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6
공작가문의 영애라는 지위는 평범한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대한 권력이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지어니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타인의 위에 군림하게 된 아이는 반드시 그 책임을 감당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없는 자는 책임을 외면한 채 권력만을 휘두르려 할 것이다. 철없는 자는 자신에게 권력과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 채 날 뛸 것이다.
이외의 다른 이들 중에서도 고지식하게 모든 책임을 다하려는 이는 흔치 않겠지.
조이는 이런 흔치 않은 아이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 혼자 공작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통감하고 지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고지식한 인간이 그녀였다.
어떻게 하면 친구들과 더 재밌게 놀 수 있을지를 고민해도 모자랄 나이에 어른이 될 방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 조이다.
그녀의 어깨에 과중한 부담이 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하루하루 눈을 뜨는 것조차 고되단 생각마저 하게 되었을 무렵 조이를 안쓰럽게 보던 제프가 조언을 건넸다.
노력하기만 해서는 언젠가 부서지고 말 거라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에 쌓인 걸 풀 방법을 찾아내야한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시간도 부족한데 취미 같은 걸 만들 시간이 있느냔 생각을 했던 조이지만 그래도 자상한 오라버니가 한 조언이었기에 나름 고심을 했고, 어느 영애에게서 연애소설의 존재를 들은 후에는 그 조언이 옳았단 걸 깨달게 됐다.
그 후로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면 방에 틀어박혀 연애소설에 몰두하기를 몇 년, 조이는 제대로 된 연애나 사랑 한 번 해본 적 없으면서 자신이 연애에 정통하다고 믿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아시겠어요?! 어릴 적의 추억만큼 강력한 마법은 없다고요! 이대로라면 루시를 빼앗겨 버릴 거에요!”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아서는 열정적으로 위기에 대해 논하는 조이를 삐뚜름한 눈으로 바라봤다.
“네 망상에 대해선 잘 들었다만 이곳은 현실이다.”
“지금 제가 헛소리를 한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어릴 적 두 사람이 만났다는 건 진실이라 생각한다. 진실이라 생각하기에 말이 안 된다고 여기는 거다. 그 시절의 루시 알른이 타인과 친해지는 게 가능하더냐?”
아서는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내용이지만 루시 알른이라는 인간은 그야말로 망나니 중의 망나니였다.
어지간한 정신머리로 일국의 왕을 정면에서 모욕할 리가 없잖은가.
그런 건방진 꼬맹이가 타인과, 그것도 상당히 까탈스러운 형님과 친분을 맺는다?
허. 그것 참 말이 되는 군.
“그게 중요한 포인트에요!”
“뭐?”
“누구나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일수록 새로운 매력에 쉽게 넘어가는 거라고요!”
그 누구도 편히 대할 수 없는 폭군이 기가 강한 여자에게 분노하다 어느새 사랑에 빠지는 건 연애소설의 기본이다. 조이는 그러한 내용을 수십 수백 번을 읽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이야기잖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흥미가 있지 않으면 그 시절의 루시에게 몇 번이나 접근할 리가 없어요! 저도 되도록 피해 다닐 지경이었다고요!”
“…그건 설득력이 있군.”
공작영애로써 다른 영애들을 규합해온 조이는 어지간히 성격 더러운 이들도 어느정도 조련할 수 있는 사람이다.
헌데 그런 그녀조차 질색하며 포기한 상대에게 굳이 몇 번이나 찾아갔다? 이건 쉬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설마 형님께선 그런 취향인 건가?”
“왕자님도 아시잖아요. 겉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취향을 재단할 수 없단 걸.”
예시라면 이들의 주변에 차고 넘쳤다. 루시만 곁에 없으면 정상인이 되는 이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리고 저희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루시도 어느 정도 호의를 품고 있을 게 분명해요.”
“자신이 모두의 비난을 감당해야 하던 때에 유일하게 다가와 준 사람인가. 흠. 그런 연이 있는 것치고는 루시 알른이 형님을 상당히 껄끄러워 했던 것 같은데.”
“전 그것도 의심스러워요. 루시가 타인을 껄끄러워하는 경우가 어디 흔한가요?”
루시 알른이 1왕자와 시간을 보내기로 한 당일. 마지막으로 조이를 설득하려 했던 아서는 어느새 자신이 설득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다고 치자. 근데 그러면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 권리가 있나?”
“있죠! 전 루시의 친구라고요! 친구가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한다면 최선을 다해 막아야해요!”“형님이 잘못된 선택이란 거냐?”
“네! 물론이죠!”
“방금 그 말. 불경죄가 될 수도 있다만.”
“저희 불경죄 같은 걸 신경쓰기엔 너무 늦었어요.”
“부정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슬프군.”
“아앗! 왔다!”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1왕자는 무도회에 나가는 것처럼 말끔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잘생기긴 하셨네.
저 모습 그대로 사교계에 나서면 영애 몇 명 정도는 실신하지 않을까.
“조이. 정말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당연하죠. 아무리 1왕자님이 천재라도 어둠의 권능을 파훼할 순 없어요.”
두 사람이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한 누구도 그들을 알아차릴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신격이 지닌 힘이니까.
에르기누스님께 직접 전수받은 기술이 어디 그리 쉽게 파훼 당할 것 같냐며 의기양양해하던 조이는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루시를 보고 숨을 죽였다.
지금의 루시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하얗다는 것이리라.
장식 하나 존재하지 않는 순백의 드레스. 그 드레스에 바래지 않을만큼 하얌에도 분명한 생기를 품고 있는 피부. 그 위에서 나풀거리는 붉은 색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든 장신구.
루비 같은 눈으로 대지를 바라보는 천사는 너무도 간단히 사람들의 시선을 장악했다.
“…저 녀석. 너무 진심으로 나온 것 아니더냐.”
코를 틀어막은 채 중얼거리는 아서의 말에 조이가 고갤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과거 저와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압도적인 외견으로 모두의 정신을 빼앗아서 연설을 넘겨버리겠다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 그걸 실현할 뻔했던 그날 루시 알른은 저런 모습을 하고 나왔다.
“1왕비님께서 홀린 것 같았노라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 분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엄마부터 찾으시나요? 음침왕자님의 본성은 찌질한 마마보이인 게 분명하네요.”
“하하. 그럴지도요.”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걸 보던 조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3왕자님. 만약 루시가 진짜 호의가 있는 거면 어떡하죠?”
조이가 루시에겐 이 만남이 그 때의 일만큼이나 중요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더듬거리며 말하자 아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기냐?”
“그치만요.”
“이미 돌아가긴 늦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따라가 보자꾸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방문한 장소는 왕도에서 제일 큰 보석점이었다. 왕도를 찾은 귀부인들이 반드시 들리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루시는 여러 값비싼 보석들을 쓸어 담았다.
“저 녀석. 보석에는 관심 없는 것 아니었나?”
“그럴걸요? 보석을 사려면 얼마든 살 수 있는 상황인데 언급도 안 하시니까요.”
그리고서 루시는 당연하다는 듯 르네에게 결제를 떠넘겼다. 그 액수가 액수인지라 르네의 표정이 일순 굳었지만 그는 금방 얼굴을 다 잡고 보석상에 돈을 내밀었다.
“직원들 전원이 나와서 배웅하는 건 처음 봐요.”
“저만한 돈을 결제했으면 상대가 평민이라도 저래야지.”
그 다음에 들린 장소는 아티팩트를 파는 곳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고객임에도 불구하고 유력 왕위계승자의 얼굴을 들이밀어 안 쪽으로 들어간 루시는 그 곳에서 가장 비싼 물건들만 골랐다.
“저. 저건 마법진을 열 개나 기록할 수 있는 팔찌잖아요! 가지고 싶어도 너무 비싸서 손을 못 댔는데!”
“수호의 부적은 아예 쓸어담는군. 저걸 다 합하면 대체 얼마냐.”
당연하게도 결제를 하는 사람은 르네였다. 그는 무어라 할 말이 많은 듯 했지만 억지로 웃으며 돈을 내밀었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의 행보는 똑같았다. 루시가 사치를 부리고 르네가 그걸 감당한다. 그 때마다 장소가 바뀔지언정 이 명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쯤되니 연애소설에 절여진 조이조차도 이 상황에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딴 게 데이트?”
이건 절대 데이트가 아니었다. 여자가 호구 하나를 붙잡고 뜯어먹는 걸 어떻게 데이트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조이. 네 기억에 무언가 착각이 있었던 것 아니냐? 루시 알른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원한으로 가득 찬 자의 것인데?”
“어. 어라? 아니 그치만 두 사람은.”
“망상에서 빠져나와서 현실을 봐라. 너 같으면 호감 있는 자에게 저딴 행동을 할 성 싶으냐?”
조이는 아서의 물음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상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으면 저런 뻔뻔스러운 행동은 불가능해.
루시한테 1왕자님은 어찌 되든 좋은 인간이었던 거야.
“거봐라. 내가 망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아아. 다행이긴 한데요.”
“또 뭐냐.”
“너무 순정이 없지 않아요!? 저는 좀 더 두근거리는 걸 생각했다고요! 근질거리고 답답하고 또 히죽거리는 웃음이 나오는 그런 걸 볼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내 알바냐. 귀찮은 녀석아.”
“귀찮다뇨! 제가 뭐 어때서요!”
투덜거리는 조이의 머리를 꾹 눌러서 입을 다물게 만든 아서는 왕도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따라가보긴 해야겠지?
*
‘후흐흫. 1왕자님과 협력하길 잘했어요. 오늘 본 이득한 해도 얼마인가요!’
나를 포함해서 친구들의 능력치를 올려 줄 탄생석! 거기에 더해 훗날 생길 위기를 대비한 마도구! 이외에도 남의 돈으로 유용한 물건들을 잔뜩 사들인 나는 오늘 하루에 만족했다.
<루엘. 주신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해도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거냐?>
<…나한테 묻지 마라.>
<너한테 안 물어보면 누구한테 물어보냐.>
<주신께 여쭤봐라! 나도 모른다!>
어딘가 질린 듯한 어투로 투닥대는 두 사람의 말을 가뿐하게 무시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메뉴판을 살폈다.
오늘 하루 종일 많이 움직였으니까 좀 과식을 해볼까. 지금의 나라면 메뉴 시작부터 끝까지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응! 결정! 어차피 결제는 르네가 할 테니 잔뜩 사치를 부리자!
“…다 시키겠다고?”
“왜요? 부담스러우신가요?”
“당연히 부담스럽지! 내가 오늘 쓴 지출을 생각해봐라!”
“저 같은 여자애가 당신처럼 찌질하고 음침한데다 냄새나는 인간하고 어울려 준 거라고요. 그 정도 각오쯤은 하고 오셨어야죠.”
“하아아. 정말 더럽게 뻔뻔하군.”
양심의 가책이 들지 않냐고? 전혀! 평범한 상대라면 모를까 나같은 여자애한테 작업을 걸려하는 페도 변태새끼잖아! 이 정도는 해줘야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부분은 한결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