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7
너무도 일러서 기도조차 시작되지 않은 새벽.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잠에 빠져 있는 이 시간에 체사레 추기경은 교회의 회개실에 방문한다.
그의 행적을 아는 이들은 자신의 자그마한 죄조차 가벼이 넘기지 못하는 철저함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체사레 추기경이 회개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그렇기에 매일매일 하늘에 사죄를 올린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해야만 하는 자신을 지옥으로 보내 달라 청원한다.
그럼 무엇이 다른가.
회개를 끝마친 이후가 다르다.
체사레 추기경은 회개를 끝마치고 나서 바로 회개실을 나서지 않는다.
그 대신 신상에 앞에 가서 위대한 주신의 흔적이 남은 목걸이를 가져다 댄다.
자신의 죄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모든 걸 똑바로 바라보다 지옥으로 떨어지기 위해.
“이런 식으로 다시 뵙고 싶진 않았습니다. 체사레 추기경.”
자신의 죄를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는 추기경이었기에 입구에서 성녀의 얼굴을, 그리고 그 목에 걸린 영웅의 목걸이를 마주한 순간 굳을 수밖에 없었다.
진정 주신의 신성을 품은 이가 이 곳에 방문했단 건 그의 죄가 모두 다 까발려졌다는 것이니까.
“…이거 참. 저도 그렇습니다. 성녀님.”
변명의 여지는 없다만 괜찮다. 아무 문제 없다. 처음부터 변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신실한 당신께서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성녀님께서 저를 신실하다 평해주시니 참으로 기쁘군요. 그러니 어설프게나마 답변드리겠습니다.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어중간하게 신앙을 품었다면 죄악을 행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이 아래에서 죽어간 이들처럼 사악했다면 이런 고민을 품게 될 일도 없었겠지.
신실했기에, 신께 자신의 모든 걸 바치겠노라 결심했기에 나는 스스로 죄를 택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전 얌전히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요 근래 여러 업적을 이루어 온 성녀의 명성은 드높다.
본래라면 성지에 들어올 수 없을 인물마저도 환영을 받게 만들만큼.
그러니 그녀가 직접 나서 비토한다면 커다란 파란이 일겠지.
허나 이는 예측했던 바다. 그녀가 주신의 신성을 지니고 있는 한 언젠가 마주하게 될 문제임을 예전부터 알았다.
들킨 이후도 당연히 준비해뒀다.
지금에 이르러 진정한 성녀가 되었다고 한들 이 분의 탄생이 바뀌는 건 아니다.
멍청하게도 옛날에만 집착하는 쓰레기들은 차고 넘치지.
그 부분을 노리면 시간을 질질 끄는 것쯤이야 얼마건.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려 하는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사를 본 체사레 추기경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침의 눈밭처럼 하얀 기사의 모습은 체사레가 지닌 죄 그 자체였다.
“루엘…님.”
분명 교황에 의해 망가졌을 인형이 왜 멀쩡한 거지? 설마 성녀님께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되뇌이면 무엇이 달라지더냐? 여전히 악은 악이고 잘못은 잘못이고 죄는 죄다.”
지금과는 비할 수도 없는 격란의 시대 속에서도 올곧음을 지킨 자의 말은 그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체사레는 쉬이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 옳다고 믿었던 일이거늘,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일이거늘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 네가 왜 대답을 망설이는 줄 아느냐?”
그 침묵을 루엘의 인형이, 아니 루엘이 부순다.
“그게 네 신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전 오롯이 저의 의지로 이 곳에 서 있습니다.”
“그럼 말해봐라. 네가 옳다는 것을. 너의 죄가 필연적이었단 걸! 당당히 설파해보란 말이다!”
체사레도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교황의 말에 동조했던 것이 아니다. 평생을 신의 품에 안기길 바라던 이가 스스로 지옥을 택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헌데도 불구하고 체사레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는 건 그를 다그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루엘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눈 앞에 있는 이가 다른 추기경이었다면 체사레는 웃으며 반박했겠지, 최근 들어 인정하게 된 성녀가 상대였다한들 체사레는 당황하지 않고 제 말을 다 내뱉었을 것이다, 설령 교황이 그의 의견을 질책했다 하더라도 체사레의 말문이 막히진 않았을 거다.
허나 눈 앞의 남자는 다르다. 신과 인간이 한없이 가깝던 시대에 성기사가 되어 신의 방패가 되길 자처했던 남자의 말이 지닌 무게는 너무도 무겁다.
“스스로는 확신을 지닐 수 없어 타인의 신념에 기댔던 놈 주제에 어딜 감히 죄를 입에 담는가!”
하늘이 어깨에 올려진 것처럼 무거워서 도저히 입술을 들 수가 없다.
“체사레님.”
그 때였다. 태양과도 같은 따스함을 품은 목소리가 체사레의 귓가에 닿은 것은.
“부족하나마 성녀라 불리는 몸입니다. 당신이 진정 회개를 바란다면 그 이야기를 들어드릴 순 있습니다.”
온화한 목소리를 들은 체사레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앞서 느낀 무게가 체사레를 짓눌렀다면 성녀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그가 마음에 품은 그늘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로써 마음 한 켠에 품었던 죄악감이 마음속을 가득 채우게 했다.
“아아아.”
체사레는 그 빛에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모든 것을 포기했다 말하는 사람 중에서 진정 모두 다 내다 버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저를 입에 담고 있는 이상 미련이 남았다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셈이지.>
<그러니까 루엘의 권위로 미련을 인정시킨 다음 도망칠 장소를 내어주면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어. 예전에 꽤 많이 썼던 방식인데 여전히 먹히네.>
<시간이 지나도 인간은 인간이란 것 아니겠나.>
<좋은 말이긴 한데 정신을 위태롭게 하기 위해 어둠의 권능을 빌린 쪽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시끄럽다! 네 놈도 동의하지 않았나!>
할아버지와 가라드는 무릎을 꿇은 채 엉엉 울며 모든 걸 고백하는 체사레를 보며 무덤덤하게 잡담을 나눴지만 난 저걸 편하게 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늙어빠진 할아버지가 마망~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페이비의 품에 끌어 안기는 걸 기대했는데 현실은 너무 성경스러워!
페이비가 체사레에게 이르되 네가 저지른 죄가 막대하나 위대하신 주신께서는 그마저도 포용하매 네가 스스로 죄를 고할 기회를 주겠노라 하시니 가라사대 네 죄를 고하라 하시니 체사레가 송구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더라. 같은 문장이 나와야 할 것 같다고!
노잼이야!
<질투하는 건 아니고? 넌 저런 거 절대 못 하잖아.>
<주신의 사도라는 직위와는 별개로 회개를 들어주긴 어렵지. 울면서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무기를 들고 달려들 것 같으니.>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잘 알거든요!?’
에♡ 다 큰 어른인 주제에 그런 걸로 우는 거야?♡ 완전 개허접이네~♡ 라던가, 푸하핳♡ 현실도피 하러 온 거네?♡ 한심해~♡ 같은 말을 해주는 참회실이라니! 누가 좋아하겠냐!
취소! 좋아할 사람이 있긴 하겠네! 본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변태새끼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겠지만!
‘두고 봐요! 이 원한 잊지 않을 테니까!’
<뭐 어떠냐. 이미 내 흑역사는 지나갔는데. 아무거나 해봐라.>
<놀아주면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참이거든.>
젠장! 평소에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더니 이럴 땐 또 호흡이 잘 맞네! 동료는 동료라는 거야!? 짜증나!
내가 나잇값 못하는 할배 둘이랑 티격태격하는 동안 페이비는 체사레의 포섭을 끝마쳤다.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교황의 손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친우분들을 데려오신 것이 설마 이 곳 때문이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우리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체사레는 페이비의 물음에 따라 공손히 대답했지만 그 중에서 쓸만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성하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정확한 위치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 분께서 계획하신 바에 대해선 알고 있지만 맹약이 강제되어 있는지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성하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그 분에게 종속된 사람들인지라 저로썬.”
정정하겠다.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
내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것이 더 많았다.
맹약에 걸려서 말 못하는 부분도 아마 내가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거다.
추기경이란 지위를 지닌 협력자가 생긴 건 좋지만.
뭐랄까. 직설적으로 말해서 이 인간 무능해!
게임 속에서 적으로 나왔을 땐 좀 더 까다로운 인간이었을 텐데! 이게 아군약화의 법칙이냐!
“당장에라도 모든 직위를 내려놓는 것이 옳을 테지만 아직은 제가 성녀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듯 하니. 모든 게 끝나면 겸허히 처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번 일은 여러모로 잘 풀렸다.
내 신성도 상당히 회복됐고 교회 내의 새로운 협력자도 생긴데다가 페이비에게 목걸이도 선물해줬으니까.
추기경이 쓸모가 없는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저건 바라지 않았던 부가소득이니 마냥 불평하기도 그래.
친구들과 헤어진 나는 알른 저택으로 발을 옮기면서 다음에 있을 일정을 생각했다.
이제 하루 쉬고 나서 용사의 인형이 있는 곳에 방문한 다음 바로 섬에 가면 끝. 이라는 게 나의 계획이었다만.
“대체 어딜 그리 쏘다니는 거지?”
알른 가문의 저택에 불청객이 와서 문제가 생겼다.
“사람의 별칭 중 호구라는 단어를 붙여 놓고서 친구들과 놀러다니면 재밌는가?”
다신 만나지 않을 기세로 헤어졌던 르네는 뒤 편에서 베네딕이 날 선 시선을 보내고 있음에도 태연했다.
대체 담이 얼마나 큰 거야? 저 트롤이 이렇게나 적의를 드러내면 조금이라도 무서워하는 게 정상이잖아.
“어리석은 질문이었군. 필시 즐거웠겠지. 예전에 나눴던 대화조차 잊어버릴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은 여자이니. 나 따위 하루아침에 지워버렸을 터.”
우와아.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데 말 속에 담긴 감정이 너무 적나라해.
그냥 축축한 정도가 아니야. 장마 때 곰팡이가 잔뜩 핀 반지하 같은 축축함이라고!
단적으로 말해서 기분 나빠!
“내 그 날 헤어지고 화딱지가 나서 여러모로 생각을 해봤다만 나 혼자 괴로운 것이 억울해서 말이다. 난 나 혼자 손해 보고서는 못 견디는 성격이거든.”
“주절주절 참 말이 많으시네요. 그렇게까지 사과를 받고 싶으신가요? 죄~송~합~니~다~ 라고 해드리면 될까요?”
“그딴 사과 따위 필요치 않다. 난 그냥 네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싶을 뿐이거든.”
어머니의 명령이고 왕위고 평판이고 나발이고 간에 자신과 똑같이 화가 나게 만들고 싶다 이야기하는 르네의 웃음은 흑화육수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만.
“죽엇!”
연기에 숨어서 날아든 여우의 발차기가 르네의 뺨에 직격하는 걸 본 순간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
“하하하! 어떠냐! 이 변태자식아! 이게 바로 정의의 철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