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2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 국왕을 바라본다.
여전히 그에게선 악신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만, 이제와서 그런 건 무의미하다.
생전에 악신에게 정신을 장악당해 미쳐버린 것이건, 그냥 애초부터 미쳐있던 것이건 간에 국왕 본인이 이 계획의 참가자 중 하나인 이상 최선은 글러먹은 셈이니까.
– 저 사람. 사령술사에요. 그것도 상당히 실력이 좋은 축에 속하는 흑마법사죠.
– 하하. 설마 이 정도 수준의 사령이 또 있을 줄이야. 처음엔 상당히 놀랐습니다.
아드리가 실력이 있다 말할 정도라면 생전부터 흑마법에 손을 댄 거겠네. 애초부터 글러먹은 인간이었던 건가.
– 허나 이젠 당신이 와준 것에 감사하군요. 덕분에 성녀님께서 과격하게 움직이지 못하실 테니.
“아직도 추하게 발악하려고?♡ 허접 성녀 품에 안겨서 승천하는 게 그나마 나을 텐데♡”
– 사양하지. 난 미련이 참 많거든.
“딱봐도 그렇게 생기긴 했어♡ 추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오는 걸?♡”
아드리가 옆에 있어서 이 성 전체를 정화하는 방식을 사용하긴 어렵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령을 제압할 방법이라면 그것말고도 차고 넘치는데.
내 도발에 걸려서 잠시라도 틈을 내 준 그 순간 미리 계획했던 대로 프레이가 검을 휘두를 테고 그 뒤엔.
– 미안하지만 난 위험을 감수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말야.
국왕이 손을 치켜 든 순간 우리가 밟고 있던 바닥이 사라지고 중력이 우릴 반긴다.
뭔 미친!?
– 빙의한 거에요! 자신의 혼으로 왕성 전체를 장악한 거라고요!
“그런 게 돼!?”
– 보통은 안 되죠! 그렇지만 상대에겐 그걸 행할 능력과 시간과 권력이 모두 있었다고요!
과거 아드리가 자신의 저택을 지배하에 두었던 것처럼 한 번 빙의한 물건을 장악하는 건 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하다.
즉, 지금 국왕에게 왕성은 자기 손발이나 다름 없는 상태란 거지.
혀를 차며 신성으로 바닥을 만들어낸 난 허공을 박차고 비시를 끌어안았다.
“꺄악!?”
“소녀스러운 비명이네. 귀여워라.”
“그딴 말이 나올 상황이에요!?”
비시의 고함을 가볍게 흘려내며 주변을 살핀다. 갑작스런 낙하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이미 착지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이제 어쩌죠!?”
“뭘 어쩌긴! 다시 올라가서 돼지가 꿰액대게 만들어줘야지!”
“그게 가능할까요!? 이 성 전체가 폐하의 것인데!?”
“돼지새끼라고 해! 멍청한 얼빵아! 저게 왕이냐?!”
그리고 말야. 이 성 전체를 장악한 게 사령술에 의한 것이라면 이 쪽에도 대응책이 존재하잖아.
히죽 웃으며 아드리를 바라봤더니 그녀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 저 자존심이 꽤 강한 편이거든요? 되돌려주고 말겠어요.
“할 수 있겠어? 할망구에 비하면 저 돼지는 새끼돼지잖아. 젊고 생생할 거 아냐.”
– 그래봐야 돼지새끼죠. 두고봐요. 어린 놈에게 주제를 알려줄 테니까.
“푸핳. 이젠 할망구란 건 부정 안 하는 구나?”
– …당신도 두고 봐요!
얼마를 떨어졌을까. 우리가 바닥에 도착했을 때 우리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건 왕성의 기사들이었다.
하나 같이 눈에 맛이 간 걸 보면 이미 정신을 잡아먹힌 모양이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라니까.
우리 가문 기사들의 절반만 해줘도 사람취급은 해줬을 텐데.
하나하나 대가리를 깨주기 위해 메이스를 치켜 든 순간 기사들이 일제히 바닥에 널부러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옆에서 딱딱한 페이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영애님. 제가 좀 더 빨랐다면 사령이 무언갈 하기 전에 정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제서야 난 페이비가 저들을 홀린 무언갈 정화했단 걸 깨달았다.
신성이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어. 그만큼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신성마법을 사용했단 거야. 심지어 아드리에게 거의 영향이 가지도 않았어.
“신경 쓰지 마. 내가 허접성녀한테 뭘 기대 하겠어?”
“만회해보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이 계획의 입안자인 내가 제일 잘못한 거잖아.
굳은 결의가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던 난 살짝 뛰어올라서 페이비의 뺨을 잡아당겼다.
“가만 있어. 허접아. 개허접 주신이 집착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녜. 녜헤.”
긴장을 풀어주려던 중 다시 생겨난 천장이 우릴 짓누르려는 게 보였다. 왕성 전체를 장악하면 저런 것도 가능한 건가.
“루시. 저런 건 베도 괜찮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바보 검사.”
“응!”
드디어 맘 놓고 무언갈 벨 수 있단 사실에 신이 난 건지 프레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검을 휘두른 순간 천장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주변으로 비산했다.
“이번엔 좀 잘 됐다.”
그걸 본 난 다시금 프레이와 대련해주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
점점 안 좋은 쪽으로 날 닮아가는 저 꼬맹이한테 한 번이라도 지면 어떤 꼴을 당할지.
그것만큼은 피해야 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영원히 승자 쪽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 저 어린 아이가 간과한 게 있답니다. 이 성의 역사가 수백 년에 달한단 것이죠.
아드리가 자신의 책을 펼친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사기가 흩뿌려진다.
대낮의 성에서 한 밤의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짙은 사기는 아드리란 사령술사가 얼마나 드높은 격을 지녔는지 증빙하는 듯 했다.
– 자. 어디 한 번 춤을.
– 침입자인가.
– 감히 이 곳에 발을 들이다니.
– 명예를 알아라. 추잡한 것.
“…야. 할망구. 이게 뭔 상황이야. 설마 돼지새끼한테 사령술로 처발린 거야?”
– 저 새끼들이 돼지새끼한테 협조하고 있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지금 아드리가 침입자 취급을 당하고 있단 거지? 뒤룩뒤룩 욕심이 붙은 돼지도 우리 돼지새끼라 그거야?
– 닥쳐라!
괜히 일이 귀찮아졌단 생각에 혀를 차려던 그 순간 우리 머리 위에서 남자아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솔라딘을 위협하는 게 누구인지 알기나 하더냐!
– 시조시여.
– 위대한 솔라딘의 시작이시여.
– 자질구레한 헛소리는 됐다! 당장 협력해라! 시조의 명이다!
허공에 둥둥 뜬 저 꼬맹이가 솔라딘의 시조라고? 내가 알던 모습하고는 좀 많이 다른데?
“루시 알른! 일이 어떻게 꼬인 거냐!”
아서 쟤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것도 뒤 편에 성직자들을 달고 오면 곤란해! 일이 귀찮아진다고!
“저희가 구하려던 꿀꿀이가 알고 보니 나쁜 돼지더라고요?”
“…폐하가 너흴 공격했다고?”
“그러는 무능왕자님께선 왜 짐덩이를 줄줄 달고 오시는 거죠?”
“갑자기 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릴 압사시키려는 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니 이 곳이었어.”
우리를 떨어트리는 것과 동시에 다른 장소도 함께 움직인건가.
쓰잘데기 없이 유능하네.
꿀꿀이면 우리에 처박혀서 여물이나 뜯어먹을 것이지.
“음침 왕자님은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폐하가 데리고 갔겠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게임에서 보았던 르네의 모습이다.
만약 그게 르네의 몸을 빼앗은 꿀꿀이가 연기를 하던 것이라면 난 한 번도 르네를 구한 적이 없는 셈이다.
아. 자존심 상하네. 도축 당하기 싫어하는 꿀꿀이한테 여태 놀아났단 이야기잖아.
“여러분. 이 분은 저희의 협력자이십니다.”
“허나 성녀님. 그 사령이 내뿜는 사기는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저만한 수준에 도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생명을 집어삼켰을지!”
“비켜 주십시오! 저 자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럴 때 요한은 어디에 간 거야. 그 꼴통이 한 번 소리를 질러줘야 저 새끼들이 입을 다물 텐데.
“시끄럽습니다!”
페이비가 목에 핏대를 세우자 성직자들의 얼굴에 아연함이 깃든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아드리님이 곁에 머무는 걸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이 이 분을 심판하려 드는 겁니까!”
“서. 성녀님.”
“이 분을 부정하려면 저부터 부정해보십시오! 제게 이단자라 소리쳐보란 말입니다!”
성녀의 분노 앞에 성직자들은 쩔쩔맬 뿐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한다.
“할 말이 없다면 가만 계십시오! 여러분들의 불평은 나중에 실컷 들어드리겠습니다!”
평소에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화나면 무섭단 게 이런 건가.
차마 나도 끼어들질 못 하겠네.
당장 옹호 받고 있는 아드리나 비시도 어안이 벙벙한 것 같고.
“후우. 아드리님. 하던 걸 계속 하시면 됩니다.”
– 어. 크흠! 알겠습니다! 여러분!
– 시조의 명이니 협조하겠다.
– 쯧. 누군지 몰라도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했군.
– 이래서 젊은 놈들은.
투덜대면서도 아드리의 명을 따라 사령들이 움직이자 우리의 앞에 위로 향하는 길이 생겨났다.
– 갑시다!
*
르네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성을 의자에 앉은 채 가만 구경했다.
빠져나가려면 얼마든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르네는 그러지 않았다.
이 끝에 기다리고 있을 게 누구인지 짐작했기에.
얼마의 시간이 지나 성이 움직이는 걸 멈췄을 때 르네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 오랜만의 재회거늘 흉흉한 것을 꺼내는구나.
“이젠 존중해줄 이유가 없잖나.”
– 그래도 네 아비다만?
“짐승도 제 자식은 아끼거늘 그조차도 못하는 버러지를 왜 아비취급 해줘야 하지?”
르네의 날선 반응에 국왕이 웃음을 흘린다.
– 그래서 네가 날 쓰러트리겠단 것이냐?
“그래야 한다면.”
– 오만하구나. 우리가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더냐. 너는 날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렇게 키워졌으니까.
국왕의 말대로 르네의 생은 잡아먹히기 위한 삶이었다. 우리 안의 가축이 키워지듯 르네도 그렇게 자라났다.
“뭐. 그렇겠지.”
그러니 그가 이빨을 들이민다 한들 주인에게 닿을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타인의 힘을 좀 빌리려고.”
“어머나. 타인이라뇨. 그렇게 표현하시면 저 많이 슬퍼요? 따지고 보면 당신은 에르기누스님의 손자잖아요?”
“할머님이라 불러드릴까요.”
“그건 사양할게요. 그랬다간 영애의 호칭이 더 안 좋은 쪽으로 바뀔 것 같아서.”
르네의 목을 껴안으며 모습을 드러낸 요정여왕은 국왕을 바라보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 숲에 머물러야 할 존재가 어찌 이곳에.
신격에 한없이 가까운 여왕의 존재는 예상치 못했던 듯 국왕의 목소리에 떨림이 깃든다.
“크흠! 1왕비의 새어머니로서 당신에게 고하겠습니다! 난 이 결혼 반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