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1
며칠 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1왕비가 국왕을 사랑했단 사실자체는 진짜인 것 같더라.
사람 보는 눈이 좋은 여러 공작뿐 아니라 카리아마저도 고갤 끄덕일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국왕이란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었단 것도 명백해보였어.
그럼 말야. 국왕이 직접 1왕비를 설득한다면 1왕비도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까?
최소한 1왕비에게 망설임을 선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할테고 최악의 경우라도 국왕의 영혼을 인질 삼을 수 있겠지.
아드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러한 가능성을 떠올린 난 비시를 설득해 반 강제로 그녀를 이 계획에 참여시켰다.
그 뒤에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전하고 국왕의 혼을 탈취하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했지.
무릇 병법에서 말하길 최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계획이 성공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상황은 없어!
이렇게 확신한 나는 계획의 기틀이 세워진 후 페이비와 프레이를 불러 잠입계획에 대해 알려주었다.
참고로 비시가 대체할 자리는 아서의 자리였다.
누군가 몸을 탈취당하는 상황만큼은 막아야하니까. 왕자들을 모아둔 채 요한 주교와 함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도록 남겨뒀지.
아서나 르네나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어쩌겠어. 변수는 줄일 수 있으면 줄이는 게 맞잖아.
여러 고생 끝에 찾아온 잠입 당일. 여태까지는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1왕비는 공작들에 의해 가로막힌 상태고, 왕자들은 요한주교와 함께 성직자들 사이에 머무르고 있는데다, 우리들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왕성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이제 국왕의 영혼이 있는 곳까지가기만 하면 계획은 성공한 거나 다름 없어.
한 가지 불안한 점이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퀘스트로 호들갑을 떨던 허접 주신이 조용하단 거겠지.
내가 쿠르텐 공작한테 찾아가려 할 땐 되도 안한 퀘스트를 주면서 막으려던 녀석이 왜 오늘까지 조용한 걸까.
주신이나 되는 존재가 삐졌을 리는 없고 아그라 쪽에서 필사적으로 주신을 가로 막고 있는 거려나.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번 일이 끝나자마자 퀘스트가 쏟아져 나오겠네.
– 저기에요. 혼이 느껴지는 장소.
왕실의 여러 비밀통로를 이용해 빠른 속도로 목표지점에 도달한 우리는 자그마한 망설임도 없이 방의 문을 열었다.
“할망구. 저게 꿀꿀이 국왕 맞아?”
– 잠시만요. 대화를 나누어볼게요.
아드리가 영혼에 말을 거는 동안 우리는 방 안을 살폈다.
악신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아. 봉인된 악신이 혼을 오염시킬까봐 다른 곳에 보관해둔건가. 하긴 엄중한 곳에 넣어뒀겠지.
자칫 잘못하면 왕의 부활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사고가 되어버릴 테니까.
– 폐하 본인이 맞습니다.
“그럼 불러내. 꿀꿀이 국왕님이 멧돼지인지 사육당하는 돼지인지 알아내야지.”
– 항상 생각하는 겁니다만, 알른 영애께선 용케도 여태 살아남으셨네요.
“그러게? 매도당하길 좋아하는 폐급 어른들이 참 많았나봐.”
아드리가 영혼을 붙잡고 있던 흑마법에 손을 댄 순간 할아버지가 경악했다.
<교회가 본다면 즉각 이단으로 지정할 마법이다.>
‘어려운 거에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저만한 흑마법을 펼칠 경지에 이르기 위해선 수많은 혼을 연구에 바쳐야해. 저 경지에 올랐다는 것자체가 죄악의 증빙이 되는 거다.>
할아버지의 말은 대개 맞는 이야기겠지만 완벽한 설명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 마법을 가뿐히 해제하고 그 안에 있던 혼을 자신의 영역에 들인 아드리는 극악한 대죄인이지 않은가.
방구석 외톨이로 사는 게 죄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그건 불쌍한 거지 나쁜 게 아니잖아!
간신히 만난 친구가 너무 소중해서 지금도 비시에게 최대한 많은 걸 전하려하는 아드리가 썅년이겠냐고!
속으로 아드리를 변호하고 있으려니 아드리의 손 안에 머물던 영혼이 형상을 바꾼다.
– …귀한 손님분들께서 오셨군요.
인간의 형상을 되찾은 국왕은 우리의 면면을 보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
다섯 공작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1왕비는 국왕에 대한 건은 언급하지도 않은 채 인사말을 이어가는 공작들을 보고 그들의 의도를 짐작했다.
절 여기에 잡아두시겠단 생각이시군요.
놀랍진 않네요. 회의가 소집될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었으니까요.
그럼 지금쯤이면 별도로 움직이는 분들이 폐하의 혼이 계신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겠네요.
어쩌면 이미 도착하셨을지도 모를 노릇이고요.
웃음을 지은 채 공작들의 이야기를 듣던 1왕비는 자신의 마법이 부서진 걸 느끼고 세르란 공작 쪽에 시선을 줬다.
그러자 세르란 공작이 고갤 주억거리더니 자신의 목걸이에 걸린 보석을 부쉈다.
“세르란 공작. 무얼 하는 짓이지?”
“이해해 주십시오. 쿠르텐 공작. 저도 명령에 따르는 것 뿐이라서요.”
“제대로 설명하게.”
쿠르텐 공작과 베드퍼 공작이 세르란 공작을 다그치는 동안 주변을 살피던 파트란 공작은 눈매를 굽히고서 1왕비를 바라봤다.
“저희가 머물던 방 자체를 이계로 던져버렸군요. 돌아갈 방법은 생각해두셨습니까?”
“아뇨.”
“곤란하네요. 다시 좌표를 찾아 돌아가려면 몇 시간은 필요할 텐데.”
마도제국에서도 인정받는 대마법사인 파트란 공작의 말에 다른 공작들이 당혹을 내비친다.
“왜 다들 당황하시나요? 바라시던 대로 된 거잖아요?”
1왕비가 말한 것처럼 공작들의 계획은 왕성으로부터 1왕비를 떼어놓는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미묘했다.
이래서야 공작들이 1왕비를 붙잡아둔 게 아니라 1왕비가 공작들을 붙잡아 둔 것 같지 않은가.
“협력자가 있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죠. 그것도 1왕비께서 믿고 운명을 내걸만한 사람이.”
“지금 1왕비의 편에 선 이들 중에 악신의 권능을 감당할 자가 존재했던가요?”
팔짱을 낀 채 고뇌하던 버로우 공작의 질의에 다른 공작들도 미간을 찌푸린다. 왕국 내부에 존재하는 인재들은 모두 포섭한 상태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인력도 없다. 1왕비가 자신의 명운을 믿고 내걸만한 이는 존재치 않는다.
“네. 있답니다.”
공작들의 생각을 부정하듯 1왕비가 웃음을 지었다.
“1왕비님. 제 추측에 따르면 저희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즈음엔 모든 일이 끝나있을 듯 한데, 당신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양할게요. 파트란 공작. 전 계획을 나불대는 걸 좋아하는 악당이 아니라서요.”
“허. 그것 참. 아쉽군요.”
애써 웃음을 지은 파트란 공작은 일말의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는 1왕비의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뇨. 1왕비님. 당신께선. 아. 씁. 존댓말 하려니까 뒈질 것 같네.”
그 때 카리아가 침묵을 깨고 앞에 나섰다.
“야. 미친년. 내가 없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 절 되살리려 하던 1왕비의 계획이 모두 다 들통난 모양이지요?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그의 앞에 나선 건 내가 아니라 페이비였다. 우리의 목적은 국왕을 짓밟는 게 아니라 그를 설득하는 거니까.
상대를 도발하는 데 특화된 내가 아니라 겉에서부터 자비로움을 뿜어대는 페이비가 맞지.
“저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 물론입니다. 주신 교회의 성녀시여. 당신의 온화함을 어찌 잊겠습니까.
“실로 영광입니다. 폐하. 이렇게 재회한 것이 아니었다면 무척이나 기뻤을 것입니다.”
– 저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따스함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것일 줄이야.
한 때 남자였던 사람으로서 말하건데 페이비의 자비 앞에서 감화되지 않는 사람은 없어!
나쁜 짓을 저질렀음에도 오히려 걱정하는 듯한 저 눈!
언제나 진심을 담아 상대를 위로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
인간의 마음을 지녔으면서 저기에 흔들리지 않는 건 불가능해!
“폐하. 이 세상에 늦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세상의 규율을 거스르려한 저임에도 말입니까?
“당신께서 죄를 인정하고 바로잡으려 한다면 필시 주신께서 자비로 당신을 끌어안아 주실테죠. 큰 죄를 품은 저마저 안아주신 분이니까요.”
– …그를 알고 계셨습니까.
국왕의 놀람에 페이비가 싱긋 웃어준 그 순간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봉인이 풀린 걸 알고 여기로 온 건가.
기척을 보면 경비나 기사들쪽은 아니고 정보부의 요원들인 것 같은데.
주제 파악이 덜 됐네. 지네들로 우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루시. 어떡해?”
“치워야지.”
“응. 알겠어.”
“알겠습니다. 제압하죠.”
맨 처음 창을 깨고 들어온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무어라 소리치려 했으나 그들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어둠에 잡아먹혀 제압당했다.
천장에서 내려 온 셋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프레이의 칼집에 얻어맞고 바닥에 널부러졌다.
하여간 잡몹들 수준 하고는. 차라리 바깥에 나가서 난리를 치는 쪽이 더 승산이 있었을 거야.
물론 그래봐야 여기저기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제압당했겠지만.
<루시. 하나 더 온다.>
‘알고 있어요. 그나마 강한 상대네요.’
그래봐야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상대도 나름 강한 축에 속하긴 하겠지만 이 쪽의 기준은 대륙 최강자 반열에 맞춰져 있거든.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쏘아진 마법을 방패로 막아낸 난 웃으며 상대를 향해 내달렸다.
발목에 걸린 철사를 힘으로 부수고,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암기를 아무것도 아니란 듯 피해내고, 적의 입에 품고 있던 독을 순식간에 정화한 후 방패 채로 들이박았다.
밀려나며 주춤한 남자가 중심을 다잡으려는 순간 허벅지에 메이스를 때려 박아 넘어트리고 발로 머리를 짓밟았다.
두어번 반복하고 나서야 남자의 움직임이 사라졌다.
미동도 않는 남자의 목덜미를 잡고서 방 안으로 돌아온 나는 기절한 이들 사이에 남자들 던져뒀다.
그리고서 고갤 돌리자 국왕과 나의 시선이 맞닿는다.
– 자비로우시군요. 살려두시다니.
“저희는 어디까지나 선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것이니까요.”
– 과연 성녀님이십니다. 고갤 주억거리는 국왕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잠깐. 설마.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짓함에 다급히 내달린 난 페이비의 앞에서 방패를 치켜들었다.
– 제어가!
내가 도착하기 무섭게 뒤 편에서 아드리의 경악어린 목소리가 들려왔고 앞에선 왕국의 벽이 치솟아선 우릴 공격하려 들었다.
둔탁한 충격에 페이비와 함께 밀려난 나는 아쉬운 듯 혀를 차는 국왕을 노려봤다.
– 본랜 협공을 할 계획이었습니다만, 부하들이 생각보다 무능하군요.
국왕은 무고한 피해자 아니었어!?
이 새끼도 가해자 입장이었던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