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4
던전의 문을 앞에 두고서 가뿐히 몸을 움직여보았다.
몇 번이나 기적을 일으킨 반동으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본래의 육신과는 달리 정신세계의 육신은 지극히 멀쩡했다.
바깥의 몸을 억지로 움직이다가 정신세계에 들어오니까 완전 가볍네! 이게 몸이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던 나는 흐흥하고 콧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우리를 처음으로 맞이해 준 것은 돌로 만들어진 감옥 같은 형상의 성이었다.
저 안에 탈출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단 역사를 품고 있을 것 같은 성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여긴 루엘 자네의 가문인가?”
“…정신이 나가겠군. 단순히 인형의 기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단 말이냐.”
“잠깐. 꼰대 할배. 이 우중충한 곳이 저택이라고? 할배 귀족이 아니라 죄수였던 거야? 생긴 거랑 어울리긴 하는데.”
“과거의 저택은 다 이런 모양이었다. 그 땐 국가라는 개념이 느슨했으니까.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데 외관에 신경을 쓸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인 이유에 할 말을 잃은 나는 다소 착잡한 표정을 한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말은 이렇게 한다만 어릴 적의 나는 이 곳을 좋아하진 않았다. 네가 말한 것처럼 척박한 모양새이지 않으냐.”
“이 녀석이 성기사가 되기로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온통 거뭇거뭇한 이 곳에 비해 교회는 새하얗고 멋지니까.”
“내가 할 말을 빼앗지 마라.”
“스스로 말하기 부끄러워할까봐 일부러 대신해준 건데.”
이 이야기는 조금 놀랍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엄격한 할아버지라면 어릴 적부터 독실한 신자였을 것 같은데 말이야.
“참고로 말하자면 이 시절엔 루엘처럼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어. 신과 인간이 가깝던 시기에 신앙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신과 인간이 가까웠던 시기, 그러니까 허접주신이 지금처럼 하늘에서 날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페도 짓을 던 시대인가.
…절대 무리지. 지금으로 따지자면 얼빠여우한테 신상심을 품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그게 되겠냐!
“그 땐 지금처럼 고결한 이유에서 신앙을 지키려던 사람은 많지 않았어. 좀 더 단순했지. 예쁘고 멋있으니까. 재밌으니까. 주는 권능이 마음에 드니까.”
“개 중에는 자신을 믿으면 특권을 준다며 장사를 하던 분도 계셨다.”
“맹약의 신님말이지? 그 분 멀리서 보면 재밌었어. 가까이서 보면 그냥 사기꾼이었지만.”
할아버지와 가라드가 별 것 아니란 것처럼 풀어내는 뒷설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거리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앳된 티가 여기저기에 묻어나는 남자였지만 그의 체구만큼은 달랐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을 압도할만한 거구는 장군의 상을 타고 난 것처럼 위압적이었다.
“역시 처음은 어렸을 적의 나인가.”
“저 시절이라면 영지에 방문한 강자에게 무작정 싸움을 걸고 다니던 때지?”
“하아아. 루시. 저걸 좀 빨리 치워다오. 꼴보기 싫다.”
바퀴벌레라도 본 것마냥 혐오로 가득한 할아버지의 표정에 난 고갤 갸웃거렸다.
그 정도면 흑역사는 아니지 않나? 힘을 가진 꼬맹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오만해지는 게 정상이잖아.
뭐. 일단 저걸 쓰러트려야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싸우긴 하겠다만서도.
“하. 이 꼬맹이는 뭐야?”
어.
“작업 걸러 온 거면 집에 돌아가서 우유나 달라고 해라. 십 년쯤 지나면 흥미가 생길 것 같으니.”
어라아?
“에휴. 어쩌겠냐. 내가 잘생긴 게 죄지.”
몸짓, 목소리, 표정 어느 하나 거슬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나처럼 생긴 여자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어렸던 시절의 할아버지는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극한의 나르시스트였다.
“크학! 크하하핳!”
“대체 저 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크흡. 큭. 크하학!”
자괴감 어린 할아버지의 어투와 숨이 넘어갈 것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가라드의 웃음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푸핳♡ 집에 있는 거울이 좋진 않나 봐?♡ 그딴 얼굴로 잘생겼다는 말을 하다니 말야♡”
“근거 없는 비방은 추하다. 꼬맹아. 차였으면 얌전히 집에나 가라.”
“뭐래?♡ 너 같은 고자한테는 조~금도 관심 없거든?♡”
“…고자? 내가?”
“나 같은 미인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는 게 고자말고 어디 있어?♡”
“허. 자의식이 다소 과하게 비대하군. 너야말로 거울이 필요할 것 같은데.”
“헤에~♡”
눈매를 좁히며 갑옷을 가리던 망토를 벗어 던지자 상대가 일순 굳은 게 보였다.
“어라아?♡ 나 같은 꼬맹이한텐 아무 반응 안 하는 거 아니었어?♡”
“무. 무슨 그딴 갑옷이.”
“움직임이 굉장히 수상해졌네?♡ 어디에 화가 잔뜩 났나 봐?♡ 푸하하핳♡ 짐~승♡”
대놓고 비아냥거리고 있으려니 벌개진 남자가 자신의 무구를 강하게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왜애?♡ 덮치려고?♡ 괜찮겠어?♡ 그러다 나한테 쳐발리면 굉~장히 추해질 텐데?♡”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오냐! 네 년에게 주제라는 것을 알려주겠다!”
이성이 날아가버린 남자의 움직임은 지독할 정도로 단순했다.
이게 진정 내가 아는 성기사 루엘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 정도면 무기를 드는 것조차 아까울 지경이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직선적인 공격을 가뿐히 회피하고서 몸 안 쪽으로 파고 들었다.
예전에 라샤가 어떤 식으로 주먹을 휘둘렀더라.
투기장에서 맞붙었을 무렵 지긋지긋할 정도로 받아냈던 주먹을 떠올리며 주먹 끝에 신성을 끌어모은다.
그리고 그걸 몸에 닿자마자 터트린단 생각으로 주먹을 내지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조잡한 cg가 덧칠된 영화처럼 훌쩍 날아간 남자는 벽에 처박혔다. 그리곤 여기저기에 부딪히다 도로 위에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어라? 이걸로 끝이야? 당연히 일어나서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멍청했던 날 상대하느라 수고했다.”
“에? 이걸로 끝? 옛날 할아버지는 진짜 허접했네.”
“그야 저 땐 기술 따위 힘으로 짓누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성기사단에 들어가서 박살나고 나서 내가 오만했음을 깨달았지.”
할아버지는 널부러져 있는 과거의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이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루시야. 오랜만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어서 신이 난 건 알겠다만 다음부터는 내게 맡겨다오. 이대로 가다간 끝을 보는 것보다 내가 쓰러지는 게 더 빠를 것 같구나.”
“으음. 허접한 할아버지 놀리는 게 재밌어서 싫은데.”
처음이니 허접하다만 앞으로 만날 할아버지까지도 허접하진 않을 거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심을 담아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가 될 테지. 그걸 생각해보면 뒤로 물러나고 싶진 않다.
곤란해하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중 가라드가 내 어깨 위에 망토를 얹어줬다.
“이번엔 이 녀석 말 들어줘. 적당히 괴로워해야 재밌는 거지 이젠 슬슬 안쓰러워져서.”
“그것도 그것대로 재밌지 않아?”
“그리고 말야. 너무 오래 끌면 바깥에 있는 애들이 걱정한다.”
…아. 맞다. 나 지금 아무 설명도 못 한 채 쓰러진 상태지. 괜히 시간을 끌면 잔소리가 늘어날 거야.
페이비의 잔소리는 진짜 길다고! 즉석에서 프리스타일로 설교를 몇 시간이나 이어가는 걸 보면서 얼마나 경악했던지!
언젠가 괴력을 쓰다 팔을 부숴 먹었을 때 들었던 잔소리를 떠올린 나는 어깨를 떨다 할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럼 빠르게 가볼까.”
그 후에는 말 그대로 쾌속이었다.
과거의 할아버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지금의 할아버지가 지나온 자취에 불과할 지어니. 그 모든 시련을 겪고서 완성된 할아버지의 무 앞에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방금 전에 루엘은 일부러 공격을 허용했다. 저 정도는 몸으로 받아내도 문제없거든. 저런 식으로 슬쩍슬쩍 틈을 보여주면 상대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다.”
앞에서 차례차례로 과거의 할아버지들이 쓰러져가는 동안 가라드는 내 옆에 달라붙어서 할아버지가 싸우는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몸이 다루고 쓰는 무술이 다르니 저게 완벽한 정답이 될 순 없지만 그래도 배울 부분은 충분히 있다면서.
자기자신부터가 기본기를 극한까지 갈고 닦은 끝에 영웅의 반열에 이른 가라드라 그런가 그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쉬웠다.
“하도 꼬리를 치고 다니는 바람둥이라 혀가 잘 굴러가네?”
“루엘에 비해 훨씬 낫지?”
“무슨 헛소리! 나도 지금은 설명에 익숙하다! 예전의 내가 아냐!”
“예전의 널 상대하면서 그런 말을 하니까 설득력이 넘치네.”
그렇게 던전 안을 계속해서 나아가던 우리는 어느 순간 고요로 가득 한 하얀색 방에 도달했다.
루엘과 가라드는 자신들이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지만 난 아니었다.
이 곳은 내게 익숙한 장소였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던전의 끝에 도달하면 나오는 곳이 바로 여기였으니까.
눈에서 붉은 안광을 쏘아내는 듯 날 선 눈을 지닌 인형은 우릴 가만 바라보다가 아무 말 않고 방 바깥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보여줄 테니 따라오란건가.
인형의 무거운 발을 따라 방을 나선 순간 날 반겨준 것은 포박되어 있는 루엘의 인형, 오늘 낮에 보았던 체사레 추기경과 교황 직속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네임드 심문관 둘.
그리고 교황 본인이었다.
“성하. 저희가 이런 일을 저질러도 괜찮은 겁니까?”
“물론이죠.”
체사레 추기경이 머뜩찮은 듯 꺼낸 물음에 교황은 당연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이런 인형은 성기사 루엘 본인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 따위 장난감에겐 타락한 자들을 물어뜯는 사냥개 정도의 역할이 적당하죠.”
내가 아는 것과 달라. 모니터 너머의 교황은 가짜라 한들 거기에 충분한 경외를 바칠 녀석이었어. 결코 저런 식의 멸시를 보낼 사람이.
“아. 잠시만 이대로 나두어 주십시오. 급한 용무가 생겨서.”
다른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교황이 갑작스레 내 쪽으로 고갤 돌린다.
아니겠지?
단순한 착각이겠지?
“드디어 뵙게 돼서 기쁩니다. 알른 가문의 영애시여.”
…뭐?
“주신의 간택을 받은 당신이라면 분명 이 곳에 도달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성탄절 선물을 받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