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7
분노로 어깨를 떠는 꿀꿀이를 보며 생각한다.
저 꿀꿀이가 어떤 식으로 아그라의 권능을 활용할지에 대해서.
일반적인 방식은 특유의 불사성을 이용하는 거다.
죽지 않는 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까다로움을 선사한다.
앞서 보았듯 우리가 휙휙 건드리면 사라질 잡몹들조차도 불사성을 얻으니 공포로 변모하지 않았나.
만약 베네딕이나 라샤같은 괴물들이 불사성을 얻은 채 반대편에 선다면 재앙이 따로 없겠지.
주신이 오더라도 그런 재앙을 해결할 수나 있을까 몰라.
그치만 강한 것과는 별개로 던전의 보스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이 곳이 던전인 이상 불사성에는 공략법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죽지 않는 몸만을 들이민다면 몸과 인격과 영혼을 모두 깎아내리면서 실망을 표시할 거야.
그치만 꿀꿀이가 그리 허술하게 굴진 않겠지.
저 멍청이가 생각하는 바에 따르면 난 주신의 도움으로 시련을 극복한 년이잖아?
공략법이 있는 불사만을 믿고 나댈 리 없지. 그러니 이제 남은 건 끝의 권능을 활용한 전투인데.
어떤 것까지 할 수 있을까? 내가 봤던 것들보다 더 역겨운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까?
“무서워서 오줌 지리느라 떠는 건 아니지?♡”
히죽 웃으며 물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직감을 따라 방패를 올리자 강한 충격과 함께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기초적인 사용법은 아는구나?
“네 년은 마지막에 죽여주마.”
“왜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잘 안 서서?♡ 음흉한데 부끄럼쟁이구나?♡ 귀엽네~♡”
신성을 끌어올려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그리고서 포용의 권능을 갑옷에 담아 모든 공격이 내게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아그라가 지닌 끝의 권능은 말 그대로 세상 만물의 끝과 관련된 힘이다.
그렇기에 그의 주변에서 쏘아지는 마법을 끝, 본래 천천히 닿아야 할 탄착지점의 끝에 선사하는 것도 할 수 있다.
총알이 내 미간 앞에 바로 등장하게 만들 수 있는 거다.
이건 경악스러울 정도로 사기적인 힘이다만 대처방법이 아예 없진 않다.
결국 탄착점은 마법이 발동될 때 정해지니까.
마법의 발현을 보고 포용의 권능으로 유도해서 방패로 막아낸다면 방어할 수 있지.
꿀꿀이가 쏘아낸 저주의 방향을 강제로 바꿔 막아낸 후 미간을 찌푸린 꿀꿀이를 향해 눈웃음을 짓는다.
“내 갑옷을 그렇게 벗기고 싶어?♡”
발정난 꿀꿀이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의 잘못은 아니다. 메스가키 스킬은 주신의 권능이 닿아도 완화되질 않는 스킬이고, 어둠의 악신도 어쩔 줄 모르던 도발기니까.
허나 그의 잘못이 아니라 하여 사정을 봐줄 정도로 내 친구들은 무르지 않다.
아서의 검이 닿은 순간 꿀꿀이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몸과 작별한 머리의 당혹 어린 시선이 그가 이 기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단 걸 증빙했다.
“프레이!”
“몇 번 휘두르는 지 내기해.”
“거절하겠다! 내가 질 테니까!”
공격은 끝나지 않는다.
프레이와 아서가 허공에 떠오른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어느 쪽이건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다만 둘의 검은 서로의 검과 닿지 않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대련을 해 온 둘이다. 서로가 어떻게 검을 휘두르는 지 너무도 잘 알기에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합이 맞춰진다.
가루가 되어 흩날린 꿀꿀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곳은 조이가 마법을 준비해 둔 장소다.
유도된 것이다. 어둠에 집어삼켜지도록.
어둠이란 무간지옥에 갖혀 자신이 지닌 불사성을 원망하도록.
“하찮은 수작질이군!”
당연하게도 국왕은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지닌 악신의 권능은 진짜니까.
악신의 조각 중 일부를 흡수했는데 설마 즉석에서 준비한 마법에 잡아먹히겠는가.
그렇지만 위협은 느꼈을 거다. 자신의 힘이 약해진다면 정말 무간지옥을 헤맬지도 모른단 걸 인지했겠지.
“왕국의 부품들 주제에!”
꿀꿀이의 분노와 함께 주변의 벽이 무너져내리고 우리가 남겨두고 온 병사들이 우리 주변을 휘어 감는다.
이게 2페이즈인가.
“이 자리에서 선포합니다. 지금 이 곳이 위대하신 주신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페이비가 신성의 영역을 선포함에 따라 병사들이 밀려난다.
악신 아그라의 권능에 의해 피어난 이들이다.
이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거다.
꿀꿀이라 해서 영향이 없는 건 아니다. 악신의 조각을 몸에 품고 있는 이상 이 곳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그라의 권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신성의 영역이니까.
뭐, 그렇다고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걸로 날 막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가? 하. 우습군!”
그가 손을 들자 프레이와 아서가 쥐고 있던 검이 툭하고 부서져 흩어진다.
조이가 쥐고 있던 지팡이가 반으로 동강난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당장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신에 부여된 축복의 영향으로 견디고 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명을 달리할 거다.
“주신의 신성이 끝나지 않길 빌어라. 그게 사라지는 순간 네놈들의 무기와 같은 결과를 맞이할 테니.”
이게 바로 악신 아그라를 상대하는 게 뭣 같은 이유다. 공들여 준비한 장비들이 모두 가루가 되어 버리거든.
“왕자님. 다른 검 있어요?”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있긴 하다만 의미가 있을까.”
“오러로 어떻게든 하면.”
“자.”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프레이에게 던져줬다.
가뿐하게 손잡이를 붙잡은 프레이는 운명의 사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뜨거운 눈으로 내가 준 검을 바라봤다.
신화 시대의 기적이 담긴 검이 마음에 든 것 같네.
“공짜 아냐. 제대로 못하면 기대해. 바보검사.”
“…응!”
그 검에 프레이가 오러를 담자 하얀 칼날 위에 무색의 오러가 깃든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기세로만 느낄 수 있는 무형의 무언가가.
그리고 프레이가 오러를 담아 검을 휘두르자 꿀꿀이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기대할게!”
다시 한 번 다짐하겠다.
나 다신 프레이랑 안 싸울 거야. 절대로.
재차 결심하며 방패를 치켜 든 순간 아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요.”
“아니. 그. 뭐냐.”
“아. 맞다. 무능왕자님께도 드릴 게 있었어요.”
“그렇지?”
기대감이 잔뜩 담아 날 바라보는 아서에게로 다가가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어줬다.
“흐억!? 뭔.”
“포상♡”
“놀 시간이 있나?”
어느새 부활한 꿀꿀이가 짜증을 담아 외치기에 보란 듯 웃어줬다.
“아들한테도 질투심을 느껴?♡ 푸하핳♡ 그래서 빼앗으려고 했던 거구나?♡ 우리 꿀꿀이는 못 생겼고♡ 땅콩인데다♡ 조루고♡ 냄새나고♡ 남자답지도 못한데다♡”
견디다 못한 우리 꿀꿀이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마법에 작용했던 권능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의 적의는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짙었기에 난 메이스로 그를 맞이해줄 수 있었다. 꿀꿀이의 몸이 신성의 영역 바깥에 처박힌다.
“변태짓도 제대로 못하는 허~접이니까 말야♡”
저 멀리에서 몸을 일으킨 꿀꿀이의 시선이 내게 닿은 순간 고양감이 차오른다.
날아가버린 그의 이성이 본인도 모르게 선언하는 거다.
자신이 자그마한 여자애를 굴복시키고 싶어서 안달한 페도 변태 허접새끼란 걸.
“감히.”
“화가 나?♡”
“감히.”
“꼬맹이란 걸 알게 해주고 싶어?♡”
“감히!”
“해 봐♡ 할 수 있다면 말야♡ 허~접아♡”
이성이 날아간 꿀꿀이는 온갖 방식으로 내게 공격을 시도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마법과 저주에 끝을 유예시켜 쏟아붇는다거나, 대지에 끝을 고해 균형을 무너트린다거나, 무의 끝에 도달할 경지를 일시적으로 흉내낸다거나, 빛을 끝낸다거나.
그가 보여 준 활용은 처음으로 신의 권능을 다뤄보는 이치고는 상당히 능숙했다만.
딱 그 정도였다.
칭찬해줄 수 있다.
창의적이라고 박수를 쳐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뿐이다.
좆같이 굴 방법이 수도 없이 많은 힘을 가졌음에도 내 입가에선 웃음기가 사라지질 않는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공격을 도외시하며 달려들고 있음에도.
저 녀석이 아무리 발악해봐야 내가 봤던 인간의 악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
결국 삼류악당이란 거지. 허접답게 말야.
내가 발정난 돼지를 다루는 동안 친구들은 계속해서 돼지를 도축했다.
그의 양 팔을. 몸을. 다리를. 이전에 머리를 가루냈던 것처럼 분해해서 결국 발견해냈다.
꿀꿀이의 몸 안에 스며 있던 악신의 조각을. 약점을 확인한 후 친구들과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일부러 헛디딘 척 하며 휘청거렸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리 훌륭한 연기는 아니었다.
꿀꿀이에게 이성이 있었다면 분명 알아차렸을만큼 허술했지.
허나 꿀꿀이는 발정이 나서 뵈는 게 없는 상태였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성적인 판단뿐이었다.
꿀꿀이가 휘두르는 검을 본다. 과정을 무시한 채 내 앞에 도달할 검을 본다.
자기가 유도되고 있단 걸 알지도 못하는 짐승의 검을 본다.
셋. 둘. 하나.
지금.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위로 튕겨나고 역겨운 꿀꿀이의 몸이 훤히 드러난다.
신성으로 이루어진 밧줄이 사지를 엮고, 조이의 마법이 육신 위에 덧씌워진 걸 지우고, 말라빠진 몸을 두 검사가 분해한 후, 내가 악신의 조각을 가로챘다.
여태까지 순식간에 회복하던 국왕이 여느 잡몹들마냥 무너졌다 뭉치길 반복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는 다급히 내 손에서 조각을 빼앗으려 했지만, 권능을 빼앗긴 허접의 몸놀림은 하품이 나올 만큼 느렸다.
빼앗겨주고 싶어도 빼앗겨줄 수 없을 만큼.
복부를 걷어차 날리자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육신을 붙잡았다.
“놔라! 난 이 나라의 국왕이다!”
한 다리가 끌려들어 간다.
“영원토록 솔라딘의 영광을 지킬 위대한 왕이란 말이다!”
무릎이 어둠에 잠식된다.
“무엇을 바라지?! 재산!? 지위!? 보물?! 말해라!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
허리춤까지 검은 호수 아래에 잠긴다.
“아서! 우리 아들! 아비다! 네 아버지이지 않으냐! 널 사랑해 주고 지켜준 남자다!”
“자기 몸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셨으니까요.”
“저 꼬맹이! 네가 사랑하는 꼬맹이를 네게 주겠다! 네 맘대로 다룰 수 있게 해주마! 그러니 제발!”
아서가 설득되지 않는다 생각한 걸까. 그가 페이비에게로 고갤 돌린다.
“성녀시여! 부디 이 악한 자에게 아르마디의 자비를! 다시 선해질 수 있는 기회를!”
페이비가 입을 다문 채 날 선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다급히 그 옆으로 향했다.
“파트란의 영애여! 위대한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제자시여! 부디 이 비루한 생에 자비를!”
“켄트의 영애여! 자네의 검에 깃든 명예를 생각해 이 목숨을 지켜주길!”
“제발. 제발. 제발!”
이윽고 국왕의 머리만이 남았을 즈음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주신의 사도시여.”
난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의 발을 핥으라면 핥고 바닥을 기라면 기겠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모든 걸 하겠습니다. 혼을 다해 당신의 선업에 참여하겠습니다! 맹세의 신에게 내걸건데 저는!”
“돼지 언어 모른다고 몇 번 말해?♡”
꿀꿀이의 머리를 밟아 어둠에 가라앉히자 어둠이 사라지고 주변이 고요로 물든다.
아. 정말 난 착한 것 같아. 저 추악한 돼지한테도 마지막까지 포상을 줬잖아.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은 아니긴 하지.
저 자는 에르기누스가 친히 만들어 준 어둠 속에서 영원토록 살아갈테니까.
따지고 보면 꿈을 이룬 셈이니 축하를 해줘야겠네.
어둠 속에 질식했으니 비아냥대는 소리를 듣진 못하겠지만.
후우. 일단은 끝난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생긴 걸 확인한 난 느릿하게 주변을 살폈다.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러다 뒤통수 맞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허접 주신의 메시지가 뜨기 전까진 안심 못 해.
“영애님!”
“루시!”
아. 역시나. 돼지가 또 추하게 발버둥을 치려는 건가 보네.
어디지.
저 둘의 시선은.
내 팔?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군.>
악신의 조각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내 팔을 타고서 기어 올라오고 있다. 그 기운이 닿은 내팔은 이미 죽음에 이르러 거뭇해진 상태였다.
<꺼져라! 인간에게 패한 잔재여!>
<오. 저주받을 아르마디의 하수인도 있었군. 오랜만이야.>
느긋한 목소리가 뇌를 가득 채운 순간 자연스레 몸이 떨렸다.
신체의 온도가 내려간다.
심장의 박동이 느려진다. 삶의 의지가 희미해진다.
당연해야 할 신체의 활동이 당연하지 않게 된다.
<균형을 무너트릴 셈이냐!>
<조각 하나로 아르마디를 절망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지.>
<할 수 없을 거다!>
“그럼요. 할 수 없죠.”
멈췄던 숨이 다시 돌아온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따스함이 피를 돌게 만들고 내 주변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잠깐. 이건 페이비의 신성이 아닌데?
느릿하게 고갤 들자 죽음의 공포가 선사한 눈물 너머로 흐릿하게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드디어 직접 만나 뵙게 됐군요. 주신의 사도시여.”
교황이 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