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8
용사의 눈동자는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가 바라보는 건 내가 아니었다.
내 뒤에 도사리는 존재, 지금 나에게 힘을 선사하는 이, 과거에는 용사의 뒤를 지켜주었을 초월자.
주신 아르마디. 그 누구보다 드높은 자리에 존재하는 신을 향해 용사는 항의의 눈빛을 보냈다.
“주신이시여! 이것은 소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평범한 인간이 수백년이란 시간을 버티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모든 제약은 무시한다 치더라도 수명만큼은 어찌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용사는 주신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봉인을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보통의 상대라면 헛소리로 치부하고 무시하면 그만인 이야기다만 그의 경우에는 예외였겠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세상을 위해 희생한 용사가 빈 소망이니까.
만류하고 설득하고 다른 길을 제시할 순 있어도 용사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는다면 아르마디에게 방법이 있겠는가.
“저희의 약속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게 허접주신에게 미련과 후회로 남았을지언정 주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에르기누스가 만들어낸 악의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냐.
용사가 여기에 틀어박힌 이상 말을 거는 것조차 무리야.
허접주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괴악하기 짝이 없는 던전을 모드로 만들었겠지.
과거의 용사를 구해줄 사람을 찾아서.
“저기♡ 저기♡”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 앞에 있는 용사야말로 후속작은커녕 DLC조차 나오지 못하게 만든 원흉이고 내가 망겜에 인생을 바치게 만든 원수란 소리다.
소울 아카데미의 원수!
죽여주마! 용사!
“사실 후회하고 있지?♡”
“무슨 소릴.”
“실수했다고 생각했잖아♡ 응?♡”
“그런 적 없다! 난 후회하지 않아!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정말?♡ 진짜로?♡”
“그래!”
“그럼 왜 동정찐따님 이야길 듣고 당황했어?♡ 그리고 왜 우연일 뿐이란 걸 알고 안도한 거야?♡”
본래의 용사였다면 지상에서 일어난 기적을 듣고 기뻐했을 거다. 그리고 그게 우연의 일치였단 걸 알고서는 한탄했겠지.
그 기적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인류는 악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단 소리니까.
“대답 안 해?♡”
“그건. 그러니까.”
“답답하니까 내가 대신 말해줄게♡ 바보가 되는 게 무서웠던 거잖아♡”
용사가 당황하고 안도한 까닭은 자신의 희생이 무의미해지는 게 두려워서다.
수백년.
수백년이다.
용사는 수백년 동안 이 곳에 갖힌 채 자신의 의무를 지켰다.
시간의 흐름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한 채, 어둠으로 물든 벽을 바라보며, 세월을 견뎌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용사의 정신력은 경이롭지만, 그의 정신이 처음처럼 굳건할 수는 없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잠깐.”
물음을 던지며 용사에게 다가서자 용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정말 당신이여야만 했을까?♡”
“내 말을.”
또 다시 한 걸음을 내딛자 용사가 주춤거린다.
“무언가 착각한 게 아닐까?♡”
“후대여!”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자 용사가 비틀거리다 휘청했다.
“성급하게 결정해버린 걸까?♡”
“그만!”
바닥에 자빠진 용사 앞에 도착한 나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빠진 용사의 숨이 내 얼굴에 닿는다.
“솔직하게 말해봐♡ 어쩔 수 없었다고 믿고 싶었지?♡ 자기의 희생이 고결해지길 바랐잖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고결함은 어느새 방어기제가 되어 미쳐버릴 것 같은 용사를 지탱해주는 근원이 됐다.
“푸하핳♡ 표정 좀 봐♡ 병신이 이거 보면 엄청 기뻐하겠다!♡ 완전 재밌는 장난감이잖아!♡”
“…날 시험하려 들지 마라! 그런다 한들 내 의지는 바뀌지 않는다!”
“시험? 푸하하핳!♡ 진~짜 멍청하네!♡ 사실을 지적해주는 게 어떻게 시험이야?!♡”
이제 난 그 근원을 무너트리고 용사의 웃음 뒤에 감춰진 불안을 마주하게 만들거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설득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잖아.
“꼰대할배가 이 꼴을 못 보는 게 너무 아쉽네!♡ 옆에 있었다면 표정이 진짜 재밌어졌을텐데 말야~♡”
히죽거리며 다음 할 말을 생각하던 중 등줄기에 섬찟한 느낌이 치솟아 올랐다.
드디어 열이 올랐나?
진짜 오래 버티네. 확실히 용사는 용사야.
용사의 이마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걸 확인한 나는 훌쩍 뒤로 물러서며 키득키득하고 웃었다.
“용사면서 여자애를 공격하다니♡”
“무례한 아이를 방치하는 게 올바른 일은 아니지.”
“뭐래?♡ 그냥 내 말을 듣기 싫으니까 다물게 하려는 거면서♡”
“…”
“마음대로 해 봐♡ 너 같은 허접이 날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베에. 하고 혀를 내민 나는 양 볼이 붉어진 용사를 보며 잔뜩 비웃음을 흘렸다.
으음. 고양감이 치솟는 걸 보면 최초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엔 성공한 것 같은데.
이제 어떡하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경고를 따라 고갤 비틀자 용사의 주먹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먼저 주먹을 휘두르고 심지어 맞추지도 못 한 거야?♡ 대단하네~♡ 역시♡ 풉♡ 용사♡”
아직 상대가 진심을 다하는 게 아니라서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만 언제까지고 내 사정을 봐줄 리는 없다.
머리에 열이 올라서 이성이 날아가는 상황에 힘조절 같은 걸 신경쓰겠냐.
그 전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게 되면 다행이겠지만 이 정도로 무너질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부서졌지.
“만날 혼자서 놀다보니 사람이 무서워?♡ 왜 자꾸 허공만 건드리는 거야?♡”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전력을 다하기 전에 박살 내면 되는 거 아닐까?
자괴감 속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 내가 위험할 일도 없고 목적도 이룰 수 있는 거잖아! 역시 난 천재야!
“아하!♡ 살에 닿으면 제대로 못 걷게 될 것 같아서 그러는구나?♡”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이며 상대를 지켜본다. 용사의 움직임 부분 부분에서 내가 아는 것들이 보인다.
모니터 너머에서 용사의 인형을 상대할 때 머리에 새겨두었던 것들이 말이다.
타이밍이 어긋나는 걸 제외한다면 동작은 거의 유사해.
“대체 얼마나 쌓여있는 거야?♡ 툭 건드리면 폭발해?♡”
그리고 용사의 움직임은 날카롭지가 못해.
본래 지닌 기량이 어디 간 건 아니지만 낡은 건 사실이야.
수백년 동안 어둠 속에 처박혀 있었는데 움직임이 예전 그대로일 순 없겠지.
“어떡하지?♡ 더럽혀질 게 무서워서 못 건드리겠어~♡”
점차 거세지는 공격 속에서 흐름을 붙잡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대의 움직임을 눈에 새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나아가야 할 경로가 그려졌다.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메이스를 붙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여태 뒤로 물러나기만 하다 툭하고 튀어나온 탓일까. 용사의 반응이 느렸다.
그 틈을 노려 용사의 옆구리에 메이스를 박아넣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갑옷이 찌그러졌다.
용사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두 팔을 벌려서 붙잡으려고 하네.
예상한 대로야.
쭈그려 앉는 것으로 두 팔을 피한 뒤 훤히 드러난 턱에 박치기를 했다.
뇌가 흔들린 듯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용사를 추격하지 않고 가만 내버려둔다.
무기도 꺼내지 않은 상태에서 찍어누르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되잖아.
핑계거리를 줄 순 없지.
“이런 허접한테 처발리다니♡ 병신은 얼마나 약해빠진거야?♡”
“…”
“옛날의 허접들도 불쌍하네♡ 이딴 게 용사라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입을 꾹 다문 용사가 손을 펼치자 손바닥으로부터 불꽃이 피어나더니 한 자루의 검으로 변모했다.
검에서 전해진 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자 몸에 소름이 돋는 게 그치질 않았다.
“여자애한테 처발리는 빙구주제에 대단한 척은♡ 그래봐야 실패자일 뿐이잖아♡ 허~접아♡”
처음으로 휘둘러지는 검격을 피하며 타이밍을 맞춘다.
검에서 흘러나온 열기가 피부를 따금따끔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로 휘둘러지는 검격을 막아내며 세밀한 조정을 한다.
굉음과 함께 팔에 전해진 충격이 커서 자연스레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세 번째로 휘둘러지는 검격을 향해 달려든다.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위압감. 숨을 들이쉬는 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열기. 이성을 잃어버린 눈동자를 통해 전해지는 거대한 분노.
웃음을 지을 여지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만 내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약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용사의 검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검에 실렸던 힘이 거대한만큼 그 반동도 크다.
지금의 용사는 훈련용 인형하고 다를 바가 없다.
용사 본인도 이를 알기에 다가 올 충격을 견딜 준비를 했지만 난 메이스를 휘둘러 갑옷을 후려치는 대신 훤히 드러난 고간을 향해 온 힘을 담은 발차기를 선사했다.
“끕…!”
세상을 구한 용사도 거기만큼은 단련할 수 없었던 듯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과 함께 용사의 육신이 무너져내렸다.
“이제 좀 알겠어? 지금의 당신은 자그마한 여자애한테 처발리는 개허접이야.”
땅에 얼굴을 박은 채 부들대는 용사를 향해 목소리를 낸다.
“병신이 일어나면 보기 좋게 잡아 먹힐 걸? 그도 그럴 게 병신들의 대장이잖아. 남자도 여자도 상관없는 개변태일게 분명해.”
지금의 용사로는 악신을 가로 막을 봉인이 될 수 없다.
과거의 무결한 그였다면 모를까 미혹으로 가득 찬 지금의 용사는 악신의 부활을 축하하는 제물이 될 뿐이다.
“그게 취향이라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그러니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
“저기~ 듣고 있어? 너무 기분 좋아서 기절해버린 거 아니지?”
한 때 남자였던 입장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용사의 머리를 쿡쿡 찔렀더니 그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쓰러져 있던 모습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위압적인 기세에 놀라 뒤로 나자빠진 나는 다급히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지만.
“하.”
그러기 무섭게 용사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정할 수가 없군. 너 같은 아이에게도 가지고 놀아지는 상황이니 아그라가 상대라면 볼 것도 없지.”
털썩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용사는 방패 뒤로 빼꼼히 튀어나온 내 얼굴을 보곤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어찌하면 좋겠나. 후대의 용사여.”
“어찌하긴 뭘 어째. 일단 바깥으로 나가야지.”
“역시 우리 중에서 가장 미련한 놈은 너였군.”
용사의 물음에 답한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목소리였다.
“…너희가 어떻게.”
성기사 루엘. 기사 가라드. 과거 용사의 동료였던 두 사람이 수백년의 세월을 넘어 이 곳에 왔.
“…할망구.”
“언급하지 마라.”
“역시 여장이 취미였구나? 잘 어울려!”
“언급하지 말라고 했잖나!”
가라드. 너 왜 나랑 똑같은 갑옷을 걸치고 있냐?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러웠던 거야?
“세상에. 가라드. 네게 그런 취미가.”
“그런 거 아니라고! 난 여장 취미 같은 거 없다고!”
“여자한테 질려서 남자를 유혹하기로 한 건가? 그 때 했던 말들이 농담이 아니었군!”
“아. 제발!”
“이해하네. 그럴 수도 있지.”
“위로해주지 말고 그냥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