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에반스의 던전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중소 규모의 던전처럼 보인다.
허나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르다.
그 곳에 숨겨져 있는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소울 아카데미 세계관의 옛 영웅 중 한 명인 루엘이 남겨둔 시련의 장소가 등장한다.
거기에 들어가 몇 가지 시험을 거치고 그 모든 걸 통과하고 나면 성능 좋은 패시브 스킬 하나와 종결급 아이템 중 하나인 루엘의 메이스를 얻을 수 있다.
루엘의 메이스가 지닌 효과는 여러 가지지만 그 중에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세 가지다.
경험치 획득량의 증가. 메이스 관련 스킬에 보정.
뭣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무기를 착용하는 데 레벨이나 능력치의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소울 아카데미의 무기들은 여느 게임처럼 레벨에 따라 착용할 수 있는 무기가 다르다.
저렙에 쓸 수 있는 무기는 대개 허접하고 고렙 때 쓸 수 있는 무기들은 좋지.
허나 루엘의 메이스는 이러한 제한에서 자유롭다.
유저의 레벨을 따라 성장하는 루엘의 메이스는 언제나 평균 이상의 성능을 자랑하는 훌륭한 무기다.
만렙을 기준으로 해도 루엘의 메이스보다 더 뛰어난 둔기는 몇 개 없지.
물론 메이스계 최종 무기가 따로 있긴 하지만 그건 입수 난이도가 너무 높은지라 스펙딸을 칠 게 아니라면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게임을 플레이하는데는 루엘의 메이스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말야.
메이스 캐릭터를 키우면 보통 게임이 끝날 때까지 루엘의 메이스만 사용하는 게 보통이지.
기사의 말을 듣고서부터 지금 내가 루엘의 시련을 돌파할 수 있는가만을 고민하던 난 이윽고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욕심이 생겼다.
어차피 언젠가는 에반스의 던전에 들릴 생각이었다.
루엘의 메이스는 메이스를 들기로 한 이상 반드시 입수해야 하는 아이템이었으니까.
그 순간이 조금 더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좋아. 기사단을 따라서 에반스의 던전에 들어가자.
*
기사단의 훈련을 따라가고 싶다는 허락을 구하기 위해 저녁 무렵이 되어 베네딕에게 찾아왔다.
“루시. 무슨 일이니?”
그는 나를 보고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지만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린 듯 과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직까지 짜증난다는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이 사람 생긴 건 트롤 같이 생겼으면서 왜 이렇게 마음이 여린 거야.
겉으로는 강한 사람이 실은 마음이 여리다는 클리셰인가.
그거 멀리서 볼 땐 나름 재밌었는데 현실이 되니까 영 거슬리네.
‘아침의 일을 사과드리러 왔어요.’
“바보 아버님. 아침엔 내가 좀 과하게 말했어.”
“용서해주는 거니?”
‘네.’
“이번 만이야.”
“루시!…”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서는 나를 껴안고 자기 수염을 부벼대는 베네딕의 모습이 짜증났지만 괜히 말 한 마디를 더했다간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그만 뒀다.
이 사람 상대하기 귀찮아.
아버지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자기 딸을 아끼나? 부모가 있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오랫동안 베네딕이 기분을 풀 수 있도록 참다 이러다가 밤을 새겠단 생각이 들어 그를 밀어냈다.
그러자 베네딕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미안하다. 너무 기뻐서.”
‘그건 괜찮은데요.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됐어. 바보 아버님.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니?”
‘기사단 훈련하는 데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기사단 훈련하는 거 나도 같이 갈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실거리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던 베네딕이 한 순간에 굳어버렸다.
그는 방금 전에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내게 되물었다.
“뭐라고?”
‘던전에 들어가고 싶어요.’
“나 던전 들어갈 거야.”
“안돼! 절대로 안돼!”
*
안되기는 무슨.
베네딕은 필사적으로 나를 만류했지만 평소에도 딸에게 약하던 그 인간이 내 고집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있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기 전 던전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명분에 반대할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던전에 들어가는 걸 허락 맡았으니 루엘의 시련을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겠네.
루엘의 시련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수호의 시련.
시련의 장소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에게서 한 가운데에 있는 석상을 지키는 시련이다.
시련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시련을 겪는 캐릭터의 레벨에 따라서 조정이 된다.
1레벨이 들어가면 고블린들이 나오지만 만렙을 찍고 들어가면 어디 A급 던전의 보스가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나오는 식이다.
지금의 나는 게임을 시작하지도 못한 0레벨. 시련에서 나오는 적들도 그야말로 허접하겠지.
두 번째 시련은 신성의 시련이다. 이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하는 퀴즈다.
미리 정해진 수백 가지의 문제 중에서 몇 가지가 제출되고 그걸 제한시간 안에 맞추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지.
이건 준비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신성의 시련에 나오는 모든 문제와 그 정답을 외우고 있으니까.
내가 루엘의 시련을 돌파한 횟수만 해도 수천번 가까이 될 텐데 여기서 실수를 할 리는 없다.
마지막은 인내의 시련이다.
게임에서 묘사되는 바로는 캐릭터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해 그 사람의 트라우마가 되는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했다.
모니터로 보이는 건 대개 그로테스크하거나 공포스러운 무언가였지.
이건 공략이랄 것도 없고 정신력이랑 정신계열 스킬로 버티는 게 유일한 답인데 지금 내겐 이를 위한 스킬이 준비되어 있다.
공포극복과 무너지지 않는 의지.
극한의 공포를 느끼더라도 평정을 찾아주는 공포 극복과 한 번 죽음을 막아주는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함께라면 세 번째 시련도 가뿐하게 넘어설 수 있다.
최소한 게임을 플레이 할 때는 그랬다.
그러니 내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건 오롯이 하나 첫 번째 시련을 돌파하기 위한 전투 훈련이다.
약해빠진 몬스터가 나올지라도 전투는 전투.
몸을 움직이는 법에 대해 배워본 적도 없는 내가 실전에서 멋지게 싸울 수 있을 리가.
아무런 대비 없이 전장의 한복판에 내던져지면 얼을 탈 게 분명하니 미리 훈련을 해둬야 한다.
한 손에 메이스. 다른 한 손에 방패를 든 나는 훈련용 목각인형 앞에 섰다.
게임의 시스템이 이 곳에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 확인한 바.
그렇다면 무기를 들고 달리기를 하면서 메이스를 다루는 숙련도도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현실에서 숙련도라는 개념이 어떻게 적용될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긴 할 거다.
내가 루시의 몸에 넣어두었던 스킬이 발동했던 것처럼.
그걸 확인하려면? 메이스를 휘둘러 봐야지.
퍽!
무작정 메이스를 휘둘러 목각인형을 때려 보았던 나는 왠지 모르게 이것보다 더 잘 휘두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는 방식도.
팔을 움직이는 것도.
어떻게 하면 메이스를 휘두를 때에 거기에 힘을 더할 수 있을 지도.
나는 머릿속의 확신을 따라 재차 메이스를 휘둘렀고.
투웅!
메이스가 박히며 비산하는 나무 파편을 본 순간 난 확신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분명했다.
이 세상에는 숙련도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그리고 게임에서 하던 것처럼 숙련도를 키우면 숙련도를 지닌 무기를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다.
하하. 이럼 일이 쉽게 풀리지.
숙련도 작업은 내가 게임에서 진짜 지겹도록 해봤던 거니까.
게임의 컨텐츠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밤낮을 지새워가며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더 빠르고 강하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게 도움이 될 줄이야.
겜창으로 살길 잘했어.
아니. 아니지.
애초에 내가 소울 아카데미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 개같은 메스가키가 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조금 더 현생을 살 걸.
컨텐츠 찾는다고 검증도 안 된 괴상한 모드 다운로드 받지 말 걸.
멍청했던 일주일 전의 나를 욕하고 있으려니 속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빌어먹을.
이 분풀이는 목각인형 네가 해줘야겠다.
내가 메스가키가 되고 나서 쌓아둔 모든 울분을 네 놈에게 풀어주마!
소울 아카데미 초반에 메이스 숙련도가 가장 잘 오르는 기술은 정해져 있다.
메이스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는 것.
머리 깨부수기라는 야만적인 이름이 붙은 이 기술은 심플 이즈 베스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훌륭한 기술이다.
동작 짧고, 초반 스킬 치곤 데미지도 좋고, 숙련도도 잘 오르는 이 스킬은 버릴 구석이 없지.
오늘은 머리 깨부수기로 이 목각인형의 뚝배기를 깨는 걸 목표로 하자.
*
훈련을 거듭함에 따라 메이스의 달인이 되어가던 나는 훈련을 시작하고 사흘 째가 되던 날에 기이함을 느꼈다.
메이스를 휘두른 지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더 잘 휘두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전조는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한 번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개선점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횟수가 열 번으로. 수십 번으로. 그 후엔 수백 번으로 불어났으니까.
슬슬 레벨 제한에 걸리는 거겠지.
소울 아카데미의 숙련도 시스템은 레벨에 따라 상승치에 제한이 걸린다.
레벨에 비해 숙련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숙련도를 올리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숙련도를 제대로 올리기 위해서는 레벨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난 저택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몸.
나중에 에반스의 던전에 들어가면 그 때는 레벨업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장은 여기서 멈춰야 했다. 효율이 떨어지니까.
메이스의 숙련도를 다 올렸으니 이제는 방패 숙련도를 올릴 차례다만 방패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선 나와 싸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
소울 아카데미에서 방패는 일종의 방어구 취급인지라 공격을 막을 때마다 숙련도가 오르거든.
방패 같은 경우엔 숙련도를 쉽고 빠르게 올릴 수 있는 꼼수가 있지만 그건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쓸 수 있어서 지금은 정직하게 올려야 하는데.
흐음. 베네딕한테 사람이라도 구해 달라고 해야 하나.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실전감각을 키우고 싶단 핑계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마냥 핑계는 아니다.
지금 나는 꽤 괜찮게 메이스를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한다만 가만히 있는 인형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르는 것과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적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실전 경험 없이 루엘의 시련에 들어갔다간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그러니 미리 실전을 대비하기 위해선 대련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가씨. 쉬는 중이십니까?”
고민을 하던 중에 내게 치근덕거리는 기사가 다가왔다.
쓸데없이 잘생겨서 슬슬 징그럽다는 생각이 드는 얼굴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반갑게 느껴졌다.
“아가씨?”
‘기사님. 바쁘세요?’
“허접 기사. 바빠?”
“아뇨. 그리 바쁘진 않습니다. 왜 그러시나요?”
‘그럼 저랑 대련 좀 해주실래요?’
“그럼 나랑 대련 좀 해줘.”
“네?”
방패숙련도 좀 올리게.
겸사겸사 내 뚝배기 깨는 실력이 얼마나 괜찮은 지도 한 번 체크 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