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1
요정의 숲을 구원한 대가로 포용의 권능을 얻은 나는 계속해서 포용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진지하고 선한 인간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포용의 권능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 뿐.
어쩔 수 없잖아!
변태사도는 이제부터 알아서 찾아가는 방법밖에 없다며 입을 다물어 버렸고!
할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고!
첨언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영역이라며 무언으로 답하고!
심지어 오랜만에 찾은 튜토리얼 기능에는 튜토리얼 불가 스킬이란 식으로 적혀 있고!
이렇게 조언을 해줄 녀석들이 다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해주는데 어쩌라고! 주먹구구식으로라도 뭔가 알아내야 할 것 아냐!
답답한 마음에 사전까지 뒤적이던 날 맞이해 준 포용의 정의는 이러했다.
다른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겠다. 자신과 정반대되는 의견이라도 존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겠다.
사전의 정의를 몇 번이고 읽던 난 문득 이 세상에 발을 들이기 전에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그 영상 속의 성직자는 난동을 피우며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과 신도마저도 모욕하던 이를 질책하기는커녕 끌어안았다.
이 사람도 상처 입은 불쌍한 어린 양일 뿐이라며 그를 두둔했다.
참 성직자라는 설명과 함께 널리퍼진 영상의 아래에는 성직자를 칭찬하는 글보다는 비꼬는 글들이 더 많았다.
조작이라느니. 호구라느니. 나중에 호되게 당할 거라느니.
그 영상을 감명깊게 보았던 내 입장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당사자인 성직자는 여러 비아냥에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 받아들였다면 그것도 옳다면서.
예전의 기억 속에서 포용이란 게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나였지만 기쁨보다 먼저 막막함이 찾아왔다.
그 선함은 나 같은 게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괜히 포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게 아니라고.
마냥 상대를 포용하라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장난기 심한 요정정도는 마음에 품어줄 수 있어도 악신의 역겨운 취향마저 끌어안아 줄 순 없잖아.
그것마저도 안아주겠다는 건 선함이 아니라 멍청함이란 생각밖에 안 들어!
이 성에 도착하고 여기에 올라오는 동안에도 포용이란 것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난 지금에 와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라고 말해야 멋지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지금도 정확하게 포용이 뭔지 모르겠다.
무기를 휘두르고 상대와 싸우고 던전을 공략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명확한 답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난 제멋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열 받는다고!
계에에에속 생각하고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문제냐!
내가 무슨 철학가인 줄 알아?!
철학가 메스가키라니! 무슨 대사를 쳐야 하는 거야!?
네가 허접임을 알라?
너는 허접이다. 고로 허접이다?
됐어! 때려쳐! 오늘 방패술을 바꾸면서 느꼈어! 난 나답게 할 때가 제일 괜찮아!
나답다는 게 메스가키스럽다는 건 열받지만 어쨌건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할 거야!
불만 있으면 나한테 권능을 넘긴 허접 주신한테 따져!
휙하고 검의 손잡이를 쥔 순간 그 검에 담긴 염이 전해진다.
신화 시대를 살았던 기사가 품었던 긍지가. 가벼운 겉모습으로 감추어 두었던 강인한 의지가. 그 어떤 강대한 적 앞에서도 무너진 적 없는 자부가. 손을 타고서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다.
이 검에 담긴 염은 분명한 진실일 것이다. 이만한 마음을 품었던 기사이기에 신화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지만 기사가 지녔던 마음이 이것 뿐일까?
길게 숨을 내뱉고 검이 지닌 역사를 마주한다.
간슈의 시련을 뛰어넘으면서 내가 얻은 힘 중 하나.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역사에 집착하는 역덕의 보고에 존재하지 않는 기록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난 볼 수 있다.
기사 가라드가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하던 나약함을.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때 느꼈던 죄악감을. 지키지 못한 자들의 시체를 넘어설 때 느꼈던 슬픔을. 강대한 적을 마주했을 때 차오르던 공포를.
하나씩. 하나씩. 가라드가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검에 담긴 역사에 발을 디딘다.
도저히 선하다고는 할 수 없는 행위란 건 이해하고 있지만 뭐 어떤가.
난 제멋대로 하기로 결정했거든.
놀림거리가 될 것 같은 일기장이 눈앞에 있는데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메스가키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당연히 열어보고 그 사람의 흑역사를 하나하나 파해친 다음에 비웃을 준비를 해야지!
이게 내 포용이야!
내가 받아들이고자 하는 건 다른 이들이 어찌 생각하든 받아들일 거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 짓밟아버릴 거라고!
그러기로 정했어!
내가! 포용의 권능을 지닌 내가! 주신의 사도이자 할아버지의 제자인 내가!
그러니까 오래 전에 죽은 당신은 나한테 모든 걸 내놓으면 돼!
당신이 남긴 의지도!
당신이 남긴 슬픔도!
당신이 남긴 미련도!
모두 다!
여러 핑계를 대면서 후대에게 할 일을 남겨버린 개허접기사를 대신해서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내 놔!
내 의지를 따르듯 검에 새겨져 있던 붉은 빛이 손잡이를 타고 올라 내 손 안으로 스며든다.
그 끝에 드러난 검은 방패와 같은 순백의 빛을 띄고 있었다.
으음. 역시 붉은 색의 불길한 검보다는 이 쪽이 가라드의 검에 어울리지.
내가 만들어낸 하양에 만족하며 고갤 주억이고 있으려니 내 귓가에 불길한 소리가 닿았다.
무엇인가가 갈라지는 소리. 후두둑하며 잔해가 떨어지는 소리.
…
성이 무너진다!? 왜?!
<성을 지탱하고 있던 걸 네가 빼앗아버렸잖으냐. 무너지는 게 당연하지.>
‘그런 거 알면 미리 말해달라고요!’
<미안하구나. 나도 이래저래 정신이 없다.>
‘네!? 그게 갑자기 뭔.’
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지. 일단은 탈출을 해야…!
흐갹!? 앞으로 내딛으려는 걸음이 비틀리며 바닥이 내게로 다가왔다.
현기증인가.
당연하긴 해.
불안정한 몸상태를 억누르며 거친 연전. 거기에 더해 권능의 사용까지.
안 그래도 지쳐있던 몸이다. 한계치는 본래에 비해 한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마가 바닥에 닿기 직전 거칠면서도 조심스러운 손이 나를 끌어안았다.
“이거 참! 아무 말 없이 오길 잘했군! 가라드의 성을 무너트렸단 이야기를 전하면 무슨 소리를 들었을는지!”
“그런 말을 할 틈이 있으면 달려라! 연기를 풀어 건물이 무너지는 속도를 좀 늦출 테니까!”
“고맙습니다! 리나님!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도망치도록 하죠!”
바람을 꿰뚫을 정도로 빠르면서도 흔들림 하나 없는 편안함에 안도해버린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루시의 정신세계. 그녀는 훈련장이라고 부르는 장소. 루시가 현실을 살아갈 때면 오롯이 루엘 혼자 머무는 그 곳에 오늘은 불청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늙으니까 진짜 괴팍한 할배같네.”
루엘이라는 성기사는 신화의 시대 때부터 존중받아 온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라면 그 누구도 루엘에게 불경을 내뱉지 못한다.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절대 윗사람으로 모시고 싶지 않은 얼굴이야.”
“그러는 네 놈의 꼴도 추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꼴을 하고 여자에게 말을 걸면 기겁하면서 도망치겠군.”
“하! 루엘! 네가 평생 여자 하나 제대로 못 만나 본 거다!”
“예전부터 계속 한 말이지만 난 성직자의 법도를 지킨 거다! 연애건 결혼이건 하고 싶었으면 얼마든 했어!”
“그럼 뭐해. 결국 못하고 끝났잖아. 흐물흐물한 총각아.”
“여자한테 차인 끝에 홀로 뒈진 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저잣거리의 아저씨들이 할법한 소리를 지껄이며 싸우던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소리를 터트린다.
평소 신께 맹세를 바친 기사답고자 노력하는 루엘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가벼움. 그가 그의 친우 앞에서만 드러내는 어투.
“그래서 가라드. 네 놈은 여기에 어쩌다 오게 된 거냐.”
그걸 허락받은 예외인 기사 가라드는 색이 다 빠져 허옇게 물든 머리카락을 사람보다는 괴물의 것처럼 보이는 손을 가지고 정리하며 대답했다.
“내 발로 온 게 아니다. 끌려온거다.”
“끌려왔다고?”
“그래. 저기서 자그마한 숨소리를 내는 여자아이가 내 목덜미를 붙잡고 강제로 여기에 앉혀놨다.”
여자아이가 한 행동은 분명한 폭거였다.
가라드라는 기사가 후대에 남긴 뜻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고.
당신이 지상에 남겨두었던 모든 미련을 내놓으라고.
자신이라면 그 모든 걸 받아줄 수 있다고.
여자아이는 그리 소리치며 가라드가 남기고 싶었던 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도 모두 가져가 자신의 안에 담아버렸다.
“대체 저 꼬맹이는 뭐냐?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다만 난 영웅이라고. 이 마음에 새겨진 것들은 저런 자그마한 몸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다.”
“그렇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네가 지닌 뜻은 가벼울 수 없어. 허나 말이다. 너도 잘 알지 않으냐. 겉모습의 크기와 마음의 크기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다시 물으마. 저 아이는 무어냐.”
“위대하신 주신께서 처음으로 택한 사도이며 수많은 악을 마주해 온 전사이며 우리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만 영웅이며 내 제자고 친구를 한없이 아끼는 꼬맹이고.”
평상시 루시를 어찌 평가하는 가에 대해 시원스레 늘어놓던 루엘은 일순 말을 아꼈다가 이내 생전에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가라드를 바라봤다.
“그대가 인정한 기사지.”
“…내가?”
“그래. 네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나는 저 아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너는 그렇지.”
“이봐. 루엘. 농담은 적당히.”
“허나 에르기누스가 네 기억을 받아가 만든 해골은 이 아이를 인정했다. 그렇기에 저 아이가 네 방패를 지닐 수 있었던 거다.”
에르기누스. 무얼 하러 내 방패를 가져가나 했더니 그런 의도였나.
하. 빌어먹을.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지만 생각하는 게 서로 다 똑같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서야 후대에 나 혼자 특별해질 수 없잖아. 이 망할 마법사!
“저 자그마한 아이가 지금 대의 영웅인거냐?”
“아마 마지막 영웅이겠지.”
“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의 방패와 나의 기술을 함께 지닌 아이라.
“미련을 끌어안아 준 아이다. 줄 수 있는 건 주는 게 도리에 맞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겸사겸사 네 놈의 외로움도 달래주고.”
“…미안하네만. 가라드. 나는 그런 취향이 아닐세.”
“뭔. 나도 그런 취향은 아냐! 네 놈도 잘 알잖아! 내가…!”
“크하하하핳! 아! 드디어 네 놈을 놀려먹을 수 있게 됐군!”
박수까지 쳐가면서 경쾌하게 웃는 루엘의 모습에 가라드는 해야 할 말조차 잊고 눈을 끔뻑이다 이내 웃음을 흘렸다.
그 딱딱하던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준 아이인가.
좋군. 마음에 들어.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빨리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