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9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던 나는 술집에서도 듣기 힘들 천박한 욕설과 거기에 호응하듯 커지는 환호성을 듣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오늘 하루는 편하게 쉴 생각을 하고 돌아온 거란 말야! 이런 정신나갈 것 같은 상황을 기대하고 온 게 아냐!
자신의 연기를 부려서 르네를 사냥하려는 얼빠여우 같은 건 바라지 않았어!
그 안개들을 마력의 발산만으로 흩어버리는 르네도 원한 적 없어!
그 둘 사이를 둘러싼 채 응원의 목소리를 내는 기사놈들은 당장에라도 묘지에 처박아버리고 싶고!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얼빠여우를 응원하는 베네딕은 뒤통수를 후려쳐주고 싶을 지경이야!
<저 남자놈. 상당히 강하군.>
<리나님께서 온전한 전력이 아님은 고려해야겠지만 저 쪽도 몇 수를 아껴두고 있는 것은 똑같은 듯 하니 누가 더 낫다 공언하기 어려워.>
<작금의 세대는 놀라운 재능들로 가득하군. 이 정도면 신화의 시대와 비교해도 괜찮지 않으냐. 루엘?>
<우리라는 예외를 제한다면 이 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더 열이 받는 건 이 개판으로 날 이끈 할배 두 사람까지도 저 둘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단 점이야!
이 상황에서 도망칠 방법을 알려줘도 모자랄 마당에 왜 다른 바보들한테 동조하고 있는 건데 이 근육 대가리들아!
이거고 저거고 그냥 다 박살낼까. 메이스로 공평하게 대가리를 깨버리면 좀 낫겠지.
일단 베네딕을 전선에 투입시킨 다음 기사들사이에 분탕을 놔서 내분을 일으키고 그렇게 생겨난 혼란 속에서 르네부터 제거한 후에…
“고용주님. 여기에 누가 약이라도 풀었습니까?”
진지하게 깽판을 칠 계획을 세우던 난 카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일어났다.
왔다! 드디어 정상인이 왔어! 내 하소연을 들어줄 멀쩡한 인간이 아서까지 둘이나 왔다고!
흐아아앙. 두 사람이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루시 알른이 몰려있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
“예전에도 절 때리고 울리고 싶어 하시다니 그런 취향이셨군요.”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그냥 간다?”
그건 안 돼! 이 상황에 나 대신 고통받아 줄 사람이 필요하단 말야! 다급하게 아서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긴 나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꼭 알고 싶으시다면 알려 드릴수도 있는데요.”
“…크흠. 그래. 꼭 알고 싶으니 설명을 좀 해봐라.”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였지만 이 상황을 정리하자니 머리가 아팠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 거야?
일단은 처음부터 말을 하는 게 맞겠지?
“처음은 얼빠여우가 음침왕자님을 냄새나는 발로 날려버린 데서 시작이에요.”
“잠깐. 뭐? 큰형님께 뭘 했다고?”
“걷어찼다니까요?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가시는 모습이 참 귀여우셨죠.”
최초의 소란은 얼빠여우의 기습으로부터 시작됐다. 연기를 뚫고서 튀어나온 여우가 특촬물 주인공처럼 멋진 일격을 선사하며 르네를 날려버린 것이다.
일국의 유력한 왕위계승자가 타 영지에서 불의의 기습을 당한 거다. 문제로 삼고자 한다면 얼마든 일을 키울 수 있는 명분이란 말이다!
당장에라도 의기양양해하는 얼빠여우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고 싶다 생각하고 있으려니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르네가 얼빠여우를 노려봤다.
“자존심이 상하셨던 걸까요? 음침왕자님께선 답잖게 열정적으로 소리를 치셨답니다.”
어디서 감히 짐승 따위가 일국의 왕자에게 대드는 것이냐고 르네가 소리치자 얼빠여우가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면서 팔짱을 꼈다. 그리고서 당당하게 외쳤다.
‘일국의 왕자고 나발이고 알 바 아니다! 내게 있어 네 놈은 그저 루시의 아름다움을 독점하려는 변태새끼일 뿐!’
‘…아. 그래. 생각이 났다. 아서가 그랬지. 알른 영애 옆에는 당장 감옥에 갇혀야 할 역겨운 변태 년이 있다고. 그게 네년인가.’
‘변태? 하하하! 웃기는 소릴 하는 군! 난 그저 루시의 아름다움을 추종할 뿐이다! 네 놈마냥 성욕에 취해 달라붙는 수컷과는 달라!’
상황이 격화되는 걸 느낀 이들이 둘 사이에 끼어 들어 중재를 하려했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혼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를 갈고 있던 얼빠여우와 아예 이성이 날아가서 이 년만큼은 조지고 만다 결심한 르네를 누가 말리겠는가.
머리가 이상한 것과는 별개로 한 쪽은 숲의 주인이고 다른 한 쪽은 훗날의 왕이다. 일정 이상의 권력과 무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 않은 한 둘 사이에 끼어들어 봐야 찌그러질 뿐.
“어라? 고용주님. 베네딕 저 새끼는 뭐 했어? 원래는 쟤가 중재해야 하잖아.”
카리아가 지적한 것처럼 원래 이 상황을 베네딕이 중재했다면 어찌저찌 일이 해결됐을 것이다.
실제로 중간까지 베네딕은 둘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성욕!? 하! 저딴 빈약한 몸에 관심을 가질 구석이 어디 있나! 바지를 입히면 남자아이와 구분도 못 할 것이야!’
르네가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진.
‘1왕자님! 아무리 당신이라 한들 그 말씀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희 딸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신경 쓰지 마라. 원래 저런 말을 하는 놈일수록 관심이 많은 법이다.’
‘그런!’
‘모함하지 마라! 짐승!’
쓰잘데기없는 부분에서 흥분한 베네딕이 중간에 끼어듬에 따라 상황은 악화되어버렸다.
“아무리 베네딕이 딸에 미쳐 산다해도 그건.”
“아니. 높은 확률로 진실일 것이다. 예전에 나도 비슷한 일을 당한 적이 있거든.”
“…미친.”
마음 같아서는 둘이 싸우다가 그대로 공멸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기에 난 어쩔 수 없이 그 난장판에 발을 디뎠다.
“변태들끼리 맞선을 보는 거냐고. 입만 뻥긋대는 게 참 잘 어울린다고 그랬더니 저 꼴이야.”
그나마 이게 최선일 것이라는 할배들의 말을 따라 두 사람이 대련을 하도록 유도한 것까지는 좋았다.
근데 이 둘의 대련이 기사들사이에 날 두고 숲의 주인과 1왕자가 싸우는 것으로 와전이 되어서, 처음에는 얼빠여우를 응원하던 이들 중 일부가 어느새 1왕자의 순정을 응원하기 시작하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꼴이 되어버렸다.
“루시 알른. 너와 큰형님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분이 저토록 감정적인 거냐. 평소의 큰형님이라면 결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러니까 모른대도요? 벌써 잊어버리셨나요? 아님 저한테 모욕당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시는 건가요.”
“정말 조금이라도 떠오르는 바가 없느냐?”
“무능왕자님이 저한테 달라붙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어요? 둘 다 똑같은 개허접동정이잖아요.”
카리아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고갤 돌렸지만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 시기에 난 왕국에 없었잖아. 아는 게 없어.”
그래도 정보망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뭔가 나오는 거 아냐?
“그랬다면 진즉에 알려줬지. 이상할 정도로 당시의 정보가 비어 있어. 아마 왕국 정보부 쪽에서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 같아.”
자신이 아는 건 그 당시 몇 번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 정도라는 카리아의 말에 난 한숨을 내뱉었다.
섬에 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돌아와 버렸네.
하아. 뭐. 됐어. 그보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나 말 좀 해 봐. 카리아 너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 아냐.
“그냥 결말이 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아? 어차피 둘 다 전력을 다하고 있진 않으니까. 적당히 끝나겠지.”
“…저게 전력이 아니란 말인가?”
아서는 수십으로 변해 달려드는 얼빠여우와 그 모든 공격을 몸놀림만으로 피하는 르네의 전투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번엔 카리아의 말이 옳았다.
어느 쪽이건 전력은 아니었다. 둘이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면 그 여파로 저택이 박살났을 걸. 그러기 전에 베네딕이 적당히 제압하긴 하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저 사이에 끼어들 수 있을까. 저들이 내는 전력을 받아낼 수 있을까.
음. 해봐야 알겠지만 예전에 라샤를 상대할 때처럼 답도 없는 수준은 아닐 거다. 홀로 방패와 창을 모두 담당할 순 없겠지만 방패만 하는 거라면 분명.
“1왕자 저하!”
어차피 끝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기에 저들과 싸우는 상상을 하며 시간을 떼우려던 중 저택의 입구 쪽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왕국의 관료로 보이는 그는 기사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진 않았다.
“1왕비님께서 저하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십니다!”
처음 관료가 목소리를 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선조차 주지 않던 르네였지만 1왕비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발을 멈췄다.
“여기까지하지.”
달려들 준비를 하던 얼빠여우는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무기를 내린 르네에게 달려들진 않았다.
“못 이길 것 같으니 꽁무니를 빼는 거냐?”
“날 보고 변태라고 했던가. 뭐. 좋다. 그렇게 생각해라. 이제와서 별칭 하나가 는다 한들 뭐가 바뀌겠는가.”
“하! 그렇게도 어미의 명령이 소중하더냐?! 네 어미 때문에 자신의 감정마저 내다버릴 거라면 아예 네 어미와 결혼을 하지 그러나!”
얼빠여우의 말은 분명한 모욕이었지만 관료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 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태 둘이 나눈 욕지거리에 비한다면 저 정도는 안부인사에 불과했으니까.
허나 난 달랐다. 어째선지 저 말이 르네에게 해선 안 될말이라고 느껴서. 그의 고요하고 직설적인 살의가 눈에 담기는 것을 보고 말아서.
순식간에 신성으로 육신을 강화한 나는 방패를 치켜든 채 얼빠여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1왕자님. 여기까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허나 그가 내지른 검이 내 방패에 닿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먼저 움직인 베네딕이 르네의 팔목을 붙잡아서 멈췄으니까.
“이만 돌아가시지요.”
얼빠여우를 노려보던 르네는 그 앞을 가로막은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혀를 차면서 자신의 검을 거뒀다.
“실례했습니다. 알른 백. 그리고… 영애.”
방금 전의 격동이 신기루였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격식을 차린 르네는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웃으면서 아서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서 떠나갔다.
관료의 곁에서 당당히 걷는 르네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기이하게도 내겐 그의 그림자가 무척이나 짙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