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보던 대로의 무심한 표정의 사신이였다. 어딘가 시큰둥해 보이는 표정이었는데, 평소에 보던 그 표정이라 이런 상황에선 더욱 안심이 되었다.
계단을 내려와서는 정면에 위치한 돼지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불타는 거대한 강철 돼지상은 시선을 빨아들이는 박력이 있긴 하지.
얼마간 돼지상을 보던 사신은 무언가를 찾는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눈앞에 서 있었다.
평소 연구소에서도 유령처럼 신출귀몰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거리와 장애물을 손쉽게 무시하는 걸 보니 연구소의 격리실은 그야말로 요식행위에 불과했구나…
“사신아 와 줬구나!”
코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신을 안아 올려 꼭하고 안아줬다. 반갑기도 했지만, 이젠 살았구나 하는 감상이 더 컸다.
물론 사신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죽음을 인도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는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능이 높고 연구소에 이곳의 위치를 알려서 구출을 유도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무서웠어, 사신아. 몇 시간 전에도 사람 하나가 죽어 버렸어. 바이올린을 한다고 한 여자였는데, 이런 곳까지 와서 죽어 버리다니…”
“지금도 비명이 들리지? 무슨 오브젝트인지는 몰라도 끔찍한 오브젝트야.”
사신은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신은 대화가 불가능한 오브젝트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오예린은 말을 알아듣는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글쎄?
“저 돼지상이 원인인 것 같아. 특히 저 맛있는 냄새만 봐도 해로운 오브젝트인 게 분명해. 나도 창살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면 돼지상으로 달려갈 것만 같아.”
지금도 다른 감옥들을 둘러보면 창살 너머로 손을 뻗고 있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사신의 남다른 존재감에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그저 돼지상을 향해 손을 뻗고만 있었다.
“사람들을 불러서 구조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저 돼지상의 냄새가 걸리네. 결국 저 돼지상이 무슨 현상을 일으키는 지는 전혀 알지 못하니 말이야.”
사신은 어느새 나에게서 눈을 떼고 벽너머의 지하실 출입구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뭐라도 있나?’
말하지 못하고 흥미 본위로 행동하는 사신은 고양이랑 비슷한 면이 많았다. 이렇게 다른 곳에 흥미를 던지는 사신은 훌쩍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빨리 사람을 불러달라고 해야겠지.
“사신아. 사람들을 불러와줘. 구조 요청. 세희 연구소 사람들 부를 수 있지?”
내 간절한 부름에도 사신이는 여전히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힉”
그르륵, 그르륵. 무거운 돌문이 끌리는 소리에 숨을 삼켰다. 노인이 와 버렸어! 아니 노인이 맞기는 한 건가?
일렁이는 조명에 기괴한 그림자가 비쳤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대벌레의 그림자에 가까운 것이 돌먼지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고 오고 있었다.
그리고 스윽 하고 드러나는 노인의 얼굴. 분명히 이 지하실을 드나들던 노인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제외하면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뱀처럼 길쭉한 목의 끝에 대롱대롱 달린 노인의 얼굴은 사람의 그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1미터는 넘어 보이는 목을 지나서 나타난 건 더욱 기다란 팔다리로 거미처럼 기어 다니는 괴물의 몸통이었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사신을 꼭 끌어안았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목을 채찍처럼 휘둘러 주위를 돌아보던 노인은 나를 보고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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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실이 있다고 생각하고 집을 뒤지니, 왜 이런 곳을 발견 못 했을까 싶은 수상한 곳이 한 곳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열린 것처럼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돌의 긁힌 자국. 척 보기에도 스위치로 자주 쓰인 흔적이 남은 촛대.
촛대에 대롱대롱 매달리자, 그르륵하는 돌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석상이 움직이며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가 드러났다.
석상이 비켜선 지하 통로는 마치 지옥문처럼 보였다. 어둑한 통로, 그리고 그 통로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어떤 여성의 비명 소리. 확실히 이곳이 세희가 잡혀간 곳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다만 저 비명이 세희의 것이 아니기만을 빌며 돌가루가 잔뜩 있는 계단을 밟으며 총총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실의 광경은 내 예상보다 안 좋았다.
거대한 강철 돼지 동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쭉 늘어선 감옥들. 돼지상 근처에는 검게 타들어 간 뼛 조각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가장 거슬리는 건 지하실을 가득 메운 냄새였다. 맛있는 음식의 냄새라고 느껴지지만 도대체 어떤 냄새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보통 맛있는 냄새라고 하면 새콤한 과일향이나 노릇하게 구워진 빵의 냄새등 구체적으로 어떤 맛있는 냄새인지 알 수 있기 마련인데, 이 냄새는 그런 구체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탄내에 가까운 냄새였는데, 맛있는 냄새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오브젝트랑 연관된 현상으로 보였다.
그 밖에도 오브젝트에 의한 현상이라는 증거는 있었다.
척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감옥 안에 잔뜩, 모두 눈이 풀린 채로 돼지상을 향해 무의미한 손짓을 반복할 뿐이었다.
다행히 세희는 감옥 중 한 곳에 갇혀 있었다. 척 보기에도 굉장히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세희를 보니 마음고생이 심해 보였다. 세희의 감옥으로 들어서니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려와 나를 꾹 하고 껴안았다.
세희는 나를 품에 넣고는 굉장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분석한 현 상태에 대한 분석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세희의 말을 들으며 세희의 구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다.
철창을 열고 세희를 밖으로 유도한다?
지금 여기서 철창을 열면 세희도 저 돼지상의 냄새에 홀릴 것이 뻔해 보였다. 그러니까 데리고 나가는 건 불가능. 지금도 말을 하는 도중에 돼지상을 힐끗힐끗 보는 것이 창살이 없을 때 저항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을 불러서 구조시킨다?
이 집 주인인 괴인을 과연 물리칠 수 있을지가 미지수다. 총이나 폭탄을 사용할 수 없는 서울 숲에서 냉병기로 괴인을 잡는다? 불가능할 것이다. 가능하다고 해도 다른 오브젝트를 끌고 와서 물리치는 방법정도가 최선인데 너무 오래 걸린다.
시간을 너무 끌었는지 괴인이 집 안으로 들어선 것이 느껴졌다.
집안 수색에 너무 시간을 들였던지, 아니면 밖에 깡패들로는 괴물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던지 말이다.
지하실의 방음 너머로 “쥐새끼가 들어왔다! 쥐새끼가!” 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내가 남긴 발자국을 보고 짜증을 내는 것을 보니 곧 지하실로 들이닥치겠지.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돌이 갈리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말을 하는 도중,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세희는 나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가벼운 발소리가 계단에서 울렸다. 괴인의 3m는 넘는 거구를 생각하면 엄청 가벼운 발걸음 소리였다.
지하실 전등에 괴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다란 목과 팔다리, 기괴할 정도로 말라붙은 미라같은 형상. 통로에서 불쑥 튀어나온 머리는 나타날걸 알고 기다리던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기괴했다.
세희는 나를 꽉 껴안아 죽일 생각인지 점점 강하게 껴안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괴인이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세희에게 머리를 불쑥 들이밀 때였다.
부들부들 떠는 팔 안에서 올려다 보니 세희는 그저 눈을 감고 ‘괜찮을 거야’라고 되뇌기만 할 뿐이었다.
“흐, 쥐새끼는 너로구나.”
괴인은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잔뜩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세희의 품 안에서 내려선 나를 보고 시간이 좀 흐르자 그 표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너는!”
괴인의 길쭉한 팔다리와 목은 자라가 머리를 숨기듯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너는 누구냐! 왜 너 같은 오브젝트가 이런 곳에 온 거냐!”
평범한 노인의 형상으로 변한 괴인은 당황을 숨기지도 못하고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 여자냐! 그 여자 때문에 온 것이냐? 그렇다면 빨리 데리고 나가라, 어서!”
나를 무서워하는 오브젝트랑 안 무서워하는 오브젝트가 있는데, 이 괴인은 전자로 보였다. 아무 짓도 안 해도 이유 없이 나를 무서워하는 타입의 오브젝트.
하지만 이 노인은 그저 무서워만 하기에는 지능이 너무 높아 보이는데 말이야. 노인은 이젠 바닥에 엎드려서 그저 나와 세희가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희 쪽으로 빙글 돌아서 세희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노인의 의외의 행동에 공포가 가셨는지 세희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사신아. 뭐한 거야? 왜 저러는 거야?”
세희의 호들갑 속에서 바닥에 엎드린 노인쪽에서 변화가 있었다. 내가 눈을 돌리기 무섭게 팔다리가 길어지고 있는 것이다.
못 보는 사이에 기습하려는 건가?
노인의 팔은 쭉쭉 늘어나서 내 발치까지 길어지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소리를 내지 않고 자라나게 하는 모습은 이상하게 혐오스러웠다.
이상하게 인간, 오브젝트를 가리지 않고 내가 인간처럼 눈으로 본다고 착각한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