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3
방 안에 맴도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에 국왕이 입을 뻐끔거리고 르네도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정작 방금 전 대사를 내뱉은 요정여왕은 신이 나서 자신의 날개를 흔들고 있었다.
“저 이 대사 언젠가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파트란 영애께 빌린 소설에 나오는 말인데 완전 멋지더라고요!”
“그걸 굳이 이 상황에서 해야 했습니까?”
“이때 안 하면 언제 해요?”
요정여왕이 뭐가 잘못이냐는 듯 고갤 갸웃거리자 르네는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검을 치켜 들었다.
– 여왕이시여. 너무 절 무시하시는 듯 하군요.
“네? 왜요? 객관적인 평가잖아요. 성격 더럽고 외모도 별로인 남자는 탈락이라고요.”
– 언제까지 그리 장난을 치실 수 있나 보죠.
미간을 찌푸린 국왕이 손을 치켜들자 건물 전체가 그의 하수인이 되어 르네와 요정여왕을 공격한다.
“신기하네요. 동화 속에 나오는 장면 같아요!”
“주인공이 사령인 동화도 있습니까?”
“당연히 적이죠!”
“그럼 제가 용사군요.”
“그건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죠!”
발을 붙잡으려하고 몸을 후려치려들고 짓누르고 가두고 떨어트리려하는 성의 움직임에 움직임만으로 대응한 르네는 국왕의 손에 쥐어지는 검을 보았다.
왕가에 전해지는 명검. 악을 베기 위해 제련된 검이 악의 손에 쥐어지다니 아이러니하군.
“할머님. 슬슬 당신의 힘을 빌려도 괜찮겠습니까.”
“인도의 마법이 당신을 이끌 겁니다.”
요정여왕의 손이 르네의 눈가에 닿은 순간부터 그의 눈에 길이 새겨진다.
여러 요소를 고려한 끝에 그가 만들어낸 길이 아닌, 운명이 이끄는 길이.
“다만 그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당신에게 걸려 있습니다.”
“좋군요. 마음에 듭니다.”
대개의 이들은 막연하다 여길 경로지만 르네는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나타났단 것 그 자체로 만족했다.
어차피 그는 평생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을 이유도 모른 채 걸어왔다.
그 때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거듭하며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르네는 막연한 길을 보고서도 미소를 지었다.
저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할지가 무슨 상관인가.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저 길이 진정 운명이 정한 정답이라면 난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겠다.
한 걸음 내딛은 순간 국왕이 휘두른 검이 정면의 모든 걸 베어내며 르네에게 날아든다.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러 튕겨내자 르네가 멈춘 자리 바로 앞에서 벽이 솟아났다.
웃음과 함께 벽을 밟고 르네가 뛰어오른 순간 국왕이 준비해둔 마법이 그를 노리고 날아든다.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저주를 본 르네는 누군가의 신성이 담긴 성수를 주변에 흩뿌렸다. 삿된 것들은 주신의 신성 앞에 너무도 무력했다.
르네가 직접 벽을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그의 아래에 자리한 바닥을 밟은 르네는 다시 한 번 앞으로 뛰어올랐다.
– 어찌 시조가 이 곳에!?
잘은 모르겠다만 아래에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하긴 이 곳에 자리한 사람들이 가만있을 인물들은 아니지.
허나 아직은 달려들 때가 아니다. 틈처럼 보여도 아직 남은 길이 많다.
– 제기랄! 온전히 잡아내려 했거늘!
사기가 퍼져나감과 동시에 방의 크기가 좁아진다. 이제 르네에겐 도망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나아가는 것 뿐.
놀랍게도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은 여왕이 알려준 길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르네는 기꺼이 국왕을 향해 내달렸다.
– 발악하지 마라!
성수에 담겨 있던 신성이 아직도 르네의 곁을 맴돌며 사기를 물린다.
허. 성녀님께서 그토록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있었구나.
– 네 생의 목적을 이루란 말이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검을 가뿐히 튕겨낸다. 실로 가볍구나. 차라리 큰 아우의 것이 더 무겁겠어.
확실히 폐하께선 몸을 다루는 데 능하지 못하시군.
– 육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흐하하. 사춘기의 아이들이 왜 그리 부모의 속을 못 썩여 안달인지 알겠어.
반항을 한다는 게 생각한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잖나.
지금 내가 저지르는 일은 반항보다는 반역에 가깝긴하다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아무래도 난 타고 난 후레자식인 모양이야.
자조 어린 웃음과 함께 르네가 길을 나아간다.
때로는 마법으로. 때로는 검으로. 때로는 움직임으로.
그 순간에 해야할 최선을 당연한 듯 수행하는 그의 모습은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말끔하다.
왕을 위해 최고의 육신을 준비하겠다는 1왕비의 집착이 왕조차도 막아낼 수 없는 칼날이 된 것이다.
그렇게 상처 하나 없이 왕의 앞에 도달한 르네는 자그마한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질렀다.
– 명령이다! 반항하지 마라!
그 순간 르네의 혼에 새겨진 명령이 그의 발을 붙잡는다.
거부감이 드는 수준이 아니다.
불에 손을 가져다대는 게 무서운 것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힘든 것처럼. 피를 볼 때 거부감이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본능의 단계에서부터 느껴지는 속박.
– 빌어먹을 놈. 이리도 날 귀찮게 하다니.
인형처럼 굳어버린 르네를 보고서 욕지거리를 내뱉은 국왕은 르네의 앞에 다가와 그의 턱을 붙잡았다.
– 뭐 됐다.
결국 네 놈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었으니.
“절 잊으시면 곤란해요? 전 아직 당신을 허락한 적 없다고요.”
요정여왕의 손길에 자유를 얻은 르네는 자신의 검으로 국왕의 목을 날렸다.
실체가 없는 사령이라 할지언정 신성이 새겨진 칼날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으니. 사령의 형상이 흩어지며 방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쯧.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면 기고만장하겠군.”
“그래도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세요. 조금이라도 호감을 올려야죠.”
“…누구에 대해선지 말한 적 없습니다만.”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여왕의 장난스런 웃음에 얼굴을 감싸 쥔 르네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그녀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전에 그 녀석이 말했던 것처럼 이쪽의 잘못이 없다 할 순 없으니 노력을 해야지.
나의 첫 친구이자 마지막 친구인 녀석이니. 허탈한 웃음과 함께 르네가 검을 내린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눈에 새겨진 길을 따라 앞으로 구른 르네는 천장을 부수고서 등장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굳었다.
그건 방금 전 르네가 쓰러트린 국왕의 얼굴이었으니까.
정확하게는, 말라비틀어진 미라의 얼굴이었다.
“의아하게 여긴 적 없느냐?”
치아가 사라진 미라의 입에서 쉬어버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를 역할에 맡는 물건으로 만들 도구가 없는 것이?”
“…설마.”
“숙련된 공간 마법사는 자신의 아공간을 지니지.”
미라가 피부를 부셔가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자 그 위에 검정으로 물든 구슬이 생겨난다.
그를 본 르네가 다급히 검을 휘두르려했지만 미라가 구슬을 부수는 게 더 빨랐다.
“혹여 네가 느려서 실패했다 생각하느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특별히 설명을 해주자면 너희들이 오기 전에 이미 계약은 끝났다. 당연하잖으냐. 주신이 보낸 영웅들이 이 곳에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웃음소리와 함께 미라가 손을 튕기자 르네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왕의 권능에 의해 검게 물들었던 시야를 되찾은 르네는 이전과 달리 여유를 잃은 여왕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다.
“용케도 막아내셨군요. 주신과 세상을 양분하던 악신의 권능인데 말입니다.”
요정여왕은 대답을 하는 대신 르네를 자신의 뒤에 숨겼다.
“길을 따라 달아나세요.”
“허나.”
“토달지 말고 당장 움직여요. 힘이 제한된 상태론 저도 오래 못 버텨요.”
“길이 없습니다.”
“…정말요?”
“예.”
르네는 자신의 쓸모를 냉정히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곳에 있어봐야 변수만 생길 뿐이란 걸 아는 그는 기회가 있었다면 당장 도주를 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르네가 움직이지 못하는 건 그의 눈에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요정여왕이 선사한 인도의 마법이 고한 것이다.
그의 운명이 이 곳에서 멈추었다고.
“뭘 그리 놀라나. 네 앞에 끝이 있는데 미래가 존재할 리 없잖나.”
조용하게 깔끔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곤란해졌다 말하는 미라는 자신의 패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악신, 그것도 주신과 세상을 양분했던 거악, 아그라의 권능을 품었는데 그 누가 자신을 막을 수 있겠느냔 태도를 온 몸으로 보였다.
그건 실로 방자한 태도였지만 르네도 요정여왕도 차마 국왕의 오만이 틀렸다고 선언하지 못했다.
신화 시대를 연상케하는 위압감은 존재 자체로 절망이나 다름없었다.
무리다.
도망칠 수 없다.
어디로 가건, 어떤 수단을 쓰건, 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몸을 부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최소한 거악의 손에 내가 쓰이지 못하도록 먼저 부수는 게 나아.
아아. 그래서 나의 운명이 멈춘 것인가.
그리 생각한 르네가 검 손잡이에 힘을 더하자 미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아. 발악해봐라. 그대들의 끝에서 도망쳐봐라. 어디 할 수 있다… 크헉!?”
부서지는 벽의 너머에서 한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색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위기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장난스런 눈빛을 지닌 채, 보란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고서, 날 듯이 등장한 여자아이는 미라의 얼굴에 발을 처박아서 저 멀리로 날려버렸다.
“음침왕자님. 꿀꿀이 어디 있어요!”
“방금 네가 발로 걷어찼잖나.”
“무슨 헛소리에요! 꿀꿀이는 뒤룩뒤룩 살이 찐 가축이라고요! 여자 알몸 보는 것만으로 복상사할 것 같은 비실이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국왕의 속을 긁는 루시의 어투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게 물들어 있던 세상이 왜 네가 등장하자마자 밝아지는 건가.
어둠에 잡아먹혔던 길이 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거냐.
네가 희망의 상징이라도 되더냐?
“…왜 저기서 역겨운 병신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죠!?”
“내 말했잖나. 저게 꿀꿀이라고.”
“대체 얼마나 쥐어짜였으면 저 꼴이.”
“이 상황에 음담패설이 나오더냐!?”
생각해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군.
넌 처음부터 나의 희망이었으니.
“왜애요? 무슨 상상을 하셨길래 얼굴이 붉어지신 건가요오오?”
네가 용사 노릇을 하겠다면 기꺼이 비련의 역할을 맡아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