가뿐하게 베네딕을 침묵시킨 나는 턱을 괸 채 다리를 휘저으며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만나서 미노타우르스에게 죽을 뻔 했던 일이라던가.
입학시험에서 연금술사를 만나 끔찍한 꼴을 당할 뻔 했던 일이라던가.
악신의 사도에게 살해당할 뻔 했던 일.
카리아를 만나러 갔다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일.
가라드의 인형을 상대하다 목이 날아갈 뻔 했던 일.
버로우 영지에서 있었던 일.
이외에도 베네딕이 어찌 반응할지가 너무 훤해 웃음으로 넘겼던 일 하나하나를 베네딕에게 들려줬다.
그 때마다 베네딕은 기겁을 하며 무어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나는 아직 말하고 있단 고함으로 그 입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여러 위기들을 늘어놓으면서 깨달은 건데 말야.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이 없더라?
고인물이고 나발이고 조금 엇나가는 순간 그대로 죽었을 위기가 한 두 번이 아냐!
허접 주신!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보통 주신의 사도쯤 되는 지위라면 좀 더 받들어 모셔져야 하는 거잖아! 제 발로 죽을 위기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이걸 더 짜증나게 만드는 건 내가 한 일에 비해 보상이 더럽게 짜단 거야!
아 물론 스펙의 상승은 많이 됐지!
근데 스펙이 오르면 적의 스펙도 같이 올라가는 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 어!?
“…여태 감춰왔던 걸 이야기해주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니?”
억울함이 차올라서 허접 주신에게 무어라무어라 따지고 있으려니 베네딕이 긴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바보 파파의 주책 맞은 눈으로 보기엔 내가 작아보이겠지만 말야. 나보다 허접한 놈팽이들이 세상에는 한 가득이거든?”
“그야 그렇겠지. 우리 루시는 엄청나게 노력했고 그만큼 강해졌으니까.”
“알면 쓰잘데기 없는 걱정 좀 하지 마. 트롤같이 생겨선 왜 속마음은 그리도 소녀스러운 거야. 나중에 같이 인형놀이라도 해 줘?”
베네딕이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첨언이나 할아버지의 조언이 있기도 했지만 그전에도 왠지 모르게 느껴졌었거든.
“바보파파는 모르겠지만 개허접주신은 존경할 이유가 없는 페도변태새끼야. 나한테 부끄러운 옷을 입히고 좋아하는 도착증 환자라고. 그런 쓰레기가 날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 세상에 나보다 귀여운 사람은 없는 걸.”
앞으로도 나는 몇 번의 위기를 더 넘겨야 할 거다. 최소한 게임 속 스토리의 끝을 보지 않는 한 안심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순순히 죽어주진 않을 거다. 소울 아카데미 썩은물의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발악할 거란 말이다.
그리고 내가 이를 악물고 살아남으려 한다면 허접주신도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날 도울 거라고 생각한다.
도저히 웃어넘겨 줄 수 없는 성적취향과 위대한 주신이란 이름이 아까운 무능함을 제외한다면 괜찮은 녀석이니까.
왜 페이비도 그렇게 말했잖아? 세상을 선하게 만들려는 마음만큼은 진짜라고.
“그러니까 집에 처박혀서 기다리기나 해. 바보 파파. 강아지도 할 줄 아는 걸 못 할만큼 짐승같은 인간은 아니잖아?”
그러니 난 죽지 않는다. 그 어떤 일을 겪더라도 살아남아서 이 세상의 끝을 볼 거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뭐가 됐든 추가 컨텐츠잖아.
최소 DLC, 최대는 후속작이라고.
그런 걸 내가 놓칠 것 같아!?
“…그렇구나.”
줄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인 베네딕의 어깨가 떨렸다.
마음 속에 떠오르는 말은 여럿이 있었지만 난 입을 다문 채 앞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스가키 스킬에 동화되어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분위기 파악은 할 수 있거든.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저 알아서 발을 움직이는 말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 쓰잘데기 없이 음침하고 낡은 성이 보였다.
언제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성은 내가 찾던 시련의 장소였다.
베네딕에게 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 줄 곳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