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8
성지에서의 일이 끝나고 다시금 왕궁 안으로 돌아온 아서는 자신의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1왕비에게 호출받았다.
평소 1왕비의 곁에서 달달 볶이던 신하들은 어디로 간 건지 홀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1왕비는 웃으며 아서를 맞이해줬다.
“여로가 풀리기도 전인데 호출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도움을 줄 사람이 간절한 상황인지라.”
거짓말이라는 걸 감출 생각도 없으시군. 평소라면 큰형님을 불러 자신의 옆에 앉혔을 상황에 날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저는 왕궁의 업무를 한 번도 수행해 본 적이 없습니다. 1왕비님. 당신께 도움보다 폐가 되겠지요.”
“저는 3왕자님의 총명함을 압니다. 능숙해질 때까지 도와드릴테니 일단 앉으시죠.”
– 저 쪽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얌전히 앉아라.
조각의 말이 옳아 보이는군.
하아. 당장은 1왕비님의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나.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1왕비의 설명에 귀기울이던 아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노망이라도 드신 건가? 처음 업무를 수행하는 자에게 맡길만한 일거리가 아니지 않나!
말씀하신 것처럼 절차를 따라가면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 난이도 이전의 문제다.
내겐 이 업무를 감당할 권리가 없다.
“다시 설명해드릴까요?”
“아뇨. 설명해주신 부분은 다 이해했습니다.”
“그럼 당신이 해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권력이란 자신의 힘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잊고서 권리를 취하고 권력을 취한다면 어느 순간 자신이 휘두르던 것이 스스로에게로 되돌아올 수 있다.
왕가의 핏줄말고 그 어떤 것도 지니지 못했던 아서는 살아남기 위해 항상 이 사실을 유념해왔다.
그렇기에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이건 자신이 손을 내밀어선 안 되는 일이란 것을.
“죄송합니다. 대신 큰형님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1왕자님이라면 외출 중이랍니다. 돌아오려면 한참 걸리실거에요. 알른 가문에 가셨거든요.”
어지간하면 왕궁에서 나가질 않는 큰형님이 제 발로 알른 가문에 향했다고?!
지난번에 있었던 일이 무척이나 거슬리셨나보군!
헌데 그 곳에는 리나님을 비롯해 루시 알른에게 열광적인 이들이 자리 잡고 있지 않던가?
불행한 상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부디 알른 백이 이성을 붙잡고 저들을 말려야 할 터인데.
“3왕자님?”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을 하느라.”
“무엇을 걱정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다릅니다. 지금의 당신은 이 일을 수행할 권리가 있죠.”
그렇겠지.
어렸을 때처럼 파벌싸움에 휘말려 사라질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이젠 날 비호해주는 이들도 있으니까.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서류에 내 이름을 새기고 싶진 않다.
“1왕비님. 미사여구를 다 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왜죠? 남자아이들은 다들 권력에 흥미가 있지 않던가요?”
“그야 다들 떠받들어지는 걸 좋아하니까요.”
“당신은 아닌가요?”
“예. 전혀요.”
다른 이들의 칭송을 받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자신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는 무리를 옆에 둘 수 있다는 것도 권력의 즐거움이지.
말 한 마디에 뒤집어지는 이들을 보는 것도 누군가에겐 기쁨이 될 수 있겠고.
허나 조금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가 없는 충성이란 존재치 않는다.
권력에 기생하는 이들 모두가 저마다의 바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걸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권력은 위태로워진다.
“전 체스를 두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구경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사실 체스를 두는 것보다 다른 걸 더 좋아하기도 하고요.”
어머니께서는 내게 행복하라고 말씀하셨다.
어찌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알지 못 하겠고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일이 되겠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실하다.
권력을 쥐었을 때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을 거란 것만큼은.
“왜 제가 당신에게 눈독을 안 들였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방금 전에 제가 드린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들었어요.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단거죠. 왕이 되길 바라는 사람은 왕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거든요.”
1왕비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펜과 함께 품위를 내려놓은 채 쿡쿡하고 웃음을 흘렸다.
“보통 왕이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은 왕의 권력만을 바라는 사람이에요. 존엄의 자리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자신을 꿈꾸기에 당당할 수 있는 거죠.”
아서의 머릿 속에 떠오른 것은 과거 왕이 되고야 말겠노라 외치고 다니던 2왕자 세실이었다.
몇 가지 일을 거치고 성숙해진 형님은 권력에 집중하기 전에 먼저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수련을 거듭하고 있지만 과거의 형님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형님은 왕이 지닌 권력만을 바라봤다.
“과연 그들이 지금의 당신처럼 왕의 책임을 통감한다면 근심 하나 없이 왕이 되겠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자신이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답이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서는 일부러 말을 비틀었다. 상대가 바라는 말을 해주고 싶지 않다는 멍청한 생각에서 말을 바꿨다.
“그렇죠?”
그것이 상대를 기쁘게 할 수 있단 사실도 모르는 채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바라건 바라지 않건 왕이 되어야만 한다 생각한다면 그리 될 수 밖에 없겠죠.”
싱긋 웃는 1왕비의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아서였지만 그는 그 감정에 깊게 파고들 수 없었다.
그보다 먼저 1왕비가 축객령을 내렸으니까.
“오늘 알려드린 것은 완벽하게 복습해주세요.”
집무실 바깥으로 나온 아서는 목덜미를 주무르다 이내 한숨과 함께 발을 움직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생각해서 알른 가문 쪽으로 가볼까.
– 꼬맹아. 저 여자의 본래 성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지?”
– 이유가 있으니까 대답이나 해. 당장.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볼로시였을 거다. 기사단에서 활약하실 당시 그리 불리셨으니.”
– 정말이냐? 볼로시라는 가문이 정말 실존하는 가문인가?
“어이.”
– 일단 대답해봐. 제발.
솔라딘의 조각이 이토록 간곡한 부탁을 하는 경우는 없다시피했기에 아서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애써 무시했다.
“서부 쪽의 자작가문이다. 라흐비 공작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 1왕비님께서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라흐비 공작가의 지원이 컸기 때문으로 안다.”
– 단순한 내 착각이었나?
“궁금증이 해결됐다만 이제 대답해라. 무엇이 거슬리기에 그러는 거냐.”
아서가 심문하듯 따져 묻자 조각이 말을 삼켰다가 속삭이듯 답했다.
– 그 여자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감시자에 가까워보였다.
“…감시자?”
이 녀석이 말하는 것이 단순한 사전적인 의미는 아닐 거다.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무척이나 진중하니.
“설명해봐라. 어차피 이젠 제약도 없지 않나.”
– 솔라딘과 에르기누스님 사이에 맺어진 맹약은 기억하겠지?
“봉인을 지키는 대신 나라의 건립에 도움을 줬다는 것 말이냐.”
– 헌데 말이다. 약속이라는 건 내버려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는 법이니 이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줄 누군가가 필요했지.
“그게 감시자라는 것인가.”
–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솔라딘의 부품이었다. 어느 순간 부서져버렸지만.
봉인의 옆을 지키던 자신과는 달리 바깥에서 움직여야했던 감시자는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했다.
“그럼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존재라는 것 아니냐.”
– …그렇지. 에르기누스님께서도 저 여자를 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으셨으니 괜한 생각이란 건 알아. 헌데 뭔가, 뭔가 거슬린단 말이야.
조각의 설명을 듣던 아서는 방으로 향하던 발을 멈췄다.
감시자라는 것에 대한 정보가 내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는 모른다.
허나 1왕비님이 내게 왕위를 강요할 생각이라면 그 때를 위한 준비물 하나 정도는 필요할 테지.
“네 직감이 옳았는지 확인해보자고.”
– 무언가 방법이 있나?
“우리 쪽엔 왕국의 모든 정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마침 잘됐군. 루시 알른과 큰형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걱정스러웠는데 마침 용무가 생긴 셈이니까.
루시 알른의 비아냥에서 빠져나올 핑계가 생겼단 사실에 안도하며 순간이동의 진을 밟은 아서는 알른 가문의 저택에 발을 들이고서 진지하게 자신이 환각에 빠진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생긴 거, 말하는 거, 움직이는 거, 심지어 싸우는 거까지 어쩜 이리 추할까! 이 곳이 숲이었다면 넌 내 얼굴을 보지도 못했을 거다! 이 추남아!”
“여자아이의 발치에서 히죽거리는 것밖에 못하는 변태년이 어디서 망발인가! 그만큼 나이를 처먹었으면 욕망을 숨기는 법도 배워야지! 하! 가축조차 되지 못하는 여우 따위에겐 과한 바람인가!?”
“추악한 게 아니라 솔직한 거다! 네 녀석처럼 음습한 놈은 밤 중 침대에서의 상상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지!”
“개와 닮은 동물답게 개소리를 잘하는 군! 상시 발정기로 사는 건 짐승의 본능이더냐!?”
숲의 주인과 왕국의 1왕자가 서로를 향해 자신의 무기를 들이밀고 있었다.
품위도 격식도 예의도 겉치레도 없다. 저들의 사이를 잇고 있는 건 자신이 지닌 감정을 부딪히는 뒷골목의 싸움일 뿐.
“상대가 질색하는 것도 모르고 달라붙는 추악한 수컷 주제에 감히! 네 놈은 핏줄을 타고난 것에 감사해야 할 거다! 이 곳이 자연이었다면 넌 도태되었을 테니까!”
“그러는 그 쪽은 다른가!? 내가 보기엔 오래토록 도태된 것처럼 보이는데?!”
진심 어린 살의를 내비치며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둘보다도 비현실적인 것은 두 패로 나뉘어 양측을 응원하는 기사들의 모습이었다.
어느 한 쪽이 기세를 취할 때마다 격하게 반응하는 기사들은 술을 잔뜩 퍼마시고 이성을 놓아버린 주정뱅이들처럼 보였다.
“도태?! 육향에 흔들리는 수컷 따위가 할 말인가!?”
“그러니까 네 년이 짐승인 것이다! 사람은 본능에 저항할 줄 아는 생물인 법!”
그리고 무엇보다 골이 아픈 것은 이 상황을 설명해줘야 할 루시 알른이 둘 사이에서 체념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단 점이었다.
“저기요. 3왕자님.”
“…누구지?”
“카리아입니다. 고용주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대체 이게 뭔 상황입니까? 베네딕 저 새끼는 왜 리나님 편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거고요.”
“나도 알고 싶다.”
아서의 한숨 너머로 또 다시 숲의 주인과 1왕자가 부딪히고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