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9
내기를 걸었다가 패배해서 벌칙으로 입게 된 것이란 이야기를 들은 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변태로 가득한 내 주변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면 끔찍하잖아.
그것도 여장 취미의 남색가는.
어라? 얼빠여우보다는 이 쪽이 더 나은 거 아냐?
보기 괴로운 것과는 별개로 나한테 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내기에서 진 대가일 뿐이었나? 다행이군! 사실 좀 무서웠어! 나 혼자 친우라 여기고 있었던 거라면 슬프잖나!”
“내가 미쳤다고 널 그딴 식으로 보냐!”
“취향이 안 맞을 뿐인 건가? 그 또한 다행이군!”
“아니라고 몇 번 말해애애애!”
“왜 화를 내고 그러나.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악의 없는 순수함이 가장 아프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걸까?
열이 오르다 못해 뒷목을 붙잡고 넘어가려 하는 가라드를 앞에 두고서도 용사는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저래서 나중엔 모두들 체념했지.”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인 할아버지는 둘이 다투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적당히 하지. 이러다간 끝이 안 나.”
“애초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것도 그렇군. 가라드의 취향은 지금 꼭 논의해야 할 사안도 아니니.”
“내가! 입고 싶어서! 입은 거! 아니라고오오오!”
가라드의 외침을 가뿐히 무시한 할아버지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용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쯤하지. 자네도 인정했잖나. 이건 무의미한 일이야.”
“그건 나도 안다. 후대의 용사가 저 작은 몸으로 이해시켜 주었으니까. 다만 이제와서 그만두긴 어려워. 앞서 말했듯 나는 봉인 그 자체거든.”
“자네가 사라지면 저 안에 있는 게 풀려나는 건가.”
“그런 셈이지.”
엑. 그럼 방금 전에 내가 한 일은 전혀 의미 없는 거야?
건방진 꼬맹이가 선대의 용사를 고자로 만들어버린 다음 기세등등해진 걸로 끝!?
야! 허접 주신! 폭행을 사주해놓고 가만있지 마!
네가 시켜서 저지른 일이잖아!
무슨 방도가 있는 거지?! 그러니까 메시지를 날린 거지!?
– 띠링.
[퀘스트 클리어!]
[선대에게 모멸을 느끼게 만드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아니! 야! 내가 무슨 나쁜 년이라는 것처럼 메시지 쓸래?! 네가 시킨 거잖아!
[보상을 받을 방식을 선택해주세요.]
[1. 직접 수주한다.]
[2. 피해자에게 보수를 지불한다.]
피해자라는 어휘는 이상하지 않냐?
선빵 맞은 건 내 쪽이란 말야!
내가 한 일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고!
이 메시지를 쓰고 있을 허접주신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 생각하며 씩씩거리던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2번을 선택했다. 허접주신이 바라는 내용도 이쪽일 테니까.
엿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1번을 선택할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 나까지 곤란해질 것 같잖아.
[보상이 지급됩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내 주변에 있던 어른들에게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펴진 걸 보면 보상이라는 게 저들의 고민을 해결해 준 거겠지.
근데 왜 난 몰라야 해? 내가 고생해서 이룬 퀘스트인데 왜 나한테는 아무 정보도 안 알려주냐고! 뭔지는 알려줘야지! 그래야 뿌듯함을 느낄 거 아냐!
“여태까지 해 온 것이 마냥 헛된 일도 아니었나.”
허탈한 목소리로 용사가 웃자 가라드가 독기 서린 목소리로 투덜댔다.
“그래봐야 멍청한 짓을 했단 게 달라지진 않지만.”
“내가 멍청한 짓을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그 때로부터 수백년이 지났잖아. 좀 고쳐. 이 자식아.”
“고칠 수 있으면 진작에 고쳤지.”
키득거리던 용사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선 내게 고갤 숙였다.
“정말 감사하네. 그대에게 짐을 물려준 것도 모자라 은혜까지 받게 되었어. 마음 같아서는 내 모든 걸 내어주고 싶네만 당장은 불가능하군.”
“그런 건 내 쪽에서도 사양이야. 비린내나는 허접의 물건을 받으면 기분 나쁘잖아.”
“그런가? 내 당장에 유용할만한 걸 줄 생각이었다만.”
고갤 갸웃거리며 용사가 손을 내밀자 흐릿한 안개같은 구슬이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지녔던 축복 중 하나일세. 그 어떤 부상이나 저주로 인해 고생하고 있더라도 단시간 동안 본래 지녔던 것 이상의 힘을 내게 해주지.”
신체 디버프 해제. 마력, 신성, 체력 모두 회복. 스텟 상승.
“물론 대가가 없지는 않아. 몸이 받는 부담을 뒤로 미룰 뿐이거든.”
대신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나는 순간 일시적인 행동불가 디버프.
“이런 축복은 쓰지 않는 게 최선이다만 자네는 그럴 수 없겠지. 앞으로도 수많은 고난을 마주할 수밖에 없어. 그 때 이 축복은 그대를 도울 걸세.”
반동이 얼마나 심각한지 몸으로 체감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이론상으로는 괜찮네.
일발역전의 수단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여러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게 분명해.
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죽기 직전까지 몰리는 처지란 걸 생각해보면 이 스킬은 내게 무척이나 유용할 거야.
…스킬의 유용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너무 슬프다. 언제쯤이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걸까.
“허나 그대가 필요치 않다니.”
“용사란 인간이 세 번은 권유해야 한단 것도 몰라? 이게 용사인지 짐승인지 모르겠네.”
용사의 손에 들린 것을 가로채자 내 몸 안으로 연기가 흘러들어왔다.
– 띠링!
[‘용사의 의지’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용사의 의지? 일발역전용 기술에 붙여질만한 이름이 아닌데?
쓸데없이 거창한 이름이라 생각하던 나는 또 다시 알림음이 울리는 걸 듣고서 멈칫했다.
[용사의 의지가 용사의 혼 조각에 반응합니다.]
[정신계열의 여러 하위스킬들이 용사의 의지를 반깁니다.]
[포용의 권능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용사의 의지’가 ‘용사’로 변화합니다.]
용…사?
무의식적으로 감정스킬을 사용하자 내 앞에 몇 개의 푸른 창이 더 떠올랐다.
[구원의 역할을 맡게 된 이에게 주어지는 호칭.]
[불리한 상황일수록 신체능력이 상승합니다.]
[악을 상대할 때 강해집니다.]
[선을 행할 때 운이 상승합니다.]
[저주저항이 상승합니다.]
[마력저항이 상승합니다.]
[정신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타인에게 호감을 삽니다.]
[동료에게 스킬의 일부가 적용됩니다.]
[동료의 성장을 가속합니다.]
[희망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내가 여태까지 받았던 그 어떤 스킬보다도 장황한 설명문 속에는 내게 득이 되는 내용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하하. 지금까지도 용사의 행보를 걸은 셈인데 이젠 아예 주신이 공인한 용사가 되어버린건가.
메스가키 용사라는 게 있어도 괜찮은 걸까 싶다만 이미 되어버린 걸 어쩌겠어.
– 띠링.
오? 또 뭐야? 아직도 줄 게 남았어?
[메스가키 스킬에 저항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
용사라며!
구원의 역할을 맡았다는 거창한 설명까지 붙였잖아!
근데 왜 메스가키 앞에서 허접이 되어버린 거냐!
참교육하라고! 참교육!
용사면서 꼬맹이 앞에 굴복하면 어쩌잔 건데!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개허접용사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던 중 할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붙잡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몸이 할아버지의 어깨 위에 올려진 후 눈으로 항의했지만 할아버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잘 가라.”
“흠? 가라드. 자네 여기에 머물 생각인가?”
“이 멍청이를 또 혼자 둘 순 없잖아.”
“난 괜찮다만.”
“내가 안 괜찮아. 이 호구 자식아.”
할아버지는 가만 가라드를 바라보다 고갤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보지.”
“그 땐 이 개같은 옷을 너한테 입혀주마.”
“그런 취미였나? 내기를 제안한 이유도.”
“진짜!? 가라드. 자네.”
“아니라고! 아니라고오오오!”
발광하는 가라드와 그를 보며 웃는 용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더니 두 사람이 똑같이 인사를 해줬다.
길고 긴 어둠 속에 남겨지는 두 사람의 표정은 태양 아래에 머무는 이들보다도 밝고 희망찼다.
*
루시가 저택을 떠난 후에도 아서는 알른 가문에 머물렀다.
왕궁으로 돌아갔다가는 다신 바깥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잔뜩 들떠 있던 베네딕은 루시의 친구라면 언제나 환영한다며 그를 받아들여 줬고 덕분에 아서는 알른에서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정말 편하냐? 밤이고 낮이고 바깥에서 사람 죽는 소리가 나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지 않나.”
기사들의 곡소리라면 작년 겨울 훈련을 받을 때 지겹도록 들었다.
이제와서 다시금 귀에 새긴다 한들 거슬림은 없다.
오히려 우월감이 생긴다.
다른 이들이 개처럼 구를 때에 나는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다니.
이처럼 책임 없이 권리만 누릴 수 있는 것이 권력이라면 쥐고 싶단 생각이 들 지경이다.
– 그럼 왕하면 되겠네.
“그 자리는 권리고 나발이고 책임만 짊어져야 하는 곳이지 않나.”
잠시나마 1왕비가 떠맡은 살인적인 업무의 양을 확인한 아서다.
1왕비가 과다한 업무를 자처한 것도 있겠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왕의 자리에 올랐다간 홀로 사색할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을 터.
– 다른 놈들한테 떠넘기면 되지. 그래서 다 왕을 하고 싶어하는 거잖아.
“난 그럴 수 있는 성미가 아니다.”
은근슬쩍 왕이 되는 게 어떠냐 설득하는 조각의 말을 무시한 아서는 창 바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르텐 공작가에 보낸 사신이 빨리 돌아오면 좋으련만.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될 것 아닌가.
이유 모를 초조함을 느끼며 혀를 차던 아서는 입구로 들어오는 남자 둘의 얼굴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공식석상에서도 같은 자리에 서 있질 못하는 작은 형님과 큰 형님이 어찌 이 곳에?
현실성 없는 인선에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뜬 아서는 두 사람이 저택의 문 앞에 도착한 걸 확인하고서야 현실을 인정하고 다급히 아래로 향했다.
“오랜만이구나! 아우야! 아직도 나보다는 작구나!”
“작은 형님께서 너무 크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건 그렇지. 큰 아우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정도니.”
“단련의 성과 아니겠습니까!”
아서는 이전과 같은 껄끄러움 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을 끔뻑이다가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서 두 분.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우야! 왕자들이 모여서 할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느냐?! 나라와 왕권에 대한 것이지!”
“…작은 형님. 이미 두 개가 되었습니다만.”
“어? 그렇네?”
“이 바보의 말은 적당히 흘려들어라. 내가 널 만나러 온 건 1왕비님. 그래. 내 어머님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