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4
서럽게 우는 루시와 그녀를 달래기에 급급한 르네를 구경하던 난 자연스레 안도하고 말았다.
르네를 만나기 전까지의 루시는 언제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위태로웠으니까.
조이가 이야기한 첫 만남이 이거였구나.
어떻게 가까워진건지 모르는 게 정상이야. 속마음을 읽어서 루시의 이해자가 됐다는 걸 어떻게 예상하겠어.
‘내가 뭘 해야 울음을. 하. 됐다. 그냥 잔뜩 울거라.’
이 때의 르네는 내가 게임 속에서 보았던 모든 일이 끝났을 때의 르네와 닮아 있었다.
툴툴거림 속에서 묻어나오는 자상함이 르네의 본질이란 거겠지.
어라? 이렇게 생각하면 좀 이상하네.
두 사람이 틀어질 이유가 없잖아.
속마음을 알 수 있으니 메스가키 스킬의 왜곡으로 오해가 생길 일은 없어.
자신을 아껴줄 사람이 필요했던 루시가 르네에게 매몰차게 대할리도 없고, 르네의 입장에서도 알른 가문의 영애와 사이가 틀어질 일을 만들진 않을 거야.
르네는 여자를 후리는 데 능숙한 녀석이잖아. 빈틈투성이인 여자애 하나를 구워삶는 건 손쉬웠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관계가 어긋날 이유는 루시뿐이야.
아! 혹시 루시 쪽에서 집착을 한 건가? 설득력이 있어! 르네에게 있어 루시는 여러 지인 중 하나지만 루시한텐 르네 뿐인걸!
‘난 이만 가보마. 아직 인사하지 못한 이들이 여럿 있어.’
‘…여자아이가 힘들어하는 걸 그냥 버려두고 가겠다고요? 귀축! 인간쓰레기!’
‘어차피 다음에도 볼 것 아니냐.’
‘응?’
‘사교장이 열리기만 하면 뺀질나게 드나드는 너잖나. 나도 당분간 귀족들과 만나기 위해 사교장을 드나들 테니 자연스레 보게 되겠지.’
‘흐응~ 나중에도 꼭 저를 보고 싶으셨나요? 욕망에 충실하신 모습이 참 귀여우시네요.’
‘네가 싫… 아니다. 됐다. 다음에 보지.’
‘네에~ 다음에는 덜 음침해진 채였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지며 루시의 의존이 심해질 것이라는 내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여태 다른 이들에게 미움만 받던 루시다. 처음으로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 준 타인을 만났는데 어떻게 상대가 소중해지지 않겠는가.
‘왕자님께선 저 말고 만날 사람이 없으신가요? 당신의 음침함에 놀라 모두 도망쳐버렸나요?’
‘그러는 너도 나 말고는 친한 사람이 없잖나.’
‘저런 허접들하고 친해질 이유가 없잖아요. 허접균이 옮는다고요.’
다만 내 예상과 다른 부분은 르네 쪽이었다.
‘어찌 그리 제멋대로일 수가 있는 건지.’
‘음침 왕자님께선 왜 제멋대로 못 해요? 왕자면서도 소심한 찌질이라서 그런가요?’
‘사회적인 입지라는 게 있는 거다. 꼬맹아.’
‘그거 때문에 어린애가 잔뜩 놀려도 아무 말 못하는 거군요? 그럼 계속 음침한 찌질이로 남아주세요.’
‘계속 네 장난감 노릇을 하란 거냐?’
‘놀림당하면서 즐거워하시잖아요? 저도 하기 싫은데 마조 왕자님 취향에 맞춰주느라 힘들다고요. 정말 귀축이야.’
‘…무슨 뜻인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가.’
‘왜요? 왜애요? 무슨 말인데요오?’
‘빌어먹을.’
루시가 사교계에서 모두를 불행으로 이끌며 르네를 찾는 것처럼 르네도 루시를 눈으로 찾아다녔다.
그리고서 여느 때처럼 다른 영애와 싸우고 있는 루시를 보곤 웃음을 흘렸다.
‘하아. 마음 같아선 계속 개인실에 틀어박혀 있고 싶군.’
‘왕자님. 변태.’
‘그런 말이 아니다. 귀족놈들 비위 맞춰주는 게 숨막힌단 소리지.’
르네가 왕이 될만한 재능을 지닌 것과는 별개로 그는 다른 이들이 떠받들어 주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한탄하듯 이야기하길 다른 놈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충 보이는데 그와 반대되는 말을 당당히 지껄이는 게 거슬린다는 듯 했다.
‘나에게서 뭔가를 뜯어내려는 놈. 약점을 잡으려는 놈. 황송해하는 놈. 가늠하려드는 놈. 기선제압을 하려는 놈. 하여간 정상이 없어.’
‘참 신경 쓸 게 많으시네요. 음침 왕자님이 아니라 음침 노예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그 말 불경죄다.’
‘그~런가요? 그래서 어떡하실 건가요? 자그마한 여자애한테 주먹이라도 휘두르실 건가요?’
‘휘둘러주랴?’
‘그럼 바로 바보 아버님한테 다 일러버릴 거에요.’
‘허. 그것 참 무섭군.’
타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르네에게 있어 루시와 바깥의 귀족들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루시쪽이 대하기 편했다.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 음험한 생각을 하는 이들과 달리 루시는 겉은 거칠어도 속은 순수한 여자아이일 따름이었으니까.
‘근데 말이죠. 음침한 외톨이 왕자님은 왜 사교계가 싫다면서 여기 오는 거에요? 고통 받는 게 즐거우신 건가요? 아님 그렇게나 제가 좋으신 건가요?’
‘뭐어. 너와 대화하는 게 편한 것도 이유겠지만 이게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이란 게 가장 큰 사유겠지.’
‘권력을 쥐어서 뭘 하시게요? 그래봐야 소심한 왕자님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뭘 할 건가. 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군.’
‘바보에요?’
‘부정할 수 없구나. 왕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정작 왕이 되어서 무얼 할지는 관심 바깥이었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왕의 지위란 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왕이 되고서 얻을 권력으로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겠단 것이 숱한 투쟁을 겪어가면서도 왕위를 노리는 이유다.
허나 르네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있어 왕위는 결과이자 목표다. 그 이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에 생각해서 대답을 해주마.’
그 말을 끝으로 떠난 르네가 다음 사교장에서 웃으며 전한 말은 다소 생뚱맞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고민을 해봤다만 역시 난 왕이 되고 싶지 않다. 왕이 되어서 하고 싶은 게 없어.’
‘그걸 자랑하러 오신 건가요? 한가하고 한심하시네요.’
‘한심하면 뭐 어떠냐. 어차피 한량이 될 건데.’
르네는 개인실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루시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어깨의 짐을 떨쳐버린 듯한 르네의 모습에 루시는 부럽다 생각을 하면서도 그와 함께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서 얼마가 지났을까. 어느 순간 갑작스레 르네가 사교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며칠 내로 또 만나자던 이가 한 달이 지나도록 왕성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 빈자리를 바라보던 루시는 온갖 불행한 상상으로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한 번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그녀이기에 희망보다 불행이 선명했다.
그럼에도 루시가 계속해서 사교계에 나온 까닭은 자그마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희망을 잃어버리면 다신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서 루시는 르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음침 왕자님?’
허나 긴 시간이 지나 이루어진 재회는 루시가 바라는 형태가 아니었다.
르네는 여느 때와 달리 루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 루시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시선을 돌려버렸다.
어째서?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손을 벌벌 떨면서도 루시는 르네와 단 둘이 될 때를 기다렸다.
여전히 그녀에게 르네는 하나뿐인 희망이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알른 영애.’
개인실을 먼저 찾은 루시에게 인사한 건 르네가 아닌 검은 복면의 여성이었다.
‘너 뭔데.’
‘저는 1왕비님의 전령으로써 당신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저 따위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실테니 미사여구는 제하겠습니다. 알른 영애. 1왕자님을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뭐? 방해? 내가? 헛소리 하네! 날 방해하는 건 오히려 저 음침한 외톨이거든?!’
‘당신도 아시잖습니까. 그게 동정에서 시작된 관심이란 것쯤은.’
복면을 쓴 암부의 사람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루시를 진창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여러 사실들을 강제로 알게 만들었다. 자신과 르네의 관계 속에 의심의 꽃을 피웠다.
‘타인의 발목을 붙잡는건 당신의 부모로 족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이의 인생을 망쳐야 성에 차십니까?’
‘…너.’
‘1왕자님께 감사를 느낀다면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복면의 여성이 루시를 남겨둔 채 떠나가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르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근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쉰 르네는 허술한 웃음과 함께 루시를 불렀다.
‘방금 전 일은 미안하군! 루시 알른!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아는 체 할 수 없었다!’
‘…’
‘왜 그러나. 화가 많이 났는가?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만 부디 내 사정을 이해해다오. 나도 그대를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어.’
‘…’
‘하아. 알겠다. 알겠어. 내 이럴 줄 알고 뇌물까지 준비했지. 이 팔찌는. 오. 뇌물이란 말에 관심이 생겼는가?’
입을 꾹 다문 채 뚜벅뚜벅 걸어 온 루시는 르네의 손에 들린 팔찌를 잡아채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내던졌다.
‘이딴 싸구려로 환심을 사려 하신 건가요. 뇌가 꽃밭이시네요.’
‘루시 알른.’
‘저한테 어울리는 화려한 걸 준비하기엔 돈이 부족하셨나요? 쯧. 호구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쓰레기 왕자라니.’
‘너.’
‘아아. 됐어요. 이만 꺼져주세요. 외톨이랑 놀아주는 것도 이제 질려서요.’
‘누군가가 찾아와서 헛바람을 놓은 것이냐? 왜 바라지도 않는 말을 지껄여대는 게야.’
‘…하. 정말. 눈치라곤 조금도 없는 동정답네요. 거슬린다고요! 제멋대로 편해진 당신을 보면!’
루시의 뺨을 타고서 눈물이 떨어짐과 동시에 환상이 무너져내린다.
허나 내게 있어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방금 전에 그 복면. 내가 아는 그 년이겠지?
카리아의 후계. 자기가 뭐라도 된 듯 지랄하는 썅년.
이 세상이 현실이 되어도 지랄을 떠는 꼴을 보니 참 즐겁네.
그 년이 한 방식은 1왕비의 스타일이 아냐. 1왕비가 미쳤다고 알른 가문과 척을 질 일을 만들겠어?
미치광이긴 해도 정치는 세련되게 할 줄 아는 인간이야. 압박할 거면 르네 쪽을 건드렸겠지. 그래야 흔적이 안 남으니까.
그러니 루시한테 한 막말은 그 년의 독단.
후우우. 좋아. 섬에서 나가면 즉시 그 년 머리끄댕이부터 붙잡으러 갈 테다.
르네 앞에 대가리 박게 만들고 자기가 주제넘게 한 일을 다 말하게 만들거야.
아냐. 이걸로는 부족해. 좀 더 화끈한 게 필요해. 그 년이 발광할만한 무언가가.
“어서오게나. 후대의 용사여. 내 무능 때문에 짐을 짊어진 그대를 볼 면목이.”
“닥쳐. 생각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저기.”
“시끄럽다니까? 귀 없어?”
“어. 어어어. 음. 일단 알겠네. 천천히 생각하다 결론이 나면 말을 걸어주게.”
하. 진짜. 누군지 몰라도 귀찮게 구네. 안 그래도 잔뜩 열 받아 있는데 왜. …음?
“고민이 끝났나? 다행이군! 언제까지 기다려야하나 싶었어!”
“이 멍청해 보이는 면상은 뭐야?”
“하하하. 멍청해보이나? 바보같단 이야기는 자주 들었는데!”
정중함과는 거리가 먼 어투에도 환히 웃어보인 남자는 어깨를 피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반갑네! 후대의 용사여! 나는 그대의 선대일세!”
용사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