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5
1왕비와 함께 있는 것이 거북해 일거리를 든 채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르네였지만 정작 그의 손은 잠깐 움직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평소 같았다면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끝냈을 분량이거늘 어찌 이렇게 망설임이 생기는 것인지.
르네가 자문하자마자 떠오르는 건 오랜 예전에 끊어져버린 인연이었다.
“그 빌어먹을 꼬맹이.”
처음에 파트란 축제에서 재회했을 때는 일부러 모른 체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멋대로 결심하고 제멋대로 오해하고 제멋대로 떠나가버린 녀석이니 표독스레 군다고 여겼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그 녀석 때문에 열이 받기도 했고, 날 버려놓고 다른 녀석들과 웃으며 지내는 꼴이 보기 싫기도 해서 웃으며 넘어갈 일에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미혹에서 빠져 나오고서 채 1년밖에 되질 않은 꼬맹이다.
그에 반해 나는 왕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수련을 해왔으니 격차가 한없이 클 터.
이긴 후에 어떤 벌칙으로 널 괴롭게 만들까 하는 것이 내 유일한 고민이었고 고뇌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헛웃음이 샌다.
뭐 그딴 공략방식이 있는가.
더 어이가 없는 건 루시 알른이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던전을 공략한단 동생의 증언이었다.
모의공략이기에 가능한 꼼수라고 생각했고 그 방식을 인정해서 패배를 승복했거늘 설마 평소에도 기행을 일삼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서 자신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빛을 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질투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괜시리 신경 쓰이게 빚이란 단어를 내뱉긴 했다만 난 그 후로 널 만날 생각이 없었다.
긴 시간이 지나 행복해진 사람에게 굳이 과거의 일을 들먹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열이 올라서 오해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던 내 쪽도 분명한 잘못이 있었으니 서로 갈길을 가게 된다면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나 혼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어머니가 아서를 왕위에 세우려 한단 것을 눈치챘다.
명석한데다 재능도 있는 동생이다.
뒷배가 부족한 것이 유일한 흠이었으나 아카데미에 들어간 후부터는 그것조차 단점이 아니게 되었으니 아서는 필시 훌륭한 왕이 될 게 분명했다.
왕위에 대한 미련은 존재치 않았기에 난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이를 기점으로 그 꼬맹이와 화해할 수 있을지 모른단 기대감마저 품었지.
그래서였을거다. 질겁을 하며 물러난 네가 아서 뒤에 숨은 걸 보고서 감정을 잔뜩 쏟아낸 까닭은.
아무리 타인이 되었다 한들 그 반응은 너무하잖으냐. 진심으로 싫어하는 게 보여서 더 짜증이 났었다.
명분을 만들자는 핑계로 너와 거리를 거닐 때도 난 네가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열이 받을 짓만 한다고 여겼다.
같잖은 짓을 한다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너와 어울려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끝까지 어울려 준 다음 왕위에 오를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다시 이전처럼 지내자고 손을 내밀 속셈이었단 말이다.
헌데.
하.
아예 나에 대한 걸 모두 잊어버렸다고?
그리 서럽게도 울던 꼬맹이가 나란 인간을 아예 잊어버려?
열이 식은 후에 돌이켜보니 이전의 모든 반응들이 이해가 됐다.
꼬맹이 입장에선 처음보는 권력자가 이상할 정도로 달라붙는 것처럼 보였을 것 아니냐!
화가 나고 쪽팔리고 또 열이 올랐다가 한숨을 내뱉었다가 지금도 그 녀석은 속편히 있을 거란 생각에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복잡한 마음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재차 한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놓은 르네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허공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내 상태가 좋진 않다만 이러한 기척조차 못 알아챌 정도는 아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었던 벽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리아가 가르치고 있는 남자였던가.”
“1왕자님께서 저에 대해 아실 줄이야. 실로 영광스럽습니다.”
“암부의 사람으로서 기쁜 일은 아니지. 얼굴이 팔리고도 태연히 다닐 수 있는 건 카리아 같은 녀석밖에 없잖나.”
“괜찮습니다. 저도 비슷한 일을 할 줄 아는지라.”
손으로 잠깐 얼굴을 가렸을 뿐이거늘 알새틴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 오십을 가볍게 넘길 듯한 남자의 얼굴로 말이다.
“어쨌건 스승님의 제자니까요.”
목소리마저도 외견과 어울리게 바뀐 걸 확인한 르네는 작게 감탄사를 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지? 왕궁의 경비를 뚫고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무언가 중요한 용무일텐데.”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1왕자님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왕위를 계승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다른 계승권자를 모두 없애는 거니까?”
“예. 그렇습니다.”
르네는 한심하단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야 1왕비님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나. 여러 귀족들이 친족시해범이라며 아서를 비난할 것이고, 아서는 아서대로 1왕비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움직일 텐데.”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은 르네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가 왕국의 부흥에 진심이라는 것. 아무리 쉽고 편한 방법이라도 그것이 왕국에 해를 끼칠 일이라면 1왕비는 선택지 않는다.
“1왕비님이라면 차라리 아서에게 업적을 쥐어주는 쪽을 택하겠지. 이미 여러 귀족들에 의해 견제받고 있는 아서다. 요정의 숲 복원 이후로 몇 개만 더 쥐어주면 자연스레 경쟁구도에 참여할 수 있을 걸.”
업적을 이루도록 유도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서는 참견쟁이니까. 주변 인물들을 적당히 위험한 상황 속으로 밀어넣으면 알아서 업적을 이룰 테지.
“업적과 연관한 일입니다만 1왕자님께서는 국왕폐하를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이십니까?”
“그 분의 병환이 악화되고 난 후부터는 자주 뵈진 못했다만 달에 몇 번 씩은 문병을 하고 있다. 당장 지난 주 주말에도 곤히 잠들어계신 것을 확인하고 왔지.”
“그건 정말 국왕폐하셨습니까?”
알새틴의 의문에 르네가 들으라는 듯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내가 그 정도도 구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허나 1왕자님. 스승님께서 아시는 바에 따르면 국왕폐하가 여태까지 승하하지 않으신 건 기이한 일입니다.”
“…자세히 말해봐.”
“스승님께서 아직 왕국에 머무실 적에 국왕폐하께서 시한부의 판정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이 자는 분명 진심으로 말을 하고 있다.
카리아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부여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만 카리아가 혼란을 만들 동기가 없잖나.
그러고 보면 재작년에 폐하께서 위독하셨던 적이 있었지. 갑작스레 완쾌되셔서 신하들이 온갖 입에 발린 말을 해댔던 게 기억이 난다.
왕위계승이 미뤄졌단 사실에 짜증을 내면서도 겉으로는 웃는 게 참 아니꼬왔어.
“그 말이 사실이라 치자. 그게 업적과 무슨 관계지?”
“국왕폐하의 몸을 빼앗은 악마를 처단한 자. 라는 업적이 있다면 여타 귀족들도 쉬이 입을 놀리지 못하겠죠.”
“방금 네 말. 즉결처형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목을 베더라도 확인을 한 후에 베어주십시오.”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르네는 느릿하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1왕비님께 들키지 않고 국왕폐하를 뵙는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에르기누스님께 협조를 받았습니다. 어둠의 권능을 빌려 자취를 감출 수 있도록.”
알새틴이 목걸이에 담긴 마법을 사용하자 그의 신형이 갑작스레 사라진다.
흔적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은신에 르네가 경악하고 있으려니 다시금 알새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굳이 내가 필요한가?”
“당신을 설득하기 위한 목적도 있어서요.”
당분간 이 방을 찾을 사람은 없다. 자리를 비운다해서 누군가 알아차릴 리는 없어.
“좋다. 대신 네 말이 틀렸다면 그 책임은 네 주인에게 묻도록 하지.”
“스승님말입니까?”
“아니. 루시 알른을 말하는 거다.”
괘씸함을 참을 수가 없다. 누구는 자기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 고생을 했거늘 나에 대한 걸 완전히 잊어버린 채 웃으며 지내던 꼬맹이는 좀 더 곤란해질 필요가 있다.
“덤으로 네 주인을 곤란하게 만들 비책에 대해서도 알려줘야겠어.”
“일이 어긋났을 경우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알새틴과 함께 어둠에 몸을 숨긴 르네는 왕궁의 사람 그 누구도 자신들을 못 알아차린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허어. 그래도 왕궁에서 일하는 자들 정도면 상당한 수준을 지녔거늘 이상한 기색조차 느끼지 못하는 건가. 신의 권능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군.
“이 일에 대해서는…”
그러다 1왕비가 있는 곳을 지나치게 된 르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깨를 움츠렸지만 1왕비는 대신과 업무에 대해 논할 뿐 그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구간을 자나친 두 사람은 이후에도 별 어려움 없이 왕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그럼.”
“기다려라. 이 문에는 여러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다. 섣불리 건드리면 왕궁의 모든 인원이 여기로 몰려들 터.”
“괜찮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왕궁의 최초 설계자는 에르기누스님이시니까요.”
알새틴이 품 안에서 꺼낸 종이를 문에 붙이자 문에 설치된 여러 복잡한 마법들이 자연스레 무력화가 됐다.
마법의 신조차 능욕하던 천재의 위엄을 몸으로 체감한 르네는 헛웃음과 함께 침실에 발을 들였다.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풍경은 내가 보았던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1왕비님께서 국왕폐하의 죽음을 위장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왕궁에 혼란만 불러 일으킬 사건을 1왕비님께서 일으킬 리가.
“…없어야 하는데.”
국왕의 초췌한 얼굴을 마주한 르네는 자신이 환각에 걸린 게 아닐까 몇 번이고 확인을 해봤다.
그리고 그 끝에 현실을 인정했다. 미라가 되어버린 솔라딘의 지엄한 존재에게 명줄이 붙어있을 가능성은 존재치 않았다.
“그럼 여태까지 내가 뵈었던 것은 누구란 말인가.”
“그 경악이야말로 업적을 드높일 단서 아니겠습니까.”
“머리가 아프군. 도대체 1왕비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
자신의 어미가 상상 이상으로 미쳐있었단 사실에 경악하던 르네는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놀라 고갤 돌렸다.
또각거리는 구두의 소리는 분명.
“어찌 당신의 이름을 부른 걸 아신 건가!”
방금 전까지 이야기하던 1왕비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