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9
비시가 태어난 집안은 귀족이긴 하지만 귀족의 권세를 함께 지닌 곳은 아니다.
어렸을 적의 비시가 자신이 귀족임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주변의 농민 아이들과 뛰어놀 정도로.
훗날 사교계에 발을 들이며 귀족의 지위를 인식한 뒤에도 비시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과 대화하며 가문의 영세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 그녀의 입장에선 콧대를 세울래야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비시는 자신의 고향을 싫어하진 않았다. 자그마한 것과는 별개로 이 곳엔 그녀의 친구들이 있었고 그녀를 아껴주는 부모님이 있었고 과거 행복했던 동생과의 추억이 남아 있었으니까.
“언제쯤이면 동생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앉아 중얼거린 말에 아드리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이미 떠나간 영혼을 불러오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아니까.
사령을 부리는 마법은 어디까지나 이승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을 불러내는 것.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떠나간 이를 강제로 부르진 못한다.
그건 지상에 머무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알른 영애한테 부탁이라도 해볼까. 다른 분들처럼 나도 성장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
–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비시는 충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그치만.”
– 사령술은 위험한 마법이에요. 급하게 달리다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렇겠지.”
언젠가는 비시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아직 비시는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
“비시! 비시 어디있니!?”
“무슨 일 생겼나.”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 비시는 흙을 털어내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왜요!?”
“왜요는 무슨! 빨리 이리와!”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요!”
투덜투덜거리며 어머니가 부르는 곳으로 향하던 비시는 팔짱을 끼고 있는 루시 알른과 날 선 눈으로 가늠하듯 주변을 둘러보는 조이 파트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멈춰섰다.
저 두 분이 왜 여기에 계신 거야? 이런 촌구석에 오신다 한들 재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 당황하신 건 알겠지만 어머님을 빨리 도와드리는 게 먼저 아닐까요? 얼굴이 창백하신데.
아. 아아아! 맞다!
나야 저 두 분들이랑 아카데미에서 만나서 익숙해져 있지만 어머님은 아니잖아!
외견만 보면 표독하기 그지 없는 파트란 영애와 썅년으로 유명한 알른 영애 사이에 있다간 실신하실 거야!
질겁하며 내달린 비시는 근처에서 숨을 다스린 후 애써 영애다운 모습을 하며 둘에게 인사했다.
“파트란 영애. 알른 영애. 귀하신 분들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그러니까요. 들러리 영애. 제가 왜 당신의 쿱쿱한 체취가 촌구석 냄새란 걸 알아야 하죠?”
누가 들어도 괴롭힘으로 들릴 언사에 비시 어머니의 눈동자가 떨린다.
“잠! 어머니! 아니. 엄마! 아냐! 그런 거 아냐!”
“어머나. 들러리…”
“루시. 그 이상 말해도 오해만 생겨요.”
한 마디로 루시를 만류한 조이는 그럴 필요 없음에도 공손하게 고개 숙여 사과를 전한 후 입을 열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저희가 여기에 온 까닭은 따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따님께선 아카데미에서 여러 번 저희에게 도움을 주셨을만큼 유능하신 분입니다. 파트란 가문의 명예에 걸고 단언컨대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파트란 가문의 하나뿐인 영애가 가문의 명예까지 들어가며 말하자 비시의 어머니는 믿지 않을 리 없다 손사래치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저희끼리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바깥에서 할 일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비시의 어머니가 떠나간 후 소리를 차단하기 위한 마법이 펼쳐지는 걸 본 비시는 이번 일도 저번처럼 위험할 거란 걸 눈치챘다.
“아드리에게 물어볼 게 있으신 거죠?”
“예. 지금 계신가요?”
“옆에 있어요.”
– 안녕하세요. 파트란 영애.
갑작스레 나타난 아드리가 고갤 숙이자 조이가 어깰 살짝 움찔하고는 호흡을 다잡았다.
– 굳이 절 찾아오신 걸 보면 흑마법과 관계된 건가요?
“추측하신 대로입니다.”
“기뻐해. 이번 일은 으스스한 할망구의 전문분야거든.”
두 사람이 궁금해한 것은 혼의 이식에 대한 것이었다.
한 사람의 혼을 다른 사람의 육신에 불어 넣을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이를 막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
– 혼을 불어넣는거야 가능하죠. 여러분들께서도 빙의라는 것에 대해선 자주 들어보셨잖아요?
빙의는 사령술의 기본이 되는 개념 중 하나다. 단순하게 혼을 시체에 부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주변의 도구나 사물에 부여해서 전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사령술사가 주특기로 삼는 전투법 중 하나니까.
– 다만 살아있는 사람의 육신에 혼을 불어넣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의 육신을 성으로 비유하자면 빙의하는 혼은 공성 측이고 그를 방어하는 사람은 수성 측이죠. 커다란 차이가 없으면 육신을 빼앗는 건 불가능해요.
– 설령 육신을 빼앗았다 한들 문제는 끝나지 않습니다. 육신은 약탈자를 쫓아내려고 용을 쓰거든요. 그 속에서 한 번이라도 주도권을 빼앗기면 끝이죠.
– 그래서 보통 빙의를 시도할 때는 상대를 시체로 만든 후 혼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시체를 온전히 보관하거나,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건 동의하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죠.
아드리의 설명을 다 들은 조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드리님이 하는 말은 혼에 육신을 빼앗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를 가정하고 있어.
만약 바라지 않는 혼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라면 빙의는 훨씬 더 힘들어질 거야.
특히 이번에 빙의를 시도할 상대는 1왕자님과 3왕자님이잖아. 일방적인 빙의는 결코 불가능해.
그럼 1왕비는 왜 두 분을 손쉽게 보내준 거지?
한 쪽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붙잡으려고 해야 하지 않나?
왜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질 않는 거야?
“할망구. 혼의 흔적이란 게 아예 사라져버리면 개허접이라도 빙의할 수 있어?”
– 이론적으로는요. 주인 없는 성은 원래 먼저 침입하는 쪽이 주인인 거잖아요? 그치만 혼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것보다 육신이 뼈가 되는 게 더 빨라서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해요.
“그럼 그거네.”
조이는 그제서야 1왕비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 분께서 악신 아그라의 권능을 취한다면 다른 변수는 아무래도 좋은 게 되어버려.
아그라가 지닌 끝의 권능이 있다면 육신에 머무르던 혼에 사형을 선고하는 것도 가능하잖아!
애초에 끝의 권능이라는 게 너무 포괄적인 힘이야!
이 힘이 어디까지 작용할지 추측하는 것도 어려워!
막말로 우리 기억에 끝을 내려서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단 거잖아!
생각하면 할수록 구렁텅이에 빠지는 느낌이 든다.
신이란 이름에 담긴 절망이 이토록 거대하다니.
우리가 어둠의 악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에르기누스님께서 권능을 가로막아 주셨기 때문이었구나.
만약 우리가 모든 권능을 감당해야했다면 승리를 장담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어쩌면 1왕비께선 저희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걸? 망상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정신병자잖아. 자기가 실패할거란 생각 자체를 안 하겠지.”
“그럼 저희는 어떡해야하죠?”
무작정 시간을 끌다 1왕비가 악신의 권능을 완벽히 다룰 수 있게 된다면 패배한다.
그렇다고 싸우러 간다한들 승리의 가능성은 낮다. 조용히 처리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무수한 피가 흐를 건 확정적이다.
“저. 한 가지 질문드려도 되나요? 1왕비님이 왜 언급되는 거죠?”
조이는 비시에게 이걸 알려줘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녀는 강대한 사령을 친구로 두었을 뿐인 여자아이다.
영웅의 반열에 들기엔 모자란 부분이 너무도 많다.
괜히 이 일에 끼어들었다간 친구와 같은 처지가 될 터.
“망상병 왕비가 새 직업을 얻으셨거든.”
깊은 고민 끝에 입을 다물려던 그 순간 루시가 입을 열었다.
“루시!? 이 분은!”
“이 들러리랑 우리랑 똑같은 나이거든? 허접이라도 할 일은 해야지.”
다급히 만류하려던 조이는 루시의 눈동자가 진지한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태까지 봐 온 루시는 자신보다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지킬 자신이 없다면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겠지.
“최소한 설명은 제가 하게 해주시겠어요?”
“관심받고 싶은 거면 마음대로 해.”
긴 한숨을 내쉰 조이는 단락적으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중간중간 비시와 아드리가 그게 말이 되느냐 물었지만 조이는 침착하게 그들을 설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현 왕국이 처한 상황이 끔찍하단 걸 인정하게 됐다.
– 이런 걸 왜 저희에게 알려주시는 거죠?
방금 전과 달리 아드리의 목소리에 경계가 가득 담겼다. 그렇지만 루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코웃음을 쳤다.
“할망구. 다음 질문이야.”
– 먼저 제 질문에 대답을.
“혼의 제어를 빼앗는 거. 가능하지?”
*
정화나 제령 같은 거엔 당연히 1왕비가 대비를 해뒀을 거다.
우리 측에 주신의 신성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되니까.
그렇지만 같은 흑마법사의 방해는 비교적 허술할 거야.
주신의 사도인 내 신성 앞에서도 싫은 소리를 하는 걸로 넘어갈 수 있는 사령인 아드리라면 혼의 제어를 빼앗는 것은 물론 그 혼에 자아를 돌려주는 것까지 가능할 터.
– 못 해요.
“거짓말이 너무 티 나는 거 아냐? 속일 생각이 있긴 해?”
– 아무튼 못 해요.
“겁먹고 내빼는 거지?”
– 예. 그래요. 겁 먹었어요. 그래서 못 하겠어요.
아드리가 이렇게 내빼는 이유는 비시를 걱정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아무리 긁어도, 예전에 있었던 일을 들먹여도, 괜찮은 제안을 건네도 의미가 없어.
그녀가 비시를 지키고자 하는 한 아드리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아드리는 말야.
“외톨이 할망구도 언제까지 들러리한테 기생하면서 살 건 아니잖아?”
–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전.
“할망구에겐 과분한 인형을 줄 수 있는데.”
게임 속에서 비시 관련 퀘스트를 모두 다 클리어하면 아드리가 다룰 수 있는 육신이 생긴다.
여러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하는 일이지만 지금의 나라면 그걸 구해주는 건 어렵잖다.
아드리도 유령이다. 누구보다 육신을 간절히 바랄 사령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이 미련은 무척이나 커다랄 테지.
– 필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절한다.
왜?
비시가 위험할까봐.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자신의 욕망보다 더 소중하니까.
“아뇨. 필요해요.”
허나 이 우정은 반대의 경우에도 똑같다.
비시는 자신의 위험보다 친구의 꿈을 더 소중히 여기는 거다.
– 비시! 이건 가볍게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알아. 그치만 말야. 저건 너한테 소중한 제안이잖아.”
– 그래봐야 죽으면 무의미해요! 지난 번 숲에서 있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달라요! 제가 당신을 지켜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아마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루시가 먼저 죽을 겁니다.”
비명에 가까운 아드리의 외침에 답한 조이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내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쵸?”
“푸하핳! 당연하지! 너희 같은 개허접들이 나보다 눈에 띄는 걸 허락할 리 없잖아?”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죽어도 내가 먼저 죽어.
방패를 든 채 모두의 앞에 선다는 건 그런 의미야.
“아드리님. 비시님.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루시가 여러분을 선택했단 건 모두가 웃기 위해 여러분이 필요하단 소리니까요.”
조이가 정중히 고갤 숙이자 비시가 잠시 대화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바깥으로 나오고서 몇 십 분이 지나 나온 비시와 아드리는 한바탕 다툰 것이 분명했지만 그 끝에 나온 결론은 비시의 뜻이었다.
“뭘 하면 되나요.”
1왕비 공략전을 위한 첫 단추가 준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