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8
당혹 속에서 다급히 일어나려던 난 차오르는 현기증을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교황이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날 붙잡아줬다.
“너무 급하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사도시여. 당신은 방금전에 죽을 뻔한 겁니다.”
“역겨운… 스토커 새끼가… 말하지 않아도 알거든?♡”
“변명하자면 스토커는 아닙니다. 그저 때가 됐기에 왔을 뿐.”
교황이 조각을 채가려기에 필사적으로 가로막았지만 그러기엔 방금 전의 반동이 너무 컸다.
“성녀시여. 사도를 부축해 주십시오.”
페이비의 부드러운 품에 안겨 주변을 살핀다.
친구들은 적의가 가득 담긴 눈으로 교황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진 못하고 있다.
라샤라는 괴물 하나도 벅차거늘 교황 직속의 강자들까지 그 곁을 지키고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다.
프레이는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다만 아서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 같네.
그래. 잘했어. 저 멍청이가 제멋대로 움직이게 내버려두면 개판이 날 거야.
“요한 추기경을 이용해 명분을 만들고 혼란에 대처한 건 좋았습니다만,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제 귓가에 들어온단 건 알아 두셨어야죠. 그리고 제가 지닌 권위라면 요한 추기경 하나로는 막을 수 없단 것도.”
“좆…♡ 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저는 딱히 평판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번 일만 끝마치면 교황의 자리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좋거든요.”
교황의 어투에서 절로 기쁨이 묻어나온다.
감정을 숨길래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수준인건지 일부러 웃음으로 도발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웃음이 진짜라는 것이다.
악신의 조각은 그의 계획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까.
“이제 마지막입니다. 다소 불경한 이야기입니다만 방금 전 당신의 목숨을 구해드렸으니 부디 침착하게 들어주십시오. 사도시여. 저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정말 조금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정신이 나간건가?
주신의 사도라는 지위가 그토록 중요한 건가?
설마 이 새끼도 허접주신마냥 페도변태새끼인 건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주신께 맹세컨대 전 당신에게 자그마한 상처도 주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정신적인 공격을 할 일도 없고요. 그저 제 일의 끝을 당신께서, 그리고 당신의 주인께서 봐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하하. 그런거냐. 자기희생이고 나발이고 자신이 신앙하는 존재한테 인정받고 싶단 거구나.
교황의 눈웃음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허접주신에게 맹세를 한 이상 교황은 정말로 내게 어떤 공격도 하지 않을 거다.
심지어 나를 해하려는 녀석이 있으면 그 녀석의 목을 쳐내는 걸로도 모자라서 혼을 붙잡아 영원토록 고통을 주려 들겠지.
게임 속에서도 실제로 페이비한테 상처입힌 녀석들에게 그랬었으니까.
내 안전을 제하고서라도 이 제안은 그리 나쁘지 않다.
협박에 가까운 방식이란 게 유쾌하진 않는다만 교황의 계획을 옆에서 볼 수 있단 사실자체가 매력적이다. 마음에 드는 순간 언제라도 분탕을 칠 수 있단 거잖아.
<위험하지 않겠느냐.>
‘놀랍게도 안전해요. 교황을 따라가면 무슨 수를 써도 못 죽을 걸요?’
거기에 더해서 내가 분탕을 친다 한들 교황은 분노하지 않을 거다.
선만 넘지 않으면 슬퍼하기야 하겠지만 딱 거기서 멈추겠지.
내가 선을 안 넘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뭣보다 제가 따라가면 계획의 장소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건 너도 모르는 거냐?>
‘알 수가 없어요. 완전히 랜덤이라.’
“성하. 루시 알른은 저희 왕국의 사람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아서가 앞으로 나섰다.
“납치를 하려 하시면 곤란합니다.”
“납치라뇨. 솔라딘의 3왕자시여. 이는 추대입니다.”
“단어가 달라져도 행동은 그대로인 듯 합니다만.”
“루시는 왕국의 영웅인 알른 백작가의 하나뿐인 영애입니다. 성하. 최소한 왕국의, 이것조차 힘들다면 알른 백작가의 허락이라도 구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서를 뒤따르듯 조이가 내 앞을 가로 막는다.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교황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허나 난 둘의 말에 귀기울이는 체 하는 교황이 사실은 조금도 집중하지 않고 있단 걸 안다.
“두 분. 전 지금 당장이라도 솔라딘을 향한 성전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악신을 부활시키려 한 것은 주신에 대한 반역이니까요.”
“그건 몇 사람의 단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게 솔라딘의 국왕 폐하였단 것이 문제지만요.”
한 마디로 아서의 입을 다물게 한 교황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제가 성전을 선포하면 다른 국가의 지도자분들께서도 기꺼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워 주시겠죠. 아시겠습니까? 전 사도께서 보여주신 희생에 감복하여 해선 안 될 일을 하려는 겁니다.”
교황이 말하는 건 단순한 전쟁이 아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솔라딘은 악신 아그라를 부활시키려한 악마의 국가가 되어버린다.
페이비가 이쪽 편을 든다 해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다. 심지어 몇 추기경이 페이비의 편에서 소리를 높인다해도 말이다.
고결함이 어찌 지도자에게 매력으로 느껴지겠는가.
“헛소리 마시죠! 루시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던 분들이!”
교황이 고갤 주억이며 두 사람을 지나가려던 순간 조이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교황의 앞에 섰다.
“루시는 성하를 두려워했어요! 근데 이제와서 뭐요!? 이렇게 저희 뒤통수를 치고 루시를 데려가겠다고요!?”
“파트란 가문의 영애시여. 그에 대해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허나 이젠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바로 잡을 테니까요.”
“성하! 아니. 그렇게 부르기도 싫네요! 당신! 전 당신 못 믿어요!”
목에 선 핏대와는 달리 뒤로 숨긴 조이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아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씀하시지만 그래서 여태 당신은 뭘 했죠!? 루시가! 이 작은 여자애가! 목숨을 걸고 악신과 싸우는 동안! 당신은 뭘 했냐고요!”
“파트란 영애.”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죠! 그렇다고 자신에게 내린 저주 때문에 루시가 괴로워하던 때에 뭘 해주셨나요!? 아뇨! 그 때 당신은 루시의 존재조차 몰랐어요!”
조이가 소리를 치는 걸 듣던 아서가 고갤 내저으며 국왕의 검을 쥔다. 프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새하얀 검 위에 자신의 오러를 새긴다.
“앞에 말씀하셨죠!? 교회의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그럼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몽은 당신의 방조 때문이겠군요! 역겨워요! 마굴이라 불리는 사교계에도 당신 같은 쓰레기는 없어요!”
“말씀이 과하시군요.”
여태 침묵을 지키던 교황의 직속 성기사들이 입을 열었지만 조이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과하다고요!? 당신들이 성지에 틀어박혀서 손가락이나 빠는 동안 루시는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서 세상을 구했어요! 그런데 성지에서 루시한테 준 건 야유뿐이었죠! 아직도 과해요!? 전, 전 개씨발허접새끼들인 당신들이 뻗대는 게 과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귀족의 품위를 내던진 욕설에 주변의 표정이 아연해지고 한 걸음 뒤에 있던 라샤가 웃음을 터트린다.
“역시 에르기누스의 제자다워! 이 정도는 해야 영웅이지!”
휙 고갤 돌린 교황은 눈빛만으로 라샤의 입을 다물게 만든 후 페이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성녀시여. 부디 당신의 친구분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페이비!”
조이와 교황의 눈을 동시에 마주한 페이비는 잠시 멈칫했다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서 조이에게로 다가갔다.
“제발! 아시잖아요! 페이비!”
“감사합니다. 성녀님.”
“아뇨.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성하.”
그리고 교황을 향해 고갤 돌렸다.
“무슨… 뜻이죠?”
“무척이나 속된 말로, ㅇ, 여, 엿이나 드시라는 겁니다!”
목소리를 떨어가면서까지 비속어를 쏟아낸 페이비는 눈을 꾹 감았다가 말을 잃어버린 교황을 노려봤다.
“전 제 과거를 압니다. 성하께서 그 악행을 방치했단 것도 알죠. 그럼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이번 일은 그럴 수 없습니다.”
“성녀님. 위대하신 주신의 사도입니다. 주신 교회에서 추대하지 않으면 어디서 하겠습니까.”
“추대할 필요가 없죠. 주신께서 택한 분을 저희가 무슨 권한으로 인정한단 말입니까. 실로 불경하군요. 실망스럽습니다. 성하.”
교황도 페이비도 서로 웃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밀려나지 않기 위해 눈을 치켜 뜬 채다.
그렇게 언쟁이 다시 이어지려던 찰나에 둘의 사이에 라샤가 끼어들었다.
“하이고. 답답이들. 계속 입만 나불거려봐. 결론이 나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났어. 노친네. 간단한 이야기잖아. 저쪽은 죽는 한이 있어도 친구를 못 넘기겠단 거고, 우리는 어떻게든 저 건방진 꼬맹이를 데려가겠단거야.”
“그래서 설득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못 해. 그야 당신은 미쳤잖아. 미친 사람이 지껄이는 말에 설득되는 건 미친 사람 뿐이야. 그리고 안타깝게도 저 쪽은 정신이 멀쩡해보이네.”
라샤가 앞으로 나서자 그제서야 순간 굳었던 교황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떡하겠단 겁니까.”
“이것도 간단해. 저 꼬맹이는 건방지지만 착하잖아? 자기 친구들이 반쯤 뒈지면 알아서 따라오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오던 라샤가 갑작스레 주먹을 휘두른다. 저건 위험해. 저런 공격에 당했다간!
“와. 당신 강하네?”
프레이가 내지른 검이 라샤의 주먹을 가로 막는다. 설마 자신의 공격이 따라잡힐 거라 생각하진 않은 듯 라샤의 눈이 커져 있다.
“아무리 살살 했다지만 막아낼 줄이야.”
“그런 핑계?”
“흐하핳! 아! 좋네! 저 노친네 따라다니고 처음으로 보람을 느껴!”
라샤가 기세를 끌어올림에 따라 교회의 성기사들도 저마다 무기를 치켜 든다.
제기랄. 이렇게 되면 나도 얌전히 따라간다 말할 순 없겠네.
‘정말 귀찮은 애들이라니까요.’
<그리고 좋은 애들이기도 하고.>
비틀거리면서 방패를 치켜든다. 좀 쉬니까 낫네. 자기가 신실한 줄 아는 좆밥기사들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어.
<앞서 아그라가 벌인 일 때문에 균형이 무너져내렸다. 시간만 끌면 에르기누스가 올 테지.>
‘그 사람은 왜 자꾸 한 박자 늦는 거에요? 자기 여자친구 잃어버린 걸로는 부족했대요?!’
<본인한테 들려줘라. 좋아할 거다.>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나선 순간 내 몸에 신성이 쏟아졌다.
페이비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황의 것도 아닌, 따스한 신성이.
풉! 푸하핳!
뭐야. 찐따마법사 욕을 한 것 뿐인데 찔렸나봐?
“거기 좆밥들♡”
일단 이번에는 고맙다고 할게.
“개허접주신의 적이 될 준비는 했어?♡”
아르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