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
3학년 선배가 휘두르는 창은 빠르다.
그는 여태까지 수많은 훈련과 시험 그리고 던전을 통과해 온 이다.
나보다 실전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체의 스펙도 그렇다.
이 사람이 3학년 NPC중에서 평균 이하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전생하고 반년이 될까말까한 나와 태어나서 아카데미 3학년에 이르기까지 수련을 거듭한 선배의 스펙이 비슷할 리가 있는가.
그러니까 이건 원래는 이길 수 없는 승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난 상황을 정상적이지 않게 끌고 갈 힘이 있거든.
우선은 철벽 스킬의 존재가 크다.
3학년 선배가 아무리 창을 빠르게 휘두른다 한들 이 사람이 노리는 것보다 철벽이 내게 말해주는 게 빠르다.
그러니 내게 선배의 공격이란 어디까지나 대처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천천히. 성급해지지 마라.>
다음은 할배의 존재가 있다.
철벽이 내 방어를 더 두텁게 만들어 준다면 할배는 내 부족한 전투경험을 보충해주는 존재다.
수많은 전장과 고된 싸움을 해 온 할배에게 알지 못하는 전장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
할배는 승리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뭣보다 제일 중요한 건.
“머저리 선배♡ 느러 텨젔네♡ 그런 허접한 창으로 나한테 상처를 낼 수 있겠어?♡”
“시끄러워!”
“아하하. 아카데미를 3년이나 다녔으면서 1학년도 못 쓰러트리는 거야?♡ 완전 허접이네♡”
“시끄럽다니까!”
내가 상대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거지.
처음에 싸움에 관해 잘 모를 적의 나는 상대의 감정을 뒤흔든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몰랐었다.
근데 포셀이나 칼 그리고 알른 가문의 여러 기사와 대련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상대를 흔든다는 것은 도발 이상의 의미를 지녔더라고.
지금 3학년 선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처음엔 차근차근 날 공격하던 선배가 지금은 감정적이다.
자신의 의도를 감출 줄은 모른다.
손익의 계산보단 나한테 피해를 입히는 것을 중시한다.
내 의도를 읽어내겠단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에 당했기 때문에.
이건 너무도 효율적인 디버프다.
자신의 감정에 잡아먹혀 자신이 기이한 힘에 당하고 있음조차 눈치 챌 수 없는 디버프라니!
거기에 더해 상대가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내 스텟까지 높아지는 것이다.
성능을 따지고 보면 메스가키 스킬은 사기 스킬이 맞다!
그 대가로 내 말투와 평판을 지불해야 한다는 게 너무 뼈아플 뿐!
나를 향해 휘둘러진 창대를 방패로 막아내고서 3학년 선배와의 거리를 잰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두 걸음.
그 정도면 좁힐 수 있다.
내가 할배에게 배운 바대로라면 창수가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거리.
허나 3학년 선배는 그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이빨을 드러내야 할 때다.>
할배는 내게 성기사란 악어라고 비유하는 걸 좋아했다.
방패라는 물 아래에서 기회를 보다가 틈이 보인 순간 몰아쳐 날카로운 이빨로 목숨을 끊어내는 것이 닮았다면서.
난 전설적인 성기사가 한 비유치고 멋이 없다 생각을 했지만 그 설명 자체는 지극히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성기사가 싸우는 방식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지금!>
재차 3학년 선배가 내지른 창을 걷어낸 순간 할배가 소리쳤다.
난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할배가 이런 데에서 실수할 리 없단 걸 알았기에.
갑작스런 접근에 당황한 선배가 발을 물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지금 이 순간 창수가 지닌 유리는 사라졌다.
이젠 나의 차례다.
메이스를 치켜들어 아래로 내리 찍는다.
이제 이 동작에 어색함은 없다.
할배조차도 건드릴 부분이 없다 인정한 나의 필살기.
머리 깨부수기.
3학년 선배는 결말을 짐작하고서 눈을 꾹 감았다.
허나 그가 예상한 최악의 결말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에 손을 멈췄으니까.
조심스레 눈을 뜬 3학년 선배는 자신의 눈앞에 머무르는 메이스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아하. 머저리 선배. 자신만만하더니 이게 다야? 허접하네.”
내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반 강제로 키득거리며 웃었더니 3학년 선배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언더독 스킬을 활용한 빌드가 발견된 순간부터 소울 아카데미에서 당신의 운명은 항상 이랬어요!
꼬우면 강하셨어야죠!
그래봐야 어떻게든 공략했겠지만!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주어집니다!]
나는 내 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을 보고서 손을 꾹 쥐었다.
이 퀘스트가 주는 언더독이라는 스킬은 자기보다 레벨이 20 이상 높은 적을 상대할 때 자기 데미지의 5%를 고정데미지로 바꾸어주는 스킬이다.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써먹기 어려운 데다가 후반에 가면 완전히 무쓸모가 되어버리는 스킬이지만 이 스킬은 반드시 필요하다.
미래에 꼼수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이것마저 못 얻었다면 슬펐을 거야.
아카데미 입학식 날 받아야 하는 퀘스트 대부분을 받지 못했으니까.
그 중에서도 제일 뼈아픈 건 ‘여학생의 고민’ 퀘스트다.
그건 아무것도 모르고 받았을 때는 별 것 아닌 서브 퀘스트처럼 보이지만 잘 파고들면 좋은 보상을 준단 말야.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받았어야 했는데.
하아. 다음번에 다시 말을 걸어보든가 해야지.
“역시 너 강해!”
방패와 메이스를 거두기 무섭게 프레이가 내게 달려와 말을 걸어왔다.
“지금 싸움이 모자라지 않아? 바로 다시.”
‘싫어요.’
“허접 검사. 너 닭대가리야?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해?”
“에.”
“수고하셨습니다. 아가씨.”
“고생했어요. 알른 영애.”
프레이를 반 강제로 밀어내고 나니 조이와 칼이 내게 다가왔다.
이 두 사람은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거야?
칼이야 내 스토커 같은 거니까 날 만나러 왔다 쳐도 조이는 왜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별 거 아닌 일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허접은 그렇다 치고 얼빵 영애께선 무슨 일이신가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리 말을 하는 조이의 표정이 진중하다. 3왕자와 관련해서 한 소리를 하러 온 거겠지.
으. 곤란하네. 그건 내가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애초에 무슨 기준으로 사람의 별명을 정하는 지도 모르는 마당에 내가 그걸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만…’
“얼빵 영애.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요?”
“바쁜가요?”
‘네!’
“물론이죠. 제가 얼빵 영애처럼 어슬렁어슬렁 댈 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어슬렁이라뇨. 전 당신 때문에 굳이 여기에 온 거라고요.”
미간을 찌푸린 조이의 진심이 뭔지 대충 추측은 간다.
조이는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을 3왕자를 위해서, 그리고 3왕자에게 미움을 받게 될 나를 위해 날 설득하러 온 거겠지.
생긴 건 악역영애같아도 좋은 사람이니까.
메스가키 스킬의 디메리트가 조금만 더 적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 도움 필요 없어요.’
“도움이요? 얼빵 영애가? 저에게? 아핫.”
명백한 비웃음에 조이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으. 미안해. 조이.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날 이해해주지 않으렴?
안 될까?
안 되겠지.
호감도 표시가 안 떠서 다행이다.
조이의 호감도가 하락합니다 같은 메시지가 떴다면 분명 마음이 꺾여버렸을 거야.
“…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등을 돌려 떠나가는 조이를 보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호감도를 70까지 올리는 게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울 아카데미에서 반 년을 보내다 비명횡사할 내 미래밖에 보이질 않는데?
<외톨이로 사는 것도 때론 나쁘지 않은…>
‘할아버지. 시끄러워요.’
어설픈 위로는 말을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모르시나요?
닥쳐요. 할배. 아카데미 화장실에 처박아 버리기 전에.
하아. 그래. 계속 우울해 하고 있어봐야 어쩌겠어.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지.
‘칼…’
“야. 허접. 지금 일 끝난 거지?”
“예? 네에. 일단은.”
‘따라와요.’
“따라와. 할 일이 있으니까.”
*
오늘 내가 계획했던 일의 마지막은 해가 져야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소울 아카데미의 밤에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내러 가야 하니까.
“아가씨. 이제 아카데미가 폐문할 시간입니다만.”
내가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계획을 이야기하자 칼이 나를 만류했다.
‘알아요.’
“허접.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나가시겠단 겁니까?”
소울 아카데미는 8시 이후로 문이 닫힌다.
그 이후로는 일부 교수를 제외한 인원들은 결코 바깥으로 나갈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허나 이를 빠져나가 밤의 소울 아카데미를 돌아다닐 수 있는 기믹이 존재한다.
본래라면 소울 아카데미 2학년 후반 즈음에서야 발견할 수 있는 통로지만 위치만 외우고 있으면 아카데미 1학년부터 써먹을 수 있거든.
‘칼. 따라와요.’
“허접. 따라와.”
나는 칼을 이끌고서 소울 아카데미의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 길과 길을 막고 있는 식물로 된 벽을 향해 걸어갔다.
원래라면 중간에 가지라던가 벽 같은 게 있어서 막혀야 하지만 이 길만큼은 다르다.
애초부터 그렇게 설계된 벽이기에 식물이 묻어나는 걸 뺀다면 막힐 이유가 없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앞으로 쭉 걸어나오자 소울 아카데미 건물을 감싸는 거대한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 여긴 막다른 길이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허접. 자꾸 건방지게 대꾸할래?”
“죄송합니다.”
여기는 평범한 벽처럼 보이지만 기믹이 하나 숨겨져 있거든.
손바닥으로 아카데미의 벽돌을 훑던 나는 다른 곳과는 달리 허술한 벽돌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를 꾹 눌렀다.
그러자 벽에서 끼기긱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방법이 있다고 했죠?’
“건방진 허접. 지금도 내 말을 의심할 거야?”
“아뇨. 아닙니다. 이 또한 아르마디의 계시인가요?”
‘그…렇죠.’
“맘대로 생각해.”
내가 게임의 지식으로 신기한 일을 펼칠 때마다 변태 허접 주신의 명성이 높아지는 게 너무 싫다.
핑계대기엔 적당하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무능 주신에게 과분한 공이잖아.
차라리 나한테 도움을 주는 신이었다면 기꺼이 공을 돌렸을 텐데.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통로를 향해 발을 디뎠다.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와서 벽의 어딘가를 건드리자 다시금 통로가 자취를 감추었다.
“신기하군요. 아카데미에 이런 게 있었다니.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겠지.
이건 아카데미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잊혀진 기믹이니까.
설명하기 시작하면 귀찮아져서 말을 하진 않겠지만.
“그래서 아가씨.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알새틴의 주점이요.’
“알새틴의 주점.”
“제가 아는 알새틴의 주점은 뒷골목의 도박사들이 모이는 곳입니다만.”
‘맞아요.’
“네가 생각하는 거기가 맞아.”
“아가씨! 도박은 안 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이 기겁을 했다.
도박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을 여럿 보았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칼 때문에 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칼. 저 도박하러 가는 거 아닌데요.’
“야. 허접. 내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사람처럼 보여?”
내가 미쳤다고 거기서 도박을 하겠어?
사기꾼들밖에 없는 거기서 도박을 했다간 호구가 돼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릴 걸.
소울 아카데미 고인물인 내가 그런 멍청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럼 도대체 왜?”
‘주인을 만나러 가요.’
“거길 운영하는 허접을 만나야 하거든.”
암거래상 알새틴.
호감도 작을 위해서 그 놈한테서 구해야 하는 물건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