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2
“우리가 넘어 온 수라장이 몇 번이냐. 그런데 그보다 더 기상천외한 것들이 있다고? 허! 웃기는 소리!”
가라드는 루엘의 말을 전혀 신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겪은 전쟁이 어디 영주 사이에서 일어나는 땅따먹기 치졸한 것이었나?
아니다. 영웅들이 발을 들인 전장은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보다도 더 커다란 것. 인류의 존속을 건 대전이었다.
그 속에서 악신들은 영웅이란 변수를 없애기 위해 온갖 지옥도를 만들어 그들을 끌어들였지.
헌데 그보다도 험악한 던전이 존재한다고?
“그딴 건 길가던 꼬마아이의 망상에서나 나올 물건이다! 심지어 그 꼬마아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야!”
“허나 존재한다. 가라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지를 뛰어넘은 수라경이.”
허나 루엘은 보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을 너무나도 간단히 뛰어넘는 지옥을. 발 한 번 잘못 내딛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장소를.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걸 알더라도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정경을.
“예전에 그 곳에서 빠져나왔을 때 난 가만 생각을 해봤다. 과거 전성기 시절의 내가 그 곳에 들어갔다면 공략을 할 수 있었을까. 몇 번이고 복기를 해봤다만 결과는 모두 처참했지.”
개인의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던전을 만든 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죽이고자 마음 먹은 이상 그 안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영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 파티였다면? 그래도 다르지 않아. 조금 더 멀리 갈 수는 있었겠지만 끝에 도달하진 못해. 개인의 목숨을 희생양 삼아 나아가더라도 마찬가지. 우리에겐 불가능해.”
“우리가 불가능하다면 누구에게 가능하단거냐! 이 정신세계 속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최고라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헌데 누가 가능하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던전을 누가 공략할 수 있지?”
“그건 나도 궁금하네.”
가라드의 뒤 편.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에르기누스는 당혹으로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못 들었어? 이래 뵈도 신격이야. 내가 만든 메이스 속 세상에 침범하지 못할 리가.”
“…여기가 메이스 안이라고? 꼬맹이의 정신세계가 아니라?”
“당연하지. 생각해봐. 자기 정신세계에 다른 정신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냐. 거기에 침범당한다고. 내가 그런 것도 신경 안 쓸 줄 알아?”
루엘의 메이스 자체는 신이 내린 성물이지만 거기에 이런저런 부가적인 마법을 부여한 건 에르기누스다. 당연히 훗날 메이스를 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있을 수밖에 없다.
“라고 해봐야 어디까지나 이렇게 했을 것 같다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네가 에르기누스지만 에르기누스가 아니라서?”
“정확해. 내 기억은 중간에 끊어졌거든. 그 후의 에르기누스님께서 무얼 했는지는 나도 정확하게 몰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에르기누스, 인형에서 시작해서 진짜가 되어버린 이의 머리에 든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들어질 때로 끝난다.
그 후에 지상으로 나간 에르기누스가 무얼 했는지는 그의 입장에서 불명이다.
루엘의 메이스 속에 담겨 있던 것들도 마찬가지다. 최초에 에르기누스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의 권능을 얻은 후에는 메이스 안에 담긴 걸 인지했고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그 근원에 도달할 순 없었다.
그건 아직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지지 않은 법칙이었으니까.
“지상의 에르기누스님은 신의 권능을 다루는 영역에 도달한 게 분명하네. 그렇지?”
“나도 그렇게 들었다.”
루엘이 고갤 끄덕이자 에르기누스가 웃고 가라드가 멀뚱히 둘을 번갈아본다.
“가라드.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해. 왜냐면 너도 가라드지만 가라드가 아니잖아. 따지자면 그 사념에 가깝지. 네게 담긴 것 이상의 지식은 없을 거야. 그치?”
“…그래.”
가라드가 납득하고 난 후 에르기누스는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각자의 그림자 속에서 어둠이 올라와 의자를 만들어낸다.
“네 힘이란 걸 알지만 여전히 어둠은 꺼림칙하군.”
“당사자인 나도 다르지 않아. 조금만 엇나가면 잡아먹힐 것 같거든. 여왕께서 곁에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는지.”
“잠. 여왕? 네 옆에 요정여왕님이 계시다고?”
“못 들었어? 하하하! 좋네. 만날 여자를 데리고 다니던 너한테 내가 여자이야기로 염장을 지를 날이 오다니 말야! 정말 기쁘지만! 이건 살짝 뒤로 미루자. 지금은 더 재밌는 이야기가 있잖아.”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에 루엘은 그게 앞으로 방문할 던전에 대한 이야기란 걸 눈치챘다.
“알잖아. 공략이 아예 불가능한 던전은 만들어질 수 없어. 우리가 싸웠던 최전성기의 아그라라 한들 그런 억지는 부리지 못해. 그런 던전이 만들어지는 것보다 권능이 바닥나는 쪽이 더 빨라.”
신의 권능도 무한한 게 아니다. 그들이 지닌 힘은 필멸자들의 입장에서 한없이 드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 하여 전능의 영역에 이르진 못했다. 끝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전성기 당시의 우리 파티마저도 공략할 수 없는 곳이라면 말다했지. 그런 곳은 만들어 질 수 없어. 그런 장소가 존재한다면 그건 던전이 아냐. 한없이 비슷한 어딘가지.”
“그럼 그 비슷한 어딘가겠군.”
에르기누스의 말에 루엘은 담담하게 답한다. 아무리 따져 물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은 진정 존재한다.
“정말 궁금하네.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어.”
“보면 되잖나. 이제 곧이다.”
“제약에 걸려. 그 안은 내가 봐서 안 되는 영역인 모양이야.”
“신이란 것이 왜 그리 못하는 일이 많은 게냐.”
“그야 따지고 보면 우리도 힘을 빌리는 대리인에 불과하니까.”
나중에 다시 오겠다면서 에르기누스가 떠나간 후. 어둠으로 이루어졌던 의자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 때 루시는 자신의 앞을 차단하는 결계를 보고서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자의 것이라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루시의 걸음은 놀이를 하러 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보였다.
감정을 어렵잖게 읽은 가라드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루엘이 한 말이 맞다면 지금부터 그녀가 향할 장소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지옥이다.
한 걸음 잘못 내딛는 순간 그대로 목숨을 잃는 처형장.
헌데 그런 곳에 가는 걸음이 어떻게 저토록 가벼울 수 있는가.
루시가 미쳐서 그런 건 아니다. 함께 지낸 날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라드는 루시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녀는 선하고 고결할 뿐 근본적인 감성은 평범한 여자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것이고 꺼려지는 건 꺼려지는 거다.
이런 부분에서는 그녀의 친구들이 더 비범하겠지.
그러니 루시가 지옥에 발을 내딛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이 그녀에게 지옥이 아니기 때문.
즉, 타인에게는 지옥인 장소도 루시에겐 놀이터가 된다는 것.
“생각해보면 너 루시가 제대로 던전을 공략하는 모습을 본 적 없지?”
“이전에 네 인형이 있던 곳이라면.”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제대로라고 했잖나.”
제대로?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 때 루시 알른이 보여준 지휘는 능숙했다.
지금이 아니라 신화의 시대에도 그렇게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아.
헌데 그게 제대로가 아니라니?
“오. 이제 시작하는 군.”
극이 개막한다는 것처럼 가벼운 어투를 따라 고갤 돌린 가라드가 보게 된 것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발을 움직이는 루시 알른과 쉴 새 없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함정들이었다.
“저건 무슨.”
“권능이 담겨 무슨 금속이라도 찢어버릴 칼날. 스치기만 해도 죽을 맹독이 발린 화살. 사람과 함께 공기를 태워 피하더라도 질식사시킬 불꽃. 가끔은 감각을 빼앗길 때도 있고 때로는 수많은 환각에 둘러싸일 때도 있고 저주라던가 하는 것은 너무도 흔하지.”
그 어떤 맹자가 던전에 들어오는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단한 금속도. 경이로운 근육도. 뛰어난 마법 실력도 뭣도. 그 어떤 힘을 지니고 있더라도 반드시 죽일 수 있도록 이 던전은 설계되어 있다.
악한 마음을 품은 어린아이가 이러면 반드시 사람이 죽는다고 말하며 웃지 않을까 싶은 순수한 악의는 스스로를 맹자라 자부하던 가라드마저 질리게 만들 지경.
“그렇지만 상관 없다. 여기 있는 건 루시니까.”
허나 루시 알른은 그 어떤 고난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처음 이 던전에 발을 디딜 때 부르던 콧노래가 여전히 복도를 가득 채운다.
던전이란 이름의 처형대를 무대삼아서 공연을 이어나간다.
단순히 미래를 읽는다는 수준이 아니다. 한 번 미래를 본 것 정도로는 이런 기행을 벌일 수 없다.
이건 꼭 수십수백수천수만에 달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미래를 경험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경지다.
“자. 가라드. 이제 인정하겠지? 그대가 내기에서 졌다는 것을?”
“자. 잠깐. 기다려봐라. 우리 일단 대화를.”
“걱정 말게. 이 곳은 정신세계잖나. 무엇이라도 만들 수 있지. 설령 그대가 입을 갑옷이라 해도 말이야.”
*
확실히 악질 분탕충인 허접주신이 만든 던전은 다른 던전하고 격이 달라.
수도 없이 이 곳을 공략해 본 입장이라 여유를 부리면서 움직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가끔 섬뜩한 느낌이 치솟아 오르니까.
만약 인류의 적이 멍청한 아그라가 아니라 허접주신이었다면 이미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끝으로 향하는 문이 내 앞에 보였다. 어렸을 적의 루시가 남긴 기억이 남아있는 문이 말이다.
예전에 비해서 빠르네. 지난 번에 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성장한 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문에 손을 가져다 댄 나는 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며 심호흡을 했다.
루시의 기억을 마주한다는 건 그 감정을 마주한다는 것. 자신의 유일한 방패막을 잃어버린 채 울부짖던 여자아이의 감정이 가벼울리는 없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한다. 루시가 품었던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후우.”
두 손으로 문을 연 순간 던전의 어둠 너머로 어린 루시가 웃음을 흘린다.
나도 그와 함께 웃는다.
이렇게 비교해 보니까 더 확실하네!
나 키 조금 더 커졌구나!
대충 0.1cm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