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7
앞으로 나올 음식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던 나는 방금 전 르네가 한 대사를 되새기고서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바. 방금 전 대사 뭐야? 많이 변한 줄 알았지만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소꿉친구물에서 나올 법한 말을 방심한 사이에 훅하고 찔러넣다니!
르네. 너 왕자보다 호스트 쪽에 재능이 있는 거 아냐?
이 세상이 남녀역전 세계관이었다면 경국지색으로 불렸을 것 같은데!?
이게 바로 마성의 남자라는 건가?!
크으윽. 이걸 모니터 너머에서 봤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저 대사를 듣는 당사자가 되니까 감탄과 동시에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있어!
…멋진 음식이고 나발이고 그냥 도망칠까. 본능 단계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오는 느낌인데.
으으음. 아냐. 조금만 참자. 어떻게 보면 저 대사야말로 내가 바라던 내용이잖아.
상사의 비위를 맞춰준다고 생각하는 거야. 마흔살 먹은 과장님이 저런 대사를 한다고 상상하면 충분히 버틸 수.
“우엑.”
그걸 상상하니 더 역겨워졌어. 속이 울렁거려서 기분 나빠.
“그렇게 대놓고 헛구역질을 하면 나도 상처를 입는다만.”
“…신경 쓰지 마세요. 상처 입으라고 한 거니까.”
“예나 지금이나 참 까탈스럽군.”
이전에 파트란 축제에서 만났을 때의 대사나 지금 하는 말을 종합해보면 과거의 루시가 르네와 꽤 가까운 관계였다는 건 분명해.
베네딕의 위광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깽판을 치던 루시랑 이 속 검은 남자가 어떻게 친해진 건지는 이해가 안 되지만.
르네 설정에 성취향 같은 게 있었나?
게임 속 내용에서 자세히 풀린 건 없었어. 다만 불살 루트에서 자기를 후려패서 정신 차리게 만든 주인공한테 호의를 보이긴 했지.
또 마조인 건 아니겠지? 내 주변에 제발 밟아달라고 비는 쓰레기들이 이미 한 가득인데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아직도 그 때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그 때의 일? 무슨 일이 있었는데? 루시의 매도를 견디다 못해 주먹질을 하기라도 했어?
“사과할 생각은 없다. 난 그 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야 그렇겠지. 온갖 어휘로 상대를 짓밟는 꼬맹이를 때리는 건 정당한 보복이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와서 내가 사과하는 게 말이 안 되잖나. 서로의 처지가 정반대가 되었는데 말이다.”
…응? 처지가 정반대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 것 같긴 한데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이해가 안 되네.
“뭐냐. 그 표정은. 설마 잊어버린 거냐?”
잊어버리진 않았어. 아예 모를 뿐이지.
“하!”
의자를 박차면서 일어난 르네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날 노려보다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계산은 해두마. 편하게 미식을 즐겨라.”
휙하고 르네가 나가버린 후. 영문도 모른 채 방에 홀로 남겨진 나는 멍하니 방금 전의 광경을 생각했다.
진심으로 상처를 받아서 울 것 같은 르네의 눈을. 대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얼굴을 하는 건지.
이 의문을 풀려면 루시의 기억을 봐야만 하겠지만 몸이 만전으로 돌아가려면 좀 시간이 걸리니까.
그 때까지 답답한 채로 있고 싶진 않단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방의 구석 쪽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조이랑 나랑 키 차이를 생각해보면 대충 여기쯤이려나.
“꺄악!”
볼이 있을 것으로 추정 되는 장소를 꾹 눌렀더니 여성스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어둠이 걷혔다.
술자의 평정이 무너짐에 따라 마법이 사라진 것이다.
“루. 루시?”
“안녕. 얼빵아. 탐정흉내는 재밌었어?”
“어. 어떻게.”
“글쎄에. 네가 얼빵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미적감각이 너희들이 있는 곳이 이상하다고 자꾸 지적한데다가, 약점파악이 제발 눈치채지 말아달라는 심정까지 보여줘버렸거든. 처음부터 너희가 뒤따라오는 건 알고 있었어.
“조이. 절대 눈치 못 챌 것이라 말하지 않았느냐?”
“실제로 1왕자님께선 눈치 못 채셨잖아요!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루시가 너무 대단한 게 나쁜 거라고요!”
“정말 눈치 못 챈 게 맞느냐? 알고도 모른 체 해주신 것 아니더냐?”
“1왕자님이 알고 계셨다면 은근히 티를 내셨겠죠! 그 분은 그런 사람이라고요!”
“저기 바보 두 사람. 일단 앉아. 어느 호구가 다 계산을 해주고 가서 음식이 잔뜩 올 예정이거든.”
*
루시의 옆에 앉게 된 조이는 자신의 벌개진 뺨을 도저히 원래대로 되돌릴 수가 없었다.
친구의 뒤를 몰래 따라온 것만 해도 충분히 부끄러운 일인데 그걸 처음부터 들키고 있었다니!
흐으윽. 죽고 싶다. 루시는 대체 날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얼빵아.”
“네혯!”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 조이는 혀를 씹고는 자괴감에 몸부림을 쳤다.
지금 당장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다. 어디라도 좋으니까 여기서만 탈출하고 싶어.
조금이라도 진정이 된 후에 루시를 만날 수 있다면 좀 침착하게 변명을 할 수 있을텐데 지금은 무리야!
“뺙!?”
이마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에 정신을 차린 조이는 비웃음을 흘리는 루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숨을 삼켰다.
진정. 진정하자.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실례야. 이미 잔뜩 잘못을 저질렀는데 여기에서 더 잘못을 저지를 순 없어!
공작영애 모드로 전환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하고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도 설명해야 해!
“죄송합니다. 루시. 오늘 당신께서 1왕자님과 만난단 말을 듣고 너무도 걱정이 되어서 따라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표정. 어투. 몸짓. 완벽해! 이상적인 공작영애의 모습이야! 의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 최악의 상황도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괜찮아. 얼빵이가 바보짓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오히려 얼빵이가 얼빵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보고 있으면 정말 멍청해보여서 재밌거든.”
“그. 그렇습니까.”
“그것보다 얼빵아. 이게 뭐게에?”
루시가 책상 앞에 늘어놓은 여러 도구들은 그녀가 1왕자와 함께 다니며 쓸어 담은 물건 중 일부였다.
조이가 태어났던 달을 상징하는 탄생석. 조이가 꼭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여러 아티팩트. 거기에 더해 그녀에게 유용할 것이 분명한 여러 물건들까지.
“설마 여러 상점들을 돌아다녔던 이유가.”
“내 말을 절대 거절할 수 없는 호구가 하나 있었으니까. 유용하게 써먹었지.”
1왕자님을 호구라고 부르다니. 루시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헛웃음을 흘렸던 조이는 의기양양한 루시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버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저. 그게.”
“흐으응.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한테 손을 대다니. 얼빵이는 조숙한 아이였구나?”
“왜 여기서 조숙하단 말이 나오는 건가요!?”
“뭐. 됐어. 난 착하니까 이번엔 용서해줄게. 대신 다음부터는 좀 비싼 대가가 필요할 거야.”
“네. 네에.”
당장은 괜찮은건가? 망설이면서도 루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조이는 탄성을 내뱉었다.
루시 머리카락 진짜 부드럽다. 어떻게 관리하면 머리카락이 비단보다 더 결이 좋아지는 거람? 나중에 시녀를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냐.”
루시의 마성에 홀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데 집중하던 조이는 아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손을 뗐다.
“루시 알른. 선물은 고맙다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과거 너와 형님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서!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어떡해요!
방금 전 그 분위기 봤잖아요! 민감한 문제라니까요!? 좀 더 돌려돌려서 물어봐야죠!
하여간 이래서 여심을 모르는 남정네는!
“몰라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거봐요! 대답하기 싫어하잖아요!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문제인가?”
“무능 왕자님께서 어떤 망상을 하면서 히죽거리고 싶은 건진 모르겠는데 진짜 몰라요. 저딴 음침이랑 있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해요?”
“진짜 모른다고?”
“네에. 그래서 저 음침왕자님이 자기 혼자 난리인지 모르겠다니까요? 호구 잡힌 게 그렇게 분했나? 속 좁은 인간 같으니.”
어. 진짜 모르는 거였어!?
왜?! 방금 전에 1왕자님이 보여준 격한 감정은 분명 둘 사이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단 걸 증빙하고 있잖아! 근데 왜 당사자인 루시가 모르는 건데!
“루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뭐야.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얼빵이 주제에 건방지네.”
“으갸아. 아. 아하여!”
조이는 루시에게 뺨을 꼬집히면서도 방금 전 1왕자가 보였던 격정을 떠올렸다.
내 소중한 친구인 루시를 다른 누구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은 건 여전해!
그렇지만 말야! 이래서야 1왕자님이 너무 불쌍해지잖아!
“쟈. 쟈까마여!”
“그 전에 할 말이 있지 않아?”
“제성해여. 느시.”
“푸후흡. 좋아. 사과 받아줄게. 자존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작영애님.”
물리적으로 벌개진 뺨을 매만진 조이는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금 루시를 마주했다.
“어쨌건 예전에 루시와 1왕자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해요! 루시가 제멋대로 잊어버렸을 뿐!”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고?”
“무서우니까 손 내밀지 마세요! 아무튼! 잊어버린 거라면 다시 생각해내면 되잖아요! 제가 아는 내에서 1왕자님과 루시가 만났던 때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떠올려 주세요!”
루시가 1왕자님과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는 편이 나에게 이득이라는 건 알아!
그치만 이런 결말은 1왕자님에게도 루시에게도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최악이라고!
“푸하하핳!”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열변을 토하던 조이는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린 루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 뭐지? 왜 웃으시는 거지?
“아. 얼빵이가 얼빵이라서 참 좋네.”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알고 싶어? 마음에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는데?”
“…네. 네에.”
“근데 이걸 어쩌나. 내가 대답해주기 싫은데.”
멍해진 조이의 얼굴을 보고 또 다시 한참 웃던 루시는 턱을 괸 채로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맘대로 지껄여봐. 식사를 하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