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4
응접실 구석에 자리 잡은 세실은 온 몸으로 자신의 울적함을 드러냈다.
아서와 르네가 최선을 다해 그를 위로했지만 한 단어와 비웃음으로 인해 박살나버린 자존감이 어디 그리 쉽게 세워지겠는가.
옷을 다시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큼은 여전히 발가벗겨진 세실에게선 이전의 당당함도 거만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루시야. 네가 여자라 잘 모를 수도 있다만 크기에 대한 내용은 남자에게 무척 민감한 사안이다.>
저도 알거든요!? 여자가 된 지 아직 1년 밖에 안 된 저에요! 작다라는 말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제가 어떻게 모르겠냐고요!
<그러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네 잘못이다.>
‘저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그. 거기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겠냐고요!’
뭔 미친놈이냐고 속으로 생각하긴 했어! 그치만 딱 거기까지야!
단언컨대 다른 사람의 민감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고!
아니. 씹. 상식적으로 고간에 대해서 왜 지껄이겠냐!
내가 메스가키 스킬에 잡아먹혀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상식은 그대로야!
적의도 없는데 해선 안 될 말을 지껄이진 않아!
내 입장에서도 이번 일은 사고라고! 사고!
‘애초에 저 정도면 그리 작지도 않잖아요!’
실루엣을 본 것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감 가질 정도는 되더만! 왜 자격지심에 빠져서 저러는 거야!
<…네가 크기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거니?>
아차! 말실수했다!
“땅콩왕자님은 내버려 두고 이야기 계속 하죠?”
말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또 다른 재앙이 펼쳐졌다.
설마 호칭마저 그걸로 바뀔 줄은!
“…동생아. 검 좀 내놔라.”
“작은 형님! 진정을…!”
“작아? 내가?”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형님이 뭐가 작습니까!”
“이 말이 맞다. 동생아. 작은 건 저 꼬맹이지 네가 아니다.”
“저희 계속 그 이야기 해야 해요!? 그만하면 안 될까요?!”
얼굴이 벌개진 조이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남자들이 헛기침을 하며 본래 자리에 돌아왔다.
원한이 큰 듯 세실은 여전히 날 노려보았지만 난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싸운다 해서 질 것 같진 않지만 내가 먼저 잘못해놓고 내가 박살내긴 좀 그렇잖아.
말을 잘못한 거까지야 실수지만 주먹까지 휘두르면 진짜 나쁜년이 되는 거라고!
“하여튼 그래서 땅.”
“자. 고용주님은 가만 계시고. 2왕자님께서 쿠르텐 공작가문에 다녀오셨다고요?”
자연스레 내 입을 틀어막은 카리아가 나 대신 이야기를 주도했다.
“그랬다. 쿠르텐 공작가문은 명목상 1왕비 파벌에 속해있다만 중립에 가까워. 경우에 따라 설득할 여지가 있지.”
확실히 그쪽은 1왕비 파벌이라기보단 지금은 시체가 된 왕의 지원자에 가까워.
르네에게 미래를 건 다른 공작가에 비한다면 설득의 여지가 충분해.
국왕의 시체가 1왕비의 야욕에 사용되고 있단 걸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쿠르텐 공작은 기꺼이 반기를 들 터.
“그리고 쿠르텐 공작께선 특이한 취미를 지니고 계시지 않나. 문전박대 당할 염려도 없어.”
취미라면.
“도박. 말인가요?”
조이가 조심스레 묻자 세실이 고갤 끄덕였다.
“무슨 수를 써도 상관 없다. 자신이 지닌 걸 내걸고 싸워라. 이기면 바라는 걸 내어주겠다.”
어디 도박 만화의 회장님이 할법한 이야기를 자신의 신념으로 지닌 쿠르텐 공작이다만 그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패배에 승복한단 점이다.
그는 이상한 신념을 지니고 있을 뿐 명예를 아는 귀족이다.
“그 도박에서 승리한 사람은 극소수뿐이라고 들었는데요.”
“나도 알고 있다. 애시당초 이길 생각도 없었어. 형님께 다음을 맡기기 위해 먼저 나섰을 뿐.”
세실은 예상한대로 패배했지만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다.
그 어디에서도 부정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거다.
“형님께서 조언해주신 대로 이것저것 해봤습니다만 무리였습니다.”
“역시 그런가.”
“당연히 못 찾죠. 거기에 부정 같은 건 없거든요.”
의문에 대답해 준 건 카리아였다.
“그냥 그 아저씨가 더럽게 운이 좋을 뿐이에요.”
“단순하게 운이 좋을 뿐인데 그 승률이 나온다고?”
“그리고 자신이 운이 좋을 거란 사실에 한 치 의심도 없으시죠. 자기한테 도박으로 이긴 상대를 존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요. 위대한 신께서 보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가 질 리 없다 생각하시거든요.”
이건 내가 알던 거랑 크게 다르지 않네.
자신에게 승리한 대상에 한해 관대해진다는 저 특성 때문에 게임 속 쿠르텐 공작의 취급은 호구였다.
운이 일정 수치 이상에 도달했거나 특정 스킬을 습득했을 경우 반드시 방문해서 여러 물건을 뜯어내는 게 정석이었지.
나도 매번 게임을 할 때마다 도움을 받았다.
“다른 전략 같은 경우에는 어찌저찌 대책을 만들어보겠다만 단순한 강운이라니. 어렵군.”
“뭐가 어려워? 조금만 놀아주면 돈을 잔뜩 주는 호구 할아버지란 거잖아.”
그리고 이번에도 도움을 받게 될 것 같네.
정말 좋은 호구… 아니. 공작님이셔.
“설탕공작님이랑 놀다올게.”
“네?! 잠시만요! 루시! 자칫 잘못했다간 2왕자님 같은 모습이 될지도 몰라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드는 건 만용이다! 루시 알른!”
“두 사람 말이 옳다! 좀 더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우고 움직여야 해!”
얘네들 도대체 쿠르텐 공작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손녀뻘인 여자애한테 그런 짓은 안 하지.
게임 속에서도 여캐일때는 적정선을 지켰단 말야.
<네 실수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알겠다만 일단 좀 침착하거라!>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요?’
<내 말이 과했다! 내 이리 사죄할 테니 부디 재고를!>
“루시야! 그건 안 된다!”
“그래! 이 덩치 말을 들어라! 네 아리따운 몸을 그딴 노친네한테 보여줘서 되겠느냐!”
“아가씨!”
“아가씨!”
아니 괜찮다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고!
음란마귀 낀 새끼들아!
– 띠링.
[쿠르텐 공작가문에 가지 않기.]
허접주신 너까지 왜 이러는데!
내가 운 싸움에서 지겠냐!?
*
얼마 전 솔라딘의 2왕자와 내기를 한 끝에 승리한 쿠르텐 공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2왕자의 근성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비록 하늘께서 이 늙은이의 손을 들어주시긴 하셨다만 그렇다하여 2왕자께서 보여주셨던 것들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조급함을 감추는 데에 필사적인 분이셨거늘 이젠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셨구나.
실로 기쁜 일이야.
덕분에 흥이 나서 어른스럽지 못한 일을 해버렸어. 그 분의 제안은 거절하는 게 도리였거늘.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하더라도 봐드릴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이야기는 들어드릴까.
설령 내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라 한들 1왕비가 옳지 못한 길을 나아가는 걸 가만 지켜볼 수만은 없잖나.
과거 어릴 적의 1왕비를 떠올리며 고갤 내린 쿠르텐 공작은 찻잔에 비친 자신의 착잡한 얼굴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쿠르텐의 주인이시여! 실례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와라.”
안으로 들어온 집사장의 표정에는 당혹이 역력했다.
나와 함께 온갖 일을 겪었던 이가 이토록 당황하다니 왕자분들께서 다시 도전하러 왔다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겠군.
“무슨 일이지?”
“말로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창 밖을 봐주십시오.”
“창 밖?”
영문도 모른 채 집사장이 하는 말을 따라 고갤 돌린 공작은 저택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면면을 보고서 찻잔을 떨어트릴 뻔 했다.
“알른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로 했나?”
가장 먼저 보인 건 쿠르텐이 생각하는 대륙 최강의 기사 베네딕 알른과 그 휘하의 기사들이었다.
수는 몇 되지 않는다만 두려운 면면들 뿐이군.
알른의 괴물들이 움직일 때는 전쟁에 비견되는 사태가 일어난 순간 뿐일 텐데.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알른 백께서 지닌 성품을.”
“그럼.”
카리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단 말은 들었으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저 자가 엮였다는 건 필시 어떤 계산이 존재한단 소리일 터.
“저건 뭐냐.”
“…알른 가문의 영애를 막기 위해 따라온 이들이라고 합니다.”
“뭐?”
한 여자아이를 막지 못해서 알른의 기사들이 모두 다 따라왔다고? 결정을 강요하기 위해 무력시위를 하러 온 게 아니라?
“파트란의 영애분이나 세 왕자님도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거친 일은 아닙니다.”
“잠시만. 그러니까 알른 영애께서 나와 도박을 하기 위해 찾아오셨고, 다른 분들은 모두 영애의 선택을 만류하기 위해 따라붙은 거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내가 노망이 든 게 분명하구나. 이상한 말이 들려.”
쿠르텐 공작은 솔라딘의 다섯 공작 중에서도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 온 이다. 그만큼 많은 일을 겪어 어지간한 것으로는 놀라지 않는다고 자부할 정도로.
허나 그런 쿠르텐 공작에게도 지금의 사태는 따라잡기 힘든 것이었다.
“일단 나가 보긴 해야겠구나.”
“전투를 준비할까요?”
“아니. 됐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랬다가 피가 흐르면 돌이킬 수 없게 돼.”
자신의 자식들과 가신들을 이끌고서 쿠르텐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자 1왕자가 정중히 고갤 숙였다.
“갑작스레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쿠르텐 공작.”
“아닙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친네에게 관심을 주시니 기쁠 따름이지요. 덕택에 저 아이의 얼굴도 오랜만에 보게 되었잖습니까.”
베네딕은 쿠르텐 공작의 말에 정중히 고갤 숙였지만 기이하게도 그 눈빛에는 날이 서 있었다.
내가 언제 저 치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일을 했던가?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뭔진 모르겠다만 적의를 샀다 가정하고.
이렇게 거창하게 움직인 이유가 뭘까.
1왕비가 쉬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건가?
추후 사태가 벌어졌을 때 어중간한 이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협박하는 걸 수도 있고, 아님 최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무력시위를 하러 온 것일 수도 있어.
“설명을 해주시면 감복스러울 듯 합니다.”
무엇이 되었던 쉬이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쿠르텐은 강자를 존중하나 강자 앞에 허리 숙이는 비겁자들은 아니야.
“그것이 저희는.”
“설탕공작님이랑 놀아주면 부탁하는 거 다 들어준다길래 온 건데요.”
불쑥 튀어나온 루시 알른의 말에 쿠르텐 공작이 입을 연 채로 굳었다.
설탕 공작? 날 말하는 건가?
“가만 있어라! 루시 알른!”
“루시야! 이 파파 말 좀 들어다오!”
“루시! 제발!”
“아가씨!”
진심 어린 다그침을 구경하던 쿠르텐 공작은 집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짜로 알른 영애 하나를 막자고 이 모두가 따라온 거냐!?
“쿠르텐 공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리아. 상황 좀 설명해주겠나?”
“공작께서 2왕자님을 홀딱 벗겨서 보내셨잖습니까. 그걸 본 다른 분들이 도전자 모두에게 그리 대한다 착각하시는 바람에.”
“그게 무슨 음해인가! 내가 미쳤다고 그러나!?”
“저도 설득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말이 안 통해서.”
“왕자님들! 베네딕 알른! 파트란 영애! 이게 진짜입니까?!”
공작이 기겁하며 소리를 내지르자 호명된 이들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2왕자님께서도 제대로 설명해주셨어야죠! 저는 당신을 만류하지 않았습니까!”
“…그. 죄송합니다. 말을 할 틈이 없었습니다.”
“제가 파트란의 꼬맹이도 아니고 이런 오해를 사게 될 줄은.”
얼굴을 꾹 누르고 있던 쿠르텐 공작은 긴 한숨과 함께 손님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그럼 이제 설탕공작님이랑 놀아드리면 되는 건가요?”
“알른 영애. 설탕 공작이란 호칭이 무슨 의미입니까?”
“글쎄요?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세요?”
“잘은 몰라도 좋은 의미는 아닐 듯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