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6
위에서 떨어지는 여러 잔해들과 병사들은 그 자체로 혼란의 불씨가 된다.
창병이 만들어낸 진형이 무너지고 규율을 붙잡기 위해 소리치느라 기사들의 신경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자신들도 공격당할지 모른단 생각에 위에 서 있는 이들도 쉬이 움직이지 못한다.
즉, 우리에게 있어선 지금이야말로 기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와. 허접들.”
방패로 맨 앞에 선 이를 쳐날리고 그 뒤에 선 이의 멱살을 붙잡는다.
당혹으로 물든 눈동자를 무시한 채 내던지자 뒤편에 서 있던 이들이 연달아 무너진다.
다수가 지닌 힘은 진형과 전법으로부터 나온다.
한 사람이 백을 넘어 수천을 감당할 수 있는 판타지의 세상에서 진형이 무너진단 건 강자를 막을 방도를 잃는단 것과 다를 바 없다.
“흠!”
물론 국왕도 이를 알기에 사이사이에 기사를 배치해 둔 것이다만.
“냄새나♡”
제 아무리 강자라 한들 시선을 빼앗긴 순간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초속의 검을 피할 순 없다.
그게 성녀의 축복으로 평소보다도 빨라진 상태라면 더더욱.
프레이의 검에 의해 기사의 목이 허공을 날고 병사들 사이에 공포가 전염된다.
그 속에서 한 병사의 창을 빼앗아 든 아서는 자신의 마력을 담아 난간 한 쪽으로 창을 집어던졌다.
돌로 된 벽을 관통해 박힌 창은 이윽고 방어막 내부에서 폭발해 또 다른 혼란을 만들었다.
“전원!”
슬슬 대응하려는 건가.
하늘 위에서 들려 온 외침에 히죽 웃으며 방패를 치켜 든다.
뒤로 물러난 병사들이 바닥에 녹아내리더니 기사를 중심으로 뭉친다.
다수의 폭력으로 짓누를 수 없으니 소수 정예로 다시금 싸워보겠단건가.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말야.
저 진흙 같은 거, 너무 불길해 보이지 않냐?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저들의 그림자에 태양을 비추소서.”
페이비가 펼친 신성마법은 불온한 생명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정화를 할 순 있겠지만 그래서야 신성의 낭비가 극심할테니 자신이 할 일만 하고 물러선 거다.
합리적인 결정이다. 적의 움직임을 봉하기만 하면 처리해 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프레이의 검이. 아서의 칼이. 내 둔기가. 미리 정해둔 것처럼 서로 다른 적에게 날아들어 상대를 깨부순다.
“루시. 위를 봐요.”
조이의 말을 따라 고갤 돌리자 부서졌던 난간이 조립되고 분명 죽었을 적들이 몸을 일으킨다.
우리 주변도 마찬가지다. 하나로 뭉쳤던 병사들이 다시금 흩어져 저마다의 육신을 되찾는 게 보인다.
“죽지 않는 적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느냐!?”
국왕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나온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대충 알겠다.
여태 놀아주니까 즐거웠냐? 근데 이걸 어쩌나. 너희들이 한 일은 모두 다 쓸모없는 짓거리였는데. 쯤이겠지.
“예상한 시나리오네요.”
거기에 내가 해줄 대답은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했을거라 생각해? 머리가 꽃밭이네.’ 다.
아그라의 권능을 취한 너잖아.
당연히 질질 끄는 방식으로 올 거라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그 권능을 다뤄보는 모더들이 다 그랬거든.
실제로 처음 아그라의 권능을 상대해 봤을 때는 까다로웠어.
죽어도 부활하는 적이라니!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물량이 쌓이고, 쓰러트리자니 의미가 없고, 아~ 정말 귀찮았다니까.
나름 밸런스를 신경 쓴 것 같았던 본 게임 속 던전도 까다로웠는데 대놓고 악용할 생각이 가득한 모드들은 어떻겠어. 진짜 답이 안 나왔지.
결국 내가 선택한 방식은 최단거리로 달리는 스피드런이었지만 이건 나 같은 썩은물이나 쓸 방식이잖아.
대부분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아냐.
당연히 다른 공략법도 존재했어.
“허접 성녀.”
“불꽃은 태양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 태양께서 보우하사 불꽃은 저흴 상처입히지 못할 것입니다.”
열의 저항력을 늘려주는 축복이 우리의 몸에 깃든 걸 확인한 난 인벤토리에서 통 하나를 꺼내 위로 던졌다.
그 즉시 프레이가 통을 베고 아서가 바람을 일으켜 그 안에 담긴 검은 액체를 주변으로 흩날리게 만든다.
“불씨여. 피어나라.”
검은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지기 무섭게 조이가 마력을 담아 목소리를 낸다.
힘을 다했노라 여겨졌던 붉은 색 보석에서 불꽃이 피어올라 검은 액체에 불씨를 더한다.
“달려! 허접들!”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계단을 향해 달려나간다.
뒤 편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적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지만 무시한다.
어차피 저들을 우릴 따라잡을 수 없다. 그보다 먼저 무너져 내릴 테니까.
“잔혹하고 효율적이군. 좋아. 방식을 바꾸지.”
우리가 둥근 계단에 발을 딛기 무섭게 주변에 유령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이들이 아니라 우리를 끌어 안고 폭발하기 위한 존재들이다.
“벌레들. 일할 시간이야.”
– 드디어!
– 노래 부르는 거지?!
– 나 완전 자신 있어!
주신의 신성을 목에 담는다. 언어로 만들 생각은 없다. 정화의 기운을 담아 허밍을 하는 거면 족하다.
“아~”
목을 타고 나온 목소리가 주변으로 울려퍼진다.
– 아~ – 아~ – 아~
요정들을 타고서 한 번 더 울려퍼진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널리 널리 울려퍼진다.
끝을 무시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다만 이미 끝에 도달한 이라면 돌려보낼 수 있다.
그들의 원한마저 포용할 따스함은 저들에게 끝을 인정하게 만들 테니까.
우리에게로 달려들던 사령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동안 친구들은 난간에서 쏘아지는 공격들에 대처했다.
베어내고, 상쇄시키고, 막아내고, 집어삼키고, 돌려보내면서, 수백의 공격을 넘어 길을 연다.
“이건 곤란하군. 다시 방식을 바꾸지.”
시도 때도 없이 생겨나던 사령들이 일순에 사라지더니 난간 맨 위에 자리한 마법사들에게서 막대한 마력이 풍겨왔다.
아. 이젠 정상적인 수단으로 못 막을 것 같으니까 기둥 자체를 무너트리려고?
하하하! 꿀꿀아. 너무 진부하잖아.
폭발은 확실히 예술적이긴 하지만 그건 우리의 폭발일 때야.
너희의 폭발을 보면서 감탄해 줄 생각은 없어.
망토를 내던지며 허공으로 뛰어 오른다. 포용의 권능을 갑옷에 불어넣는다.
모든 걸 끌어당기는 탐욕스러운 갑옷은 포용의 권능마저도 끌어안아선 그 성질로 자신을 강화시켰다.
“지연폭발이에요! 앞으로 5초!”
지연폭발의 마법이라면 뭔지 알아. 마법이 시작된 타이밍을 기억하고 있으니 뒤 쪽 말은 무시해도 되겠지.
마법진이 빛나고 창의 모양으로 응축된 불꽃들이 쏘아지고 창 끝이 완연히 빛나는 순간.
바로 지금.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게 쏘아진 마법들이 허공으로 튕겨 나 폭발한다.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금 계단 위에 착지한 나는 용사의 망토를 받아 들고서 얼빵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6초잖아. 날 죽일 생각이었던 거야?”
“그. 그랬어요!? 왜지?!”
“왜지? 왜지이이이!?”
“꺄아! 꺄아악!”
필살 옆구리 5연타로 조이를 징벌할 즈음 꼭대기에 도착했다. 꿀꿀이는 불쾌함을 담아 우릴 흘겨봤다.
“돼지우리치고는 그럴 듯 했어♡ 고생했네~♡ 꿀꿀아♡”
“난 시시하던데.”
“바보검사♡ 꿀꿀이한테 사람의 기준을 강요하면 어떡해?♡ 칭찬을 해줘야지♡ 똑똑한 꿀꿀이라고♡”
“그래봐야 꿀꿀이잖아.”
꿀꿀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나와 프레이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는 부들부들 떨다 위로 향했다.
미라도 얼굴이 벌게질 수 있구나.
키득키득 웃으며 위층에 발을 디디자 많고 많은 방이 우릴 맞이해줬다.
이 중에서 올바른 길을 고르라는 거려나?
아마 올바른 순서를 따라 이동하면 보스룸에 도달하는 방식이겠지.
우릴 소모시키기 위한 거라면 나쁘진 않아.
원래라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꿀꿀이랑 놀아줘야 할 테니까.
그치만 나를 상대할 때는 아냐.
“조이. 문 뒤에서 무언가 감지되나?”
“아뇨. 전혀요.”
“성녀님께선?”
“죄송합니다. 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프레이 켄트. 넌?”
“내가 골라도 돼요?”
“당연히 안 되지.”
“치졸해.”
당혹스러워 하는 친구들을 내버려 둔 채 여러 문을 살핀다.
다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문의 향연. 그 모든 걸 콧노래를 부르며 살피던 난 웃으며 한 곳의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열자 또 다시 수많은 문이 우릴 맞이해주었다. 아래에서 보았던 병사들도 함께 말이다.
“달릴 거야. 알아서 따라와.”
아마도 꿀꿀이는 우리가 정답을 찾아헤매며 죽지 않는 병사들을 상대로 고생해주길 바랐을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왜냐면 정답을 고민할 이유가 없거든.
내가 고른 장소가 무조건 정답일텐데 왜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헤매겠어.
우리가 방을 빠져나갈 때마다 뒤 편에 늘어선 병사의 수가 늘어난다.
우리를 추적해서 덮치려는 변태들의 수가 더해지고 또 더해진다.
허나 열성적인 스토커들의 손이 우리에게 닿을 일은 없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우리가 어느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한 순간 우리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녹아서 사라진다.
“쉴 생각 하지마. 꿀꿀이가 자기 우리에 무슨 더러운 짓을 해놨을지 모르잖아.”
“애초에 쉴 생각 없었다.”
“이 정도는 여유.”
“후후. 단련의 보람이 있네요. 영애님.”
“허억… 그… 헉… 그러게요! 페이비!”
기세등등한 친구들을 바라보다 피식 웃은 난 맨 앞에 서서 문을 열었다. 왕좌에 앉아있던 미라가 턱을 괸 채 날 노려본다.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거냐.”
“응?♡ 뭐라고. 꿀꿀아?♡ 나 돼지 언어는 모르는데?♡”
“무슨 수작질을 부렸기에 천문학적인 확률을 넘어섰냔 말이다!”
크흡. 큭. 뭐 때문에 화가 났나 했더니 그거야?
“궁금해?♡”
“주신이 개입했군. 그렇지? 사도의 곤경을 지나치지 못하고 네게 답을 알려준 거야. 균형을 무너트린 거라고!”
“푸하하핳♡ 허접주신이 괜히 허접인 줄 알아?♡ 병신한테 찌그러진 개허접주신이 뭘 할 수 있겠냐♡”
“헛소리 마라! 규율을 위반하지 않았나!”
“발악하는 게 짠하네♡ 그렇게 믿고 싶은 거잖아♡”
“네 년!”
“빌어보던가~♡ 제발 나쁜 짓 했다고 말해주세요~♡ 전 여자애한테 발릴 게 무서워서 트집이나 잡는 찌질이에요~♡ 라고♡”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방패를 치켜들자 꿀꿀이까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과분한 왕좌에서 일어났다.
“무릎 꿇고 빌 생각이 들었어?♡”
“네 년의 무릎을 꿇히고 이야기를 듣겠다.”
“흐응~♡ 그런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