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칼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진정하자. 내가 어제 말을 걸고 다닌 애들이 한 둘이야?
알고 보면 칼이 형편없는 퀘스트를 가지고 왔을 수도 있잖아.
설레발치지 말자.
기대하면 오히려 배신감이 커지는 법이야.
‘칼. 그 부탁이라는 게…’
“허접. 그 부탁이라는 게 뒷골목 폐가에서 물건을 가져와 달란 부탁이야?”
“네. 맞습니다.”
‘그럼…’
“그럼 열쇠도 받았어?”
“알고 계셨던 걸 보니 이게 아르마디의 계시가 맞았나보군요.”
칼은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품 안에서 녹이 슨 철 열쇠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를 받은 순간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 띠링
[여학생의 부탁]
[폐가에 들어가 여학생의 물건을 찾아와 주세요]
[보상 : 30실버]
설레발치지 말긴 뭘 설레발 치지마야!
칼! 잘했어!
내 스토커 노릇만 하는 허접기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언제나 날 생각하는 충직한 기사였구나!
너무 기뻤던 나머지 뛰어 들어 칼을 안고 싶단 생각을 했지만 메스가키 스킬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메스가키 스킬은 내 몸을 움직여 칼의 앞으로 가더니 당당히 손을 위로 뻗었다.
나는 이게 무슨 동작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칼은 달랐다.
그는 내가 움직이는 걸 보자마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칼의 머리가 정확히 내 손이 닿는 곳에 도착했다.
아니. 잠깐만. 어?
내가 무어라 생각을 하던 간에 메스가키 스킬은 제멋대로 내 몸을 움직였다.
나의 손이 칼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야. 지금 개 취급당하고 있는 건 알지?
칼 너는 충직한 기사가 아니라 충견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 거야?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웃는 얼굴에 초를 치는 것 같아 입으로 꺼내진 않았다.
‘고마워요. 칼.’
“허접치고는 노력했네?”
“아뇨. 기사로써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 큰 성인남성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현자타임이 절로 차올랐지만 난 애써 그를 무시했다.
다른 생각하자. 다른 생각.
그래. 퀘스트에 대한 생각을 하면 적당하겠다.
소울 아카데미에서 처음에 받을 수 있는 퀘스트인 여학생의 부탁은 보상만 보면 별 것 아닌 퀘스트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퀘스트의 진면목은 여학생이 주는 보상이 아니다.
뒷골목의 폐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 건물 안에는 숨겨진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거든!
원래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레벨 10을 찍고 숙련도 작을 한 후에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지만 지금 난 그 작업이 다 되어 있네?!
완벽해. 오늘 저녁에 바로 들어가야지.
퀘스트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새로운 의문 하나가 생겨났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칼이 이걸 어떻게 받아 온 거지?
이건 여학생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퀘스트인데? 가
문이나 수련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칼이 그 애한테 말을 걸었을 리도 없고.
‘칼…’
“허접. 너 이 부탁은 어떻게 들은 거야?”
“그거 말입니까?”
내가 물음을 던지자 칼이 신이 나선 대답을 해주었다.
어제 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여학생이 우연히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고.
그래서 길을 묻는 척 하며 곤란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그랬더니 다음 날 저에게 찾아와선 고민을 이야기하더군요.”
칼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빈부격차가 느껴졌다.
내가 말을 걸 때는 엄청나게 경계했는데.
칼이 말을 거니까 바로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러 왔단 거야?
너무하네 진짜.
내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어휘가 좀 공격적이긴 하지만.
평판은 더더욱 안 좋긴 하지만.
초면인 건 나나 칼이나 마찬가지잖아.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다고 칼은 바로 신용해 주는 거야?
외모냐? 외모가 문제인 거야?
칼이 확실히 잘 생기긴 했지.
아이에게 말을 거는 걸로 울음을 터트릴 수 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짓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깟 외모가 네가 지닌 경계심을 완벽히 무너트릴 정도로 커다랬던 거냐?!
칼의 얼굴이 최면어플도 아니고 무슨!
억울해.
누구는 말만 걸어도 경계를 당하는 데 누군 말만 걸면 호감도가 오르다니.
“아가씨. 슬슬 사람들이 오는 것 같군요.”
칼은 그리 말을 하더니 내 손에서 조심스레 벗어나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아는 척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른 가문의 기사인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지라.”
‘맘대로 해요.’
“꼴리는 대로 해. 허접.”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일어나서 다시 수업 준비를 하러 가자마자 교실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당혹스런 기색을 보이더니 나와는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평생 받을 수 없을 줄 알았던 퀘스트를 받은 거니까 기뻐하는 게 맞을 텐데 왜 내 가슴은 공허한 걸까.
다행히 이런 기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 표정이나 말투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의 파괴자가 등장했기 때문에.
“너도 이거 들어?”
프레이는 교실에 들어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히 웃으며 달려 왔다.
그녀가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뭘 지는 너무도 뻔했다.
나랑 대련을 하는 걸 기대하고 있는 거겠지.
안톤 교수가 맡은 전투학 수업은 대련을 통해 실력을 늘리는 곳이니까.
귀찮지만 어찌 보면 잘 된 일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서 대련하자면서 달라붙는 걸 떼어내는 것보단 지금 대련을 해주는 편이 낫잖아?
옆에서 제멋대로 조잘조잘 떠드는 프레이의 말에 대충 대꾸를 해주던 중 한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메스가키 스킬이 조무래기 영식이라고 불렀던 것 이외엔.
뭐. 상관없나?
어차피 메스가키 스킬이 조무래기라고 부를 건데 내가 속으로 어떻게 부르던 똑같잖아.
“안녕하십니까. 알른 영애.”
‘안녕하세요. 조무래기님.’
“안녕. 조무래기. 멀쩡해 보이네?”
“덕분에 말입니다.”
조무래기가 나한테 인사를 하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대개는 호기심이었고 일부는 걱정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거는 게 그렇게 특이한 일인가?
가만 생각해 보다 오늘 나한테 말을 건 사람이 손에 꼽다는 걸 떠올리곤 특이한 일이 맞단 걸 인정했다.
“감사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지난번엔 경황이 없어 편지로만 인사를 드렸지만 아무래도 얼굴을 보고 말씀을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조무래기는 그리 말을 하더니 땅에다 이마를 댈 정도로 깊게 고갤 숙였다.
“감사드립니다. 알른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인사를 하는 진 알고 있었지만 내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 일은 나 때문에 생긴 거였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소심하게 인사할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조무래기 답네. 신경 쓰지 마. 너 때문에 힘낸 거 아니니까.”
“아하하. 그래도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건 마찬가지니까요.”
*
“야. 미쳤어?!”
제이콥 리즈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절친한 친구인 해리 소버가 기겁을 하며 제이콥에게 소리쳤다.
“왜?”
“왜?! 알른 영!… 알른 영애한테 왜 말을 거냐.”
해리는 친구에게 따지듯 소리를 치다 구석에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한 루시 알른의 눈치를 보곤 말소리를 줄였다.
“그야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인걸.”
제이콥은 그 지옥같던 곳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그 던전에서 루시 알른이 없었다면 제이콥은 이 자리에 서있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저 사람 소문이 안 좋잖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해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속삭이듯이 말하자 제이콥이 헛웃음을 흘렸다.
맞다. 루시 알른은 소문이 좋지 않다.
사교계에 나가 본 귀족 가문의 자제라면 누구나 루시 알른의 악명에 대해 들어볼 지경이니 당연 제이콥도 그에 관해 알았다.
그렇지만 제이콥은 그 말을 모두 믿지 않았다.
워낙에 이야기가 많으니 모든 게 거짓이진 않겠지만 대부분은 오해일 거라 생각했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위험에 달려드는 사람이 그렇게 나쁜 인간일 리가 없잖은가.
“대부분은 오해일 걸.”
당장 알른 영애가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1등을 차지함으로써 공부를 못한단 소문이 거짓인 게 밝혀지지 않았나.
분명 그런 악의적인 소문이 여럿 있을 거라고 제이콥은 생각했다.
“어쨌건 가까이 가지마. 지금 알른 영애가 3왕자님한테 찍혔단 소문이 허다하다고.”
“3왕자님이?”
“그래.”
괜히 가까운 체 했다가 같이 왕자님한테 찍히면 큰 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해리의 호들갑엔 진한 걱정이 묻어나 있었다.
알른 영애.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또 무슨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제이콥이 해리에게 소문에 관해 더 자세히 물으려면 때에 전투학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으라는 듯 발소리를 내며 등장한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안을 둘러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전투학 교수인 안톤입니다. 여러분에게 싸우는 방법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죠.”
“아시겠지만 이 수업은 학생들 사이의 대련을 통해 경험을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구체적으론…”
안톤 교수가 앞에 나서 길게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반응은 애매했다.
그를 본 안톤 교수는 헛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이야길 했다.
“음. 이해하기가 어려운가요? 직접 보여주면서 이야길 하는 게 좋은데 혹시 앞에 나서서 대련을 해 줄 분이 계십니까?”
안톤 교수가 그리 말을 하자 마자 학생들 중에서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프레이 켄트.
대대로 뛰어난 검사를 배출했던 켄트 백작 가문의 영애이자 차기 검성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알려진 재능의 소유자였다.
“루시 알른이랑 대련할게요.”
“허접 검사.”
“하기로 했잖아?”
“나랑 싸우면 네 검술이 얼마나 허접한 지 알게 될 텐데 괜찮아?”
“겁 먹었어?”
“내웃기는 소리네. 네 허술한 검에 당할 정도로 내가 약해 보여? ”
프레이와 루시의 신경전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저 사이에 괜히 관심을 보였다가 어떤 꼴이 날지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프레이와 루시가 앞으로 나오자 안톤 교수는 달갑다는 듯 웃었다.
“이번 입학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무인 둘이 나서줄 줄이야. 반가운 일이네요.”
둘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자세를 잡는 걸 보고는 해리가 제이콥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냐?”
“알른 영애.”
“너 진짜 세뇌라도 당했냐? 켄트 영애가 대련에서 질 리가 없잖아! 켄트 가문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는 사람이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해보면 해리의 생각이 옳았다.
여태 왕국에서 있었던 여러 대회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우승했던 프레이 켄트다.
알른 영애가 아무리 입학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한들 프레이 켄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허나 제이콥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나도 알지만 알른 영애가 이길 걸? 내기해도 좋아.”
“내기? 콜. 나는 1골드 건다.”
“그거 한 달치 식사비아냐?”
“쫄리냐?”
“아니.”
제이콥은 던전 안에서 마녀의 모양새를 한 괴물을 압도하던 루시 알른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만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진다?
제이콥은 도저히 그런 광경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내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