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5
교황의 느슨한 웃음을 마주하던 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교황이 왜 나를 인식하고 있는 건데!? 여기는 내 정신세계잖아! 저 녀석에게 이성이 있어선 안 되는 거 아냐!?
“허어. 주신의 사도를 뵌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만 설마 이런 식으로 다른 영웅 두 분을 뵙게 될 줄이야. 너무도 영광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가라드도 보이는 거야?! 이래서야 내가 지하로 내려올 걸 예측하고 움직였단 추측도 무용지물이잖아!
“신성 속에 정신을 담아둔 건가.”
“역시 루엘님이십니다! 보자마자 이를 알아차리시다니!”
설명을 바라며 시선을 돌렸더니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니란 건가.
의도를 이해한 나는 얌전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오히려 교황 쪽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도께 설명을 해주시죠. 어차피 전 여러분들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놈들 중에서 헛짓거리 안 하는 놈이 없던데.”
어느새 내 앞으로 나온 가라드가 비아냥거렸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기가 죽지 않았다.
“위대하신 주신께 걸고서, 그 분에 대한 제 신앙을 걸고서 약조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어도 괜찮을 거다. 이 자의 신앙은 진실 되니.”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가라드는 납득하기 어려운 듯 내게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도 할아버지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교황의 신앙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임 속 지식을 가지고서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주신의 사도인 내가 교황의 믿음이 굳건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고결하신 두 분께서 인정을 해주시니 실로 감복하군요.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됐다.”
“하하. 죄송합니다. 아마 지금 루엘님께서 설명을 하지 않으려는 건 사도께서 지닌 힘을 숨기지 위함이겠죠. 허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요. 사도께서 지닌 정화와 포용의 힘을.”
교황의 말에 할아버지가 잠시나마 말을 멈췄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생각이 복잡해졌다는 걸 절로 느낄 수 있다.
“떠보려는 건 아닙니다. 보았을 뿐이죠. 어둠의 신과 요정여왕께서 자리 잡은 숲에서.”
“…우리들의 감각을 속였다고?”
“제가 지닌 여러 잔재주 중 하나죠.”
가만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움직인 건 할아버지쪽이었다.
“루시. 인형의 신성을 품으며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만 신성은 자연스레 주인의 정신에 영향을 받는다. 신성이 본디 신께서 인간의 혼에 내려주시는 힘이라 그런 것일테지.”
내가 모르는 정보가 튀어나왔어. 신성이란 힘에 대한 뒷설정인가.
“이 특성을 극한까지 다룰 수 있다면 신성에 자신의 정신 중 일부를 부여할 수 있다. 리나님이 평소에 사용하는 분신을 생각하면 편할 거다.”
다소 허황된다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난 차마 할아버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당장 눈 앞에 있는 교황이 이를 실현하고 있는데다, 할아버지가 메이스에 깃든 방식도 아마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이 놈은 그 영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네가 이 곳으로 와서 인형 속 신성을 포용할 것을 예견하고 인형에 손을 댔지. 아마 요정여왕께서 들려주신 예언의 노래를 들은 걸 게야.”
“정확합니다! 제가 여기에 있는 걸 보자마자 거기까지 추리를 해내시다니! 과연 전설 속 인물이십니다! 당신을 모욕하기 위해서 만든 이딴 인형과는 격이 달라요!”
교황은 박수까지 쳐가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감탄을 드러냈지만 정작 할아버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작금의 시대에 태어난 자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넌 도대체 뭐냐.”
“정말 불가능하다 생각하십니까? 그러기엔 예외가 두 분이나 존재하지 않습니까.”
저 예외라는 건 나랑 페이비를 말하는 거겠지.
주신이 지상에 머무는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한다는 성경 속 구절에 대한 예외인 우리 둘이 있는 한 예외가 더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난 저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걸 안다. 주신은 단 한 번도 교황의 행동과 신념을 긍정한 적 없다.
다만 자기 사도 하나 제대로 지키질 못하는 개허접주신이라 저를 제지하지 못할 뿐.
“…그건.”
“굳이 설명을 바라신다면 그저 주신을 신앙하는 독실한 신자란 말씀밖에 못 해드리겠네요.”
뒤틀린 신앙을 그 누구보다 독실하게 지키고 있는 남자는 자신의 진실함으로 성기사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신의 사도시여.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불신자들이 신성을 품고 그걸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식으로 관심을 끌어보려는 거야? 퀘퀘한 수작이네. 네 입냄새마냥.”
궁금증을 품을 이유가 없다.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허접주신이 허접주신했다 수준의 이야기를 굳이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진 않아.
그런 생각에 고갤 저었더니 교황이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루는 신성과 사도님과 성녀님이 다루는 신성이 다른 이유에 대한 건 어떻습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 살짝 흠칫했더니 교황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본질적으로 많은 이 둘이 다루는 신성과 당신이 다루는 신성은 똑같은 주신의 신성입니다. 당신이라면 아실테죠.”
교황이 말한 것처럼 두 신성은 본질적으로는 같다. 여기까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많은 이들은 당신이나 성녀님처럼 따스함을 품지 못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은 위대한 주신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한 소리를 왜 길게 늘어놓는 거야?”
“예. 이는 당연한 말입니다만 그렇기에 복잡한 말이기도 합니다. 가라드님. 다른 신들이 택한 여러 사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비슷한 구석이 있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변태사도는 분명 변태까마귀와 닮아있다.
무예의 신이 관심을 보인 프레이도 분명 그와 비슷하다.
게임 속에서 보았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신과 성향적으로 닮아 있었다.
“저는 이를 신의 힘을 빌릴 자격이라고 설명합니다. 예. 주신의 사도시여. 당신께서 위대한 주신과 같은 고결함을 품었기에 당신은 주신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개허접변태페도주신과 닮았다고? 푸하핳! 그걸 말이라고 해?!”
근데 이건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기 싫다.
여자애한테 바니걸 의상을 입히고 히히덕대는 변태새끼랑 내가 닮은 꼴이라니!
물론 내가 모니터 너머에서는 비슷하게 행동한 적이 있어!
19금이란 단어를 홀린 것처럼 클릭해서 야시시한 복장을 입은 캐릭터들을 보며 히죽거렸다고!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모니터 너머의 세상이었다고!
현실에서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르진 않았어!
난 그저 성욕에 잠시 홀린 건전한 남정네였을 뿐이란 말야!
개허접변태주신하고는 달라!
“증명을 해볼까요?”
교황이 눈을 부릅뜬 순간 바닥에서 흔들림이 느껴졌다.
“당신이 받아들인 신성은 과거 루엘님께서 품었던 신성을 기반으로 하긴 합니다만 그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진 않습니다. 이 곳에서 처형당한 심문관들의 신성이 함께하고 있죠.”
“타인의 신성을 하나로 합쳤다고? 포용의 권능조차 없는 녀석이?”
“가능합니다. 루엘님. 사도께서 지닌 권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요. 많은 희생을 거친 끝에 얻은 결과물이죠. 실제로 당신께서는 이 안에 있는 신성이 하나라 생각하셨잖습니까?”
“네 놈. 대체 뭘 하려는 것이냐.”
“전 그저 신의 이적을 행한 대가로 고생하고 계시는 사도께 선물을 드리려는 것 뿐입니다. 본래의 힘을 되찾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좀 더 신에 가까운 분이 되길 바라며. 부디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교황의 웃음을 마주한 나는 저것이 나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내게 하는 말이 아니란 것을 이해했다.
그가 기뻐하길 바라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주신이다.
지금 이 개자식은 나와 주신을 동일시하고 있기에 내가 기뻐하는 일이 주신이 기뻐하는 일이 될 거라 여기는 것이다.
진짜 열이 잔뜩 오르네.
누구를 역겨운 변태새끼랑 똑같은 사람 취급한 것도 마음에 안 드는 데 이제는 뭐? 널 강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다고?
“뇌가 짐승수준이라 짐승처럼 행동하는 거야?♡ 보답하겠답시고 이런 피비린내 나는 선물을 준비하다니♡ 취향에서 수준이 보이네♡”
“본래 지녀선 안 될 것을 지녔던 자들이니까요. 그 대가를 지불했다 생각해주시지요.”
“대가?♡ 푸하핳♡ 큽♡ 방금 전에 대가라고 그런 거야?♡ 궁금하네♡ 네가 뭔데 대가를 받는 거야?♡”
“위대한 주신에게 신앙을 바치는 자이지요.”
“삐이이~♡ 오답이야♡ 개허접변태주신은 너 같은 쓰레기의 신앙은 안 받거든~♡ 그 신앙이란 거 지금쯤 어디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지 않을까?♡”
“그럴리가요. 주신께선 모두를 포용하시는 분일지언데.”
“허접주신도 곤란하겠네~♡ 못생기고 냄새나는데다 망상에 찌든 할배 스토커가 달라붙다니~♡ 나 같으면 너무 역겨워서 혀를 깨물었을거야♡”
보란 듯 혀를 깨무는 시늉을 했더니 처음으로 교황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허나 그건 아주 잠시였다.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은 교황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소 불쾌하신 듯 합니다만 이미 늦었습니다. 당신께선 제 선물을 받았으니까요.”
“내가?♡ 언제?♡”
“이미 신성을 포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설마 이걸 받아준 거라고 생각한 거야?♡ 크흡♡ 캬하핳!♡ 정~말 멍청하네♡”
내가 포용하고자 했던 건 어디까지나 할아버지가 지녔던 신성이야.
광신에 찌든 미치광이들 것도 아니고, 그 미치광이들을 죽여서 끌어 모은 신성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반품할게.
개봉된 물건은 반품할 수 없다고 할 거야?
엿이나 처먹어.
난 이미 포용하고 싶은 것만 포용하고 싶다고 결정했거든.
불만이 있으면 허접주신한테 기도로 불만신고 접수해봐.
네가 하는 헛소리가 거기까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허~접♡”
감정에 따라 일을 저지르면서도 뒷 일을 걱정하던 나였지만 행복에 겨운 교황의 표정을 본 순간 걱정이 필요 없단 걸 깨달았다.
하. 진짜 이 세상엔 마조 새끼들이 너무 많다니까.
“하하하! 오늘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추후에 다시 뵙길 기원하죠!”
그래. 몇 개월 뒤에 다시 보자. 교황.
네가 생각한 모든 게 박살난 순간에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