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1
자신의 부하였던 이를 찾으러가는 카리아의 표정엔 시종 웃음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 내가 왕국에서 쫓겨 다닐 무렵에 앞장서서 날 조지려고 했던 게 그 년이거든. 조질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왕국 정보부 측의 간부가 된 게 그 여자인지라 공격을 하기 어려웠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카리아가 쌓아가고 있는 정보망이 왕국 측에 의해 와해될 가능성도 높았으니까.
“이젠 내 쪽도 자리가 잡혔고 뒷배도 꽤 쌓였으니 들이박으려면 언제건 들이박을 수 있도록 준비도 해뒀었어. 남은 건 타이밍이지. 언제 어떻게 그 년을 조져야 완벽한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자기를 죽이려 한 상대라는 원한은 분명 클 테지만 카리아의 울분은 그걸로 끝날 게 아닌 것 같아. 그것보다 커다란 무언가가 있어.
“고용주님이 직접 조지는 거라면 더할 나위 없지! 꼴 받다 못해 애새끼처럼 울게 만들어버려!”
일단 서로의 목적은 일치하는 것 같으니까 굳이 캐묻지는 않겠지만. 잔뜩 신이 난 카리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왕국 수도의 뒷골목이었다.
워낙에 외견이 눈에 띄는 나라 얼굴을 숨겨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카리아는 고갤 저었다.
“이 쪽은 뉴먼 가문의 세력권이야. 커즈 그 꼬맹이가 이런 건 잘하거든.”
여기에 나 대신 칼이 의문을 표했다.
“왕국의 권력자가 이를 허용합니까?”
“뉴먼 가문의 세력이 워낙 넓게 퍼져 있으니까. 어느 정도 용인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택했어.”
왕국 정보부 입장에서도 꽤 중요한 곳이라 말하며 앞장 서서 걷던 그녀는 한 건물 앞에서 발을 멈췄다.
“저번에 고용주님이 커즈 목줄을 쥐어줬잖아? 그래서 그 썅년이 여기에 처박히도록 만들었어.”
“그 병신년은 아줌마가 수작질 부린 걸 몰랐어?”
“알았지. 근데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커즈가 대놓고 그 년을 지목했는데 어쩌겠냐. 진짜 어이가 없다니까. 내가 있을 적엔 웃음만 지어줘도 알아서 기었는데 이젠 커즈가 갑이 되다니.”
그건 네가 너무 유능했던 게 아닐까. 움직이는 것만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히는 초능력자와 비교당하면 누구라도 무능아가 될 것 같은데.
쾅!
“가네린! 썅년아! 튀어나와!”
내가 무언가 행동을 하는 것보다 먼저 카리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선 핏대를 세웠다.
“안에 처박혀 있는 거 다 알아! 낡아빠진 퇴물 년아!”
엥? 아니 이게 뭐 하는. 우리 첩보전 하는 거 아니었어?
종이박스가 튀어나올 것 같은 잠입 끝에 목표를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냐고!
“…카리아님? 상대가 바보도 아니고 이런다고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요.”
“괜찮아. 나올 수밖에 없어. 내가 뉴먼의 목줄을 붙잡고 있는데 어쩔 거야? 엉덩이가 아무리 무거워도 튀어나와야지.”
카리아가 우리를 안심시키는 동안 건물 안에 있던 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킨다.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게 여기 있는 하나하나가 왕국의 정보부 소속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전 정보부장. 여긴 당신이 올 곳이 아닙니다.”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아저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하게 고했지만 카리아는 코웃음으로 답했다.
“야. 나이 처먹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냐?”
“되긴 했지요.”
“그래? 그럼 덤벼봐.”
카리아 얘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 아직 잃어버린 힘을 되찾은 건 아니잖아. 전면에서 맞붙으면 곤란한 건 너 아냐?
고갤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카리아가 다급히 내 뒤에 서선 목소리를 높였다.
“알른의 존귀한 영애를 건드릴 수 있다면 말야!”
“퇴물 아줌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여태까지 고용주님을 위해 해준 게 얼만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건 그런데.
더 이상 말해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한숨과 함께 앞으로 나섰더니 정보부의 이들이 곤란하단 기색을 보였다.
뭐야. 안 덤벼?
“진짜 병신들밖에 없네. 식은땀 줄줄 흘리는 것 좀 봐.”
“이 허접들 뭐 하는 거야?”
“얘네 1왕비 직속이거든! 그 미친 년이 마음에 들어하는 고용주님한테 상처라도 입혀봐! 그 날로 소리소문 없이 증발하게 될 걸!”
“무엄하다! 감히 1왕비님께 그딴 호칭을!”
“알겠으니까 덤비라고. 우리 고용주님이 다 대응을 해주신다잖아.”
“참.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촌스럽네요. 촌년의 한계라는 걸까요?”
콧소리가 잔뜩 실린 목소리를 따라 고갤 들자 술집에서 손님을 응대할 것 같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승권이 밀려서 버려진 불쌍한 년보다는 낫지 않아?”
“입을 줄이겠단 이유로 버려진 고아보단 낫죠.”
“정말? 그런 것치고는 예전에도 지금도 넌 내 아래를 기고 있잖아. 고아보다 못한 귀족이라니. 얼마나 무능한 거야?”
“아래요? 혼자 세상을 거꾸로 사시나요? 제가 위에 있는데?”
얼굴. 목소리. 하는 짓거리. 정확하게 일치하네.
콧노래를 부르며 신성을 끌어올린 난 폴짝 뛰어오르는 것으로 썅년 앞에 도착했다.
카리아와 말다툼을 하는 데 집중하던 그 년은 내가 바로 앞에 오고 나서야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이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이런 예쁜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정신이 흐릿해졌구나?♡ 그럴 나이인 거 같긴 해♡”
망설이는 걸 보아하니 다른 허접들마냥 날 건드릴 수 없는 모양이네.
“망가진 물건은 어떻게 고쳐야 하더라~♡”
“알른 영애.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아♡ 생각났다♡”
주춤하며 물러서는 썅년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
자그마한 주먹에서 전해진 충격이 복부까지 닿았다는 냥 썅년이 헛구역질을 했지만 난 저게 연기란 걸 알았다.
손맛이 별로였는걸.
뭐. 아무래도 좋아. 자기가 알아서 엎드려 줬으니 사용을 해줘야지.
당연하다는 듯 그 등에 앉은 나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약한 떨림을 느끼고 비웃음을 흘렸다.
“이 소파는 좀 별로네~♡ 이상한 냄새도 나고~♡ 가죽이 늘어져서 그런가 촉감도 별로고~♡”
“그…렇습니까?”
“주제파악 못하고 부들대는 것도 별로♡ 가구로 삼아주겠다면 고마워해야지 왜 목소리를 떠는 거야?♡”
짜증을 담아서 엉덩이를 후려쳤더니 떨림이 한층 더 커졌다.
이야. 안마의자가 따로 없네. 베네딕한테 효도선물로 줘야겠는걸?
“이제 좀 기억이 돌아왔어?♡”
“…그 때 그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이거 얼마나 낡은 거야?♡ 왜 때려도 고쳐지질 않아?♡”
짜악! 다시금 엉덩이를 후려치는 소리가 건물을 가득 채움과 동시에 카리아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이 도화선을 당긴 걸까. 얌전히 엎드려 있던 썅년이 갑작스레 내 발목을 붙잡았다.
“적당히 하시죠. 알른 영…”
다리에 힘을 주는 걸로 손아귀를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썅년의 머리를 붙잡아서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쌍년의 얼굴이 나무판자를 부수고 들어간다.
“고장이 심하게 났네~♡ 뒷방에 처박힌 퇴물년 주제에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썅년아. 네가 귀찮은 건 네가 지닌 지위 때문이야.
정보부라는 방패가 없으면 너는 잡몹 이하란 걸 왜 몰라?
“속에 걸린 거미줄도 못 떼는 년이 뭘 하겠다고♡”
발로 머리를 짓밟아 바닥을 무너트렸다. 그렇게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나는 코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썅년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허접견. 방해하는 놈이 생기면 거세시켜버릴 거야.”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로막겠습니다!”
*
버로우 공작가문을 찾은 르네와 아서는 자칼 버로우가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단 이야기를 듣게 됐다.
카리아의 아래에서 배울 사안이 너무도 많아 저택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를 듣고 한탄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했다.
“두 분께서 말씀하신 바가 사실이라면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사태겠지요. 이해했습니다. 만약의 때를 준비하고 있도록 하죠.”
버로우 공작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선선히 고갤 끄덕였다.
“저희의 말을 믿으십니까?”
“당신께서도 느끼셨듯 다소 허황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허나 전 이미 그보다 더한 일을 겪어 보았고, 상식에서 벗어난 이에게 구원받기도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그 분과 함께하심을 아는 한 전 여러분들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르네도, 어렴풋이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아서도, 버로우 공작의 말에서 떠올린 건 같은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확언을 받은 두 사람은 그렇게 저택 바깥으로 나왔다.
“루시 알른이 바꾼 것이 많구나.”
“그 녀석이 의도하고 한 일은 아니지만요.”
“정말 그럴까?”
르네는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던 루시의 얼굴이 선했다. 그녀라 해서 르네라는 존재가 소중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르네에게 소리를 내지른 건 자신의 간절함보다 타인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일 터.
어투와는 별개로 속이 깊은 아이다. 나와 있었던 일을 잊었단 걸 애써 외면한다면 고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 형님.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신 듯 합니다만.”
“그러는 너도 말이다. 루시 알른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없느냐?”
그리 생각이 깊은 사람이 아니라 말하려던 아서는 자신을 구원해 준 루시 알른의 행동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한 두 번이야 우연이라쳐도 이만큼 많은 이들을 도와준 것이 우연일리는 없잖으냐.”
“그건… 그렇군요.”
알른 가문으로 향하는 길에 우연찮게 만난 조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르네의 손을 들어줬다.
“3왕자님은 평가가 너무 박해요. 루시한테 그렇게 도움을 많이 받으셨으면서!”
“아니 그치만.”
평소에 그렇게나 가지고 놀아지는데 좋게 평가를 하긴 어렵잖으냐 말하려던 아서였지만 조이와 르네가 한 편이 된 이상 그 주장은 무의미했다.
“파트란 가문은 전적으로 협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요정여왕님께서 1왕자님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려주셨거든요.”
“혹여 요정여왕님께서 네게 연애담을 늘어놓았느냐?”
“어떻게 아셨어요!?”
“그. 미안하구나.”
“네? 왜 사과를 하시나요? 전 엄청 즐거웠답니다!”
글로 적힌 것과 입으로 전해 듣는 건 아예 달랐다며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조이는 참으로 소녀스러웠다.
이걸로 커다란 문제는 다 해결됐고 이젠 루시 알른이 카리아와 함께 돌아오기만 하면 돼.
“음침 왕자님. 어딜 그렇게 쏘다니시나요? 방구석에 곰팡이처럼 살던 분이 열심히 돌아다니다간 태양빛에 정화되어 버릴 걸요?”
“늦어서 미안하다만, 네 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는 뭐냐.”
“제게 음침왕자님이 저밖에 모르는 쓰레기라도 음해한 썅년이요.”
“…뭐? 아니. 잠. 너 설마.”
“곰팡이 같은 인간을 쉽게 잊을 것 같아요?”
루시 알른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순간 르네는 기쁘다는 감정과 한 대 후려치고 싶단 감정을 동시에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