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8
공작의 설명으로 1왕비의 의도와 목적이 드러났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그럼 왜 1왕비는 후계에 집착한 거지?”
아서가 말한 게 그 의문이었다. 국왕을 되살릴 것이라면 후계는 필요하지 않잖나.
르네에게만 집착한 거라면 나름의 자식사랑이라 생각하겠지만 1왕비가 진정 르네를 아꼈다면 아서에게서 싹이 보이자마자 르네를 쳐내진 않았겠지.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저도 알지 못합니다.”
“모른다고요? 당신께선 1왕비와 친밀한 사이이지 않으십니까!”
“3왕자님. 그녀에게 있어 전 폐하의 친우일 뿐입니다. 폐하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도구에게 모든 걸 알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랜 기간 알고 지냈던 자신조차 1왕비에게 있어선 도구에 불과했노라 말하는 공작의 표정은 너무나도 침통해서 방금 전까지 따지고 들던 아서조차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얼마 전 만났을 때도 방해하지 말란 이야기를 들었을 따름입니다. 최소한의 정보라고 달라 부탁했지만 거절당했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 간신히 시작한 내기에서도 패배했죠. 정말 제가 아는 것은 이 뿐입니다.”
비통한 고백에 카리아가 고갤 끄덕였다. 방금 전에 공작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란 거다.
나와 마찬가지로 카리아에게 확인받은 이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지닌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던 중 카리아가 어깨를 떨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알 것 같은데.”
“카리아! 그게 정말인가!?”
공작이 퍼뜩 고함을 치자 생각에 잠겨있던 카리아가 느릿하게 턱을 내렸다.
“어디까지나 정황상 증거를 기반으로 말하는 거에요. 추측일 뿐이란 걸 알아주세요.”
“무슨 내용이기에 그리 뜸을 들이는가.”
“말하는 것만으로 제 목이 더럽혀질 것 같은 이야기요.”
카리아가 저렇게 경고하는 걸 보면 1왕비의 목적이 말도 안 되게 더러운 모양이네.
뭘까? 악신의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던 걸까?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주신 쪽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제물의 가치가 커진단 걸 생각해보면 꽤 그럴듯해.
<그건 아니다.>
‘아니에요?’
<제물로 바칠 거라면 후계로 정할 이유가 없지. 괜한 혼란이 생기잖나. 굳이 제물로 택할 것이라면 반대다.>
‘…후계가 아닌 쪽.’
설마 게임 속에서도 1왕비는 르네를 제물 삼기로 결정한 건가?
그렇겠다. 왕국 스토리가 끝을 향해 달려갈 무렵이면 아서가 르네보다 유능하니까. 후계로는 아서가 더 낫다고 여길 법 해.
아. 이제야 게임 속 스토리가 이해가 되네.
1왕비는 왕의 부활을 위한 제물로 르네를 바치려다가 실패한 거야.
어떤 경위로든 르네가 악신과 계약을 맺고 1왕비를 죽인 거지.
그래서 르네가 왕국 스토리 최종 보스가 된 거고.
이 경우에는 자업자득이라고 해야겠네.
자기자식한테 살해당한 건데 전혀 불쌍하지가 않아.
“후우.”
카리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모두와 시선을 맞췄다.
흐흥. 이미 무슨 말 할지 다 알고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네.
다른 사람들이 충격받는거나 구경해야겠다. 내가 팔짱을 끼고서 몸을 뒤로 뺀 순간 카리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국왕폐하께선 영민하신 분이셨지만 강인하신 분은 아니셨습니다. 왕궁의 지원을 받으며 자라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응? 몸이 약하단 말이 왜 나와? 좋은 제물을 바쳐서 그런 것까지 요구할 거란 이야기인가?
내가 고갤 갸웃거리는 동안 주변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조이는 영애를 연기하는 것조차 잊고 두 손으로 입을 가로 막았고, 얼빠여우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으며, 베네딕은 핏줄이 설 만큼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고, 아서는 멍하니 카리아를 바라보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카리아님. 농담이 너무 짓궂으십니다. 어찌 인간이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동생아. 가만 있어라.”
“허나 형님! 카리아님께서 하려는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이면? 국왕폐하께 육신을 바치기 위해 키워진 가축이 되는 거지.”
…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그랬구나. 내 실력이 늘 때마다 1왕비께서 기뻐하셨던 게 그런 이유였나.”
“그 미친년의 목적과 제가 지닌 정보를 기반으로 추측해보면 이게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국왕이 사용할 육신을 만들기 위해 르네를 키웠다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미친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를 넘었어.
“그 정황이란 게 뭐지?”
“요 몇 년간 그 미친년은 정보부를 통해 흑마법사들에게 접근을 했습니다. 뒷세계의 이름 있는 이들과는 모두 다 연이 있다고 봐야겠죠. 얼마 전 저희는 그게 단순히 폐하의 부활을 위함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흑마법사들이 제공한 내용도 혼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요. 죽은 이의 혼을 보관하고 훗날 되살아난 육신에 불어넣기 위한 것이라는 게 본래의 결론이었습니다만 오늘 이 곳에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생각이 바뀌네요.”
카리아는 머리를 쓸어올리고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단순한 소생이 목적이라면 후계를 육성하는 데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죠. 그렇지만 고용주님께서 알려줬듯 미친년의 목적은 영원히 나라를 다스릴 현왕을 만드는 겁니다. 후계 따위 필요치 않아요.”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왕 대신 후계를 현왕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냐?”
얼빠여우가 억측인 거 아니냐고 묻자 카리아가 선선히 인정했다.
“그럴 수도 있죠. 헌데 말입니다. 그 미친년이 즉흥적으로 현왕을 바꿀 것 같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인간의 일이니까.”
“제가 아는 미친년은 결코 그럴 인간이 아닙니다. 그 년은 변수를 허용할 인간이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미친년에게 계승권자의 인격 따윈 아무래도 좋은 겁니다. 당장의 가치가 더 크다면 마음대로 바꿔도 될 만큼.”
어차피 빼앗아버릴 거니까. 카리아가 내린 결론을 들은 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잠깐만. 이럼 내가 게임 속에서 상대했던 최종보스는 르네가 아닌 국왕이 되는 건가?
개과천선했다 믿었던 진엔딩 이후의 르네도 사실 국왕이 연기하는 거고?
아니.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이 경우엔 국왕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거잖아.
자식의 몸을 뺏고 그렇게 해맑을 수 있을 리 없어. 분명 이것도 허접주신이 허접하게 만든 것 뿐이겠지.
“허.”
한참 동안 얼굴을 붙잡고 있던 르네는 헛웃음과 함께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대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난 1왕비, 아니 어머님께 진의를 묻는 것조차 할 수 없겠군.”
“예. 상대가 목적을 이룰 가능성이 생기니까요.”
“그건 저도 큰 형님과 마찬가지겠네요.”
분위기가 너무 무겁다. 공기에 짓눌려서 압사할 것 같아.
도저히 무슨 말을 못 꺼내겠다고! 누가 바보짓 좀 해서 분위기 풀어주면 안 돼!?
난 그런 거 못한단 말야! 괜한 말 꺼내면 참사가 일어난다고!
“허어. 우리 셋이면 상당한 전력이었을 터인데.”
왔다! 바보 녀석!
“땅콩왕자님은 별 문제 없지 않아요?”
“너 또 그 호칭을! 아니 잠. 왜 난 문제가 없단 거냐.”
“그야 부족하시잖아요? 여러모로.”
“오냐. 그리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세실도 빠르게 눈치채고 잘 어울려주네.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니까.
…농담에 어울려주는 거 맞겠지? 이상할 정도로 살의가 잔뜩 담긴 건 어디까지나 의도된 거겠지?
세실의 열연으로 인해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해소된 후 여태 침묵을 지키던 조이가 책상에 시선을 유지한 채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잠깐만요. 카리아님 한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저건 평소의 영애다우려 노력하는 조이도 아니고, 부끄럼 많은 여고생인 얼빵이도 아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마법사인 조이의 편린이야.
“물론입니다.”
“당신의 추측은 분명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의 이식이라는 게 진짜 가능한 일인가요?”
“그건.”
“루시가 말하길 악신 아그라는 끝을 알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혼의 이식은 신의 권능과 관계없이 1왕비의 능력만으로 행해야 하는 일이란 거죠. 진짜 인간의 힘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저 파트란 영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실제로 행해진 기록이 있을 테고 그를 대비하기 위한 방비책도 존재하겠죠. 잘만 하면 소란 없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요.”
이런저런 가능성을 입에 담으면서 중얼거리던 조이는 뒤늦게 고갤 들더니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확인하고 다급히 부채를 꺼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뇨. 파트란 영애. 가치 있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덕분에 직접 1왕비님과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생겼으니까요.”
카리아와 르네가 동시에 칭찬하자 조이가 조심스레 웃음을 지었다.
“카리아. 정보를 모으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뭐라 확언하기가 힘들어요. 실력있는 흑마법사들은 계속 주거를 옮겨다니니까요. 어설픈 녀석들의 의견이라면 얼마든 모을 수 있겠지만.”
“당장은 역할을 분담하지. 쿠르텐 공작. 협력해주시겠습니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
똑똑한 사람들끼리 길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난 조이와 함께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어차피 우리가 저 안에 있어봐야 도움은 안 되니까.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루시. 에르기누스님께 가시려고요?”
“아니. 동정찐따님은 또 찌질한 핑계를 댈 것 같잖아.”
에르기누스는 분명 많은 걸 알고 있고 지금 우리에게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인선이다만 그에게서 바라는 답을 듣긴 어렵다.
신격에 오르면서 수많은 제약을 짊어지게 된 그이니까. 우리가 찾아간다 한들 애매한 이야기밖에 못 해주겠지.
“그럼 누구죠?”
“얼빵아. 기억 안 나? 지하에 처박혀 있던 퀘퀘한 할망구.”
“아드리님. 이었던가요?”
“그래. 외로움을 많이 타는 노친네를 놀려주러 가자. 분명 좋아할 거야.”
“…좋아하는 게 맞나요?”
“그럼! 내가 손을 가져다대기만 해도 엉엉 울 거야.”
내가 그 녀석한테 해준 게 얼만데 이럴 때라도 득을 봐야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