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2
썅년을 데리고서 다시금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정정하겠다. 가장 먼저 내게 달려든 것은 얼빠여우였다.
저택 입구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아챈건지 몰라도 내게 달려든 그녀는 내 얼굴을 향해 뛰어오르다가 목덜미를 붙잡혔다.
“하악. 이 향취! 이 날 선 눈! 이 짜릿짜릿한 느낌! 이는 분명 루시…!”
얼빠여우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중얼대는 걸 듣던 난 팔을 뒤로 쭉 재꼈다가.
“어라? 루시야. 이게 대체에에엑!?”
그대로 허공을 향해 얼빠여우를 내던졌다.
평범한 생물이라면 그대로 떨어져 죽을 높이까지 올라갔지만 숲의 주인인 저 녀석이 저 정도로 죽진 않겠지.
아쉽다니까. 제발 좀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우리 딸! 돌아왔느냐?!”
“네에. 돌아왔답니다. 무능한 멍청이 아버님.”
얼빠여우의 감금에 실패한 걸 질책하려던 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날이 선 어투에 놀랐다가 내 감정이 잔뜩 날이 서 있단 걸 깨닫고 멈칫했다. 섬에서 루시의 기억을 읽은 여파인가.
“루. 루시야?”
입을 여는 순간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게 뻔했기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응접실 안에 들어갔다.
뒤에서 베네딕이 카리아를 붙잡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게 들렸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내가 해명하겠다고 입을 열었다간 사춘기 여자애마냥 베네딕한테 달려들텐데, 저 딸바보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간 삼일밤낮을 울다가 기절할 거 아냐.
여기서 제멋대로 오해하게 두는 편이 나아. 포박해 온 썅년을 내던지고서 그 위에 자리 잡은 나는 턱을 괸 채 지금 내 마음의 혼란에 대해 생각했다.
겨울에 베네딕과 대화를 나눌 때랑 비슷해. 내 감정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느낌.
<용사가 말하길 던전의 끝에서 보았던 건 네 내면의 목소리라고 했다. 네가 혼란스러워 하는 건 그것 때문이지 않으냐?>
내면의 목소리.
내 경우에는 루시의 목소리겠네.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짙은 걸 보면 루시는 사라진 게 아닌가?
그냥 깊고도 깊은 잠에 빠져있을 뿐인 걸까?
내 안의 루시 본인을 마주한 적이 없으니 뭐라 확언을 못 하겠네.
그렇지만 루시가 남아있다면 기쁠 것 같다. 모든 게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단 소리니까.
<예전의 베네딕이 그리 좋은 아비는 아니었나보구나.>
‘아뇨. 그 때도 좋은 아버지였어요. 제가 못된 딸이었을 뿐.’
아마 루시라면 이렇게 이야기했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문 틈새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인간의 형상을 한 얼빠여우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집어던진 게 그리 열이 받았던 거냐.
내 입장에선 자비로운 대응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먼저 약속을 어긴 건 네 쪽이잖.
“…부럽다!”
아. 나한테 열이 받은 게 아니구나.
내 아래 깔려 있는 이 썅년을 질투하는 거네. 정말 한결같다 생각하며 짜게 식은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우악스런 손아귀가 그녀를 가로채갔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나는! 나는 루시 성분을 더 보충해야해애애애!”
“닥쳐라! 네 년 때문에 루시가 날. 나아아알!”
문 바깥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이들이 알른 가문으로 돌아왔다.
조이. 아서. 그리고 르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주하는 것조차 곤욕스러웠던 얼굴이거늘, 섬에서 보았던 루시의 기억이 그에게서 반가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음침 왕자님. 어딜 그렇게 쏘다니시나요?”
아냐. 그것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야.
“방구석에 곰팡이처럼 살던 분이 그리 돌아다니시다간 태양빛에 정화되어 버릴걸요?”
뭣도 모른 채 지껄였던 말들이 부끄럽고, 외로움에 달라붙었던 과거들이 거북하고, 흑역사로 치부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는 탓에 르네라는 사람 자체가 껄끄럽고, 그럼에도 반갑고 다시 대화를 나누고픈.
“늦어서 미안하다만, 네 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는 뭐냐.”
“제게 음침왕자님이 저밖에 모르는 쓰레기라고 음해한 썅년이요.”
분명 루시에게 르네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르네를 밀어냈다. 자신의 욕심보다도 르네의 미래를 더 우선시했다.
“…뭐? 아니. 잠. 너 설마.”
“곰팡이 같은 인간을 쉽게 잊을 것 같아요?”
루시에게서 비롯되는 감정은 따스했다.
“잊어버린 게 아니었느냐?”
“순진하시네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만 넌.”
허나 나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은 뜨거웠다.
단적으로 말해서 여자를 뺏기고 자기 무능력을 한탄할 것 같은 이 새끼가 거슬렸다.
“푸하핳♡ 그래서 잔뜩 심술을 부리셨군요?♡ 솔직하시네요♡”
“그…게.”
루시가 일부러 자기를 떨쳐냈단 걸 르네는 알고 있었을 거다.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이 새끼는 열받지만 유능함만큼은 진짜니까!
그런데도 르네는 다시 루시를 만나러 오긴 커녕 왕궁에 틀어박혀서 찌질거리기 바빴다!
남자새끼면 오해를 풀려는 시도는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왜 바로 포기하는 건데! 너한테는 루시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상대였냐!
“솔직하게 말하면 됐을 텐데 일부러 찾아와선 눈치나 주시다니 참 찌질하시네요♡ 그러고도 남자신가요?♡”
“…그.”
“설마 제가 그 때처럼 친절하게 대해줄 걸 기대하셨나요?♡ 왕궁에 처박혀 있으시다 보니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셨네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찌질이왕자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안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허락 못 해! 너처럼 끈기 없는 남자를 루시에게 줄 순 없다!
암! 절대 안 되고 말고!
“몇 년이나 방치해도 꼬리를 흔들어줄 애완동물을 바라셨나요?♡ 제가 왕왕하며 짖어주길 원하셨나요?♡ 안 됐네요♡ 그런 건 당신이 몽정할 때 꾸는 꿈에서나 등장하는 거랍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비아냥에 창백해진 르네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 중심을 잃었다. 다급히 그의 몸을 받아낸 아서는 기겁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만! 형님의 정신력은 이미 한계다! 이 이상 하면 죽어버리실 게야!”
“잘 됐네요♡ 제발 뒈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딴 분이 절 애틋하게 여기는 게 너무 소름끼치잖아요♡”
“…그래. 맞다. 내가 죽는 편이.”
“형님! 진정하십시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를 나누어야죠!”
절망에 짓눌린 르네를 아서가 설득하는 동안 조이가 다급히 내 옆으로 다가와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행동은 내 손에 저지당했다.
“얼빵이 변태네? 내 피부에 그렇게 닿고 싶었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설마 내가 아니라 저 찌질이 왕자님 편을 드는 거야?”
“아뇨! 전 언제나 루시 편이죠! 1왕자님이 어떻게 되는 제 알 바에요!?”
“조이!? 넌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게냐!”
내 감상도 아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
“솔직히 저도 1왕자님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루시는 제 거라고요!”
“…뭐?”
“그치만 1왕자님을 쫓아내는 건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해주세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 잠. 뭐? 방금 전에 조이가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자기 거라고? 조이가 한 말을 되새기고 있자니 당혹이 분노를 걷어차버렸다.
“이건 재밌는 정보네요. 설마 파트란 영애께서 그런 취향일 줄은.”
곁에 있던 카리아가 실실거리자 조이가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깨달은 듯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전 그냥 루시가 제 친구로서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단 의미에서!”
“괜찮아요. 파트란 영애. 귀족 중에서 그런데 관심이 있는 이들이 꽤 많거든요.”
“아니란 말이에요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일은 제 가슴 속에만 묻어…”
이성이 증발한 조이가 수십개의 마법진을 그리자 카리아가 다급히 말을 바꿨다.
“농담입니다. 농담. 분위기가 너무 무겁길래 장난을 친 겁니다.”
“거기에도 정도가 있어요!”
“죄송합니다. 파트란 영애. 고용주님과 편하게 지내던 탓에 주제파악을 못했습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카리아가 정색하고서 고갤 숙이자 조이도 자신의 마법진을 하나 둘 지웠다.
“그. 괜찮습니다. 저도 잠시 흥분했네요.”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영애.”
재차 고갤 숙인 카리아는 르네 쪽으로 다가가선 무어라고 속삭였다.
무슨 말을 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리아가 입을 열 때마다 안색이 회복한 르네는 모든 말이 끝났을 즈음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미안하군. 잠시 추한 모습을 보였다.”
“헤에? 그게 추한 정도로…”
“고용주님. 거기까지 하자. 우리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거든?”
카리아의 주도 하에 탁자에 둘러앉은 우리는 얌전히 카리아가 대화를 이끌어가길 기다렸다.
“방금 전에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만, 1왕자님. 국왕폐하께서 서거하셨으며 1왕비가 이를 감추고 있단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요정여왕님과 내가 두 눈으로 보았다.”
어? 뭐? 왕이 죽었다고?
벌써? 아직 그 이벤트까진 시간 많이 남은 거 아냐!?
3학년이 되어서야 벌어질 이벤트가 왜 벌써 일어난 건데?!
아니. 그 전에 1왕비가 그걸 숨기고 있었다고? 왜!?
“정신의 이상이 생긴 게 분명한 1왕비가 뭘 할지 모르기에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시고요.”
“세 공작가문의 협력은 구했다.”
“그럼 저희 쪽에서 뉴먼 가문과 협력해 자잘한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거면 되죠?”
저기요.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부외자도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를 나눠주시겠어요?! 저 지금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그냥 가만 있어라. 나중에 설명해주겠지.>
‘그치만 뭔가 소외된 느낌이란 말이에요!’
<그걸 아무렇지 않은 듯 넘기는 게 어른이다.>
할아버지의 말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카리아가 내 겨드랑이 쪽에 손을 집어넣더니 그대로 나를 들었다.
“아줌마.”
“아하하.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 고용주님 왜 이렇게 가벼워? 근육은 어디로 간 거야?”
“그렇게 매도 당하고 싶어?”
“미안!”
사과의 말과 함께 날 의자 위에 올린 그녀는 내 아래에 깔려 있던 썅년의 머리끄댕이를 붙잡아 올렸다.
“운이 좋았네요. 이 썅 년이 1왕비 직속 정보부거든요. 나름 지위 있는 녀석이라 아는 게 많을 거에요.”
“용케도 붙잡았군. 자기 보신에 환장하는 녀석인데.”
“그걸 지워버리는 능력자가 제 옆에 있어서요.”
히죽 웃음을 지은 카리아는 썅년의 뺨을 때려 그녀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