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7
인형이 복원된 후로 왕자는 많은 시간을 인형과 함께 보냈다.
현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세상에 알려주고, 옛스러운 그녀의 말을 현대적으로 고쳐주고, 옷을 사주고, 장신구를 끼워주는 그 모습은 인형에게서 사랑을 느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만일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훗날 큰 문제가 될 수 있단 걸 안 공작이었지만 그는 왕자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가 막지 않더라도 왕자의 사랑은 씁쓸한 추억으로 남을 예정이었으니까.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자와 공작이 지닌 마도구에 대한 이해가 에르기누스라는 천재에 비해 한참 부족했단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 따위의 기술로는 결코 온전히 만들 수 없을만큼 인형이 낡았단 것.
우연의 일치에 의해 다시금 작동하게 된 인형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에 불과했다.
인형의 톱니바퀴에 새겨진 금은 점차 크기를 키워갈 뿐이었다.
왕자는 공작을 만날 때마다 끝에 대한 불안을 내비쳤지만 인형의 앞에서만큼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일상이 연이어진 탓일까.
왕자는 조금이라도 더 즐거운 경험을 선물해야한다 억지를 부리며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셋이 축제날에 몰래 나가 놀고 오잔 계획을 말이다.
둘의 지위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지만 왕자는 억지를 부렸다.
“세이지. 그녀에겐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네!”
어리광을 받아줘선 안 된단 걸 알면서도 공작은 차마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공작도 인형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정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축제날 정해진 시간에 모인 세 사람은 가면을 쓴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폐하께 이 모습을 들키면 제가 무척 곤란해질 듯 합니다만.”
“훗날 왕이 되면 모두 다 갚도록 하겠네!”
“그러한 공수표를 받은 것이 한 가득 쌓여있습니다.”
“…그런가?”
“쿠르텐 공작의 말은 사실입니다. 왕자께선 지금까지 46회의…”
“아니.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하진 말자고. 다 좋자고 하는 일 아닌가.”
가면으로 정체를 숨긴 채 거리로 나온 셋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뒤섞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돌아가게 되면 왜 갑자기 사라진 것이냐며 잔소리를 들을 걸 모두 다 알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병사들이다.”
“순찰…을 도는 건 아닌 듯 하네요.”
“기사도 함께입니다. 두 분.”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추적조가 나타난 것이다.
둘이 잔소리를 듣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인형의 존재만큼은 들켜선 안 됐기에 세 사람은 다급히 발을 움직였다.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그들이 택한 것은 초라한 모양새의 집이었다.
일단 지위로 찍어누르고 추후 보상을 해주겠단 생각으로 무작정 움직였던 셋이었으나 놀랍게도 그 집에 머무르고 있던 건 평민이 아닌 그들의 입장에서도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귀빈 분들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이야.”
주신 교회 솔라딘 지부의 주교.
“여러분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는 체 하고 넘어가야 할 듯 싶군요.”
아직 교황의 자리에 오르기 전, 추기경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 말하며 솔라딘의 수도에 자리 잡았던 현재의 교황은 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께서 어찌 이곳에.”
“본래는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만, 제게도 개인적인 공간은 필요하니까요.”
셋이 당혹 속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누군가 집의 문을 두드렸다. 교황은 눈짓으로 안에 들어가라 한 후 셋이 숨은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누군가 이 곳에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수상한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군요!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병사가 각잡힌 경례와 함께 돌아간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 사람을 보며 교황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무척 곤란했을 겁니다.”
“높으신 분들에게도 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바깥의 병사들이 흩어질 때까지 조금 더 있다 가시죠.”
“배려에 재차 감사를 드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내 온 교황은 세 사람의 얼굴을 살피다 인형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혹여나 해서 여쭈어보는 것입니다만 이 여성분께선 인간이 아니십니까?”
“…그걸 어찌.”
보는 것만으로는 사람과 구분하는 게 불가능한 인형이다.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작품이 들켰단 사실에 놀란 왕자와 공작이었지만 교황은 가벼이 웃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 많은 걸 보게 되는 법입니다.”
“저. 실례가 아니라면.”
“예에. 이 또한 비밀로 하겠습니다.”
“부탁만 드려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저 그 대신 잠깐 여성분을 살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것이.”
“전 괜찮습니다. 왕자님.”
“…그렇다고 하는군요.”
왕자의 떨떠름한 대답에 마법을 살필 뿐이라며 안심시킨 교황은 유심히 인형을 살피다 고갤 주억였다.
“에르기누스님의 것이군요? 허어. 설마 감시자께서 아직까지 남아계셨다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놀란 왕자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감시자에 대해 아십니까?”
“수도의 교회는 계승의 증인이기도 하니까요.”
“교회의 자료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사례는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교회의 기밀은 아무리 왕자님이라 하여도.”
“한 번! 한 번이면 됩니다!”
왕실에선 완전히 소실되어버린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교황에게 달려든 왕자였지만 교황의 대답은 끝까지 같았다.
그 어떤 것을 약속한다 해도 교회의 규율을 어길 순 없다는 단호함에도 왕자가 포기하지 않자 교황이 사정을 물었고 인형의 시선 앞에서 갈등하던 왕자가 결국 진실을 말했다.
“역시 그런가요.”
“알고 있었어?!”
“제 몸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모르는 게 이상하죠.”
인형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왕자가 왕이 되는 걸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라는 말에 왕자가 오열하는 그 모습은 서로의 입장이 정반대가 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도움…입니까?”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 왕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에르기누스님께선 마법과 신성을 융화시킨 위대한 분이니까요. 대마법사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인형이라면 신성마법이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시의 왕자와 공작은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붙잡고자 하던 상태였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아니 세 사람은 당연하단 듯 고갤 끄덕였고, 교황이 펼치는 기적이 인형의 몸에 닿았다.
*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인형의 육신에 혼이 깃드는 모습은 성경 속의 일화가 현실에 구현된 것처럼 아름다웠죠.”
그런 게 신성마법으로 가능한 일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모든 신성마법을 되짚어보던 나였지만 결론은 불가능이란 단어뿐이었다.
<차라리 죽은 자가 부활했단 것이라면 현실성이 있다. 혼이 멀리 떠나가지 않았단 조건하에는 실현이 가능하니까. 그렇지만 혼이 없는 존재에게 혼을 불어넣는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쿠르텐 공작이 무언갈 착각한 걸까요?’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니 필시 그렇겠지. 저건 주신의 권능을 빌리는 성직자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신과 함께하던 시절을 살았던 할아버지마저도 불가능하다 말한다면 의구심을 품을 여지도 없네.
무언가 착각을 한 거야. 쿠르텐 공작이 뛰어난 기사이자 마법사라 해도 신성마법마저 익숙한 건 아니니까.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에르기누스 본인마저도 속여넘긴 것일까.>
‘저희끼리라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에르기누스님 은근히 무능하지 않아요? 결정적인 순간마다 헛짓거리를 하잖아요!’
실력 있는 마법사는 어쩔 수 없이 얼빵해지는 거야!?
천재란 칭호에는 중요한 순간마다 실수한단 패널티가 함께하는 거냐고!
왜 얼빵이고 에르기누스고 결정적일 때마다 잘못을 저지르는 건데!
<그 스승에 그 제자란 것 아니겠느냐.>
‘스승이고 제자고 둘이 만나기 전부터 똑같았잖아요.’
<…확실히 에르기누스가 실수가 잦긴 했지.>
나와 할아버지가 신나게 에르기누스의 뒷담화를 나누는 동안 쿠르텐 공작이 흐뭇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인형이 인형이 아니게 되었으니 굳이 감출 이유가 없죠. 저희는 그녀가 스스로 세상을 마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래뵈도 왕자와 공작이니까요. 사람 신분 하나 만들어내는 것쯤이야 별 것 아니었죠.”
귀족의 신분을 얻은 인형은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인간의 삶을 살게 됐다.
에르기누스의 마법으로부터 태어난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우수함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왕자의 강한 바람과 공작의 지원 덕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왕자님께서 억지를 부리시는 것이었다면 단호히 끊어내려 했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왕자님의 헌신이 인형의 마음마저 녹인 겁니다.”
…자. 잠깐만. 1왕비가 왕을 사랑했다고!? 진짜로?!
왕국의 번영에 미쳐사는 여자한테 인간의 마음이란 게 존재했단 말야!?
경악을 금치 못한 나와 달리 주변 사람들은 당연한 듯 고갤 끄덕였다.
“금술이 좋으셨지.”
“유일하게 1왕비께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분이셨으니.”
“공식석상에서도 항상 손을 잡고 계셨잖나.”
“뭐. 그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카리아마저 고갤 끄덕인다고!?
말도 안 돼.
괴물이라고만 여겼던 적에게 감정이 있었단 걸 깨닫는 것은 실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네 녀석들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다. 1왕비란 작자는 왜 자신의 사랑을 박제한 것이냐.”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얼빠여우도 마찬가지였던 듯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쿠르텐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되살리고자 하는 겁니다.”
“되살린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1왕자님. 인형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왕은 한 사람뿐이거든요. 그녀는 왕국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자신의 하나 뿐인 왕을 되살리려 하는 겁니다.”
*
여느 때처럼 침실에 방문한 1왕비는 말라 비틀어진 왕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아무래도 저희의 재회가 앞당겨질 모양입니다. 위대한 왕이시여.”
인형의 눈에 비치는 국왕의 모습은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는 미라가 아닌 왕위에서 찬란히 빛나던 왕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건 솔라딘을 위하여.”
그리고 영원히 이 나라를 다스릴 당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