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0
교황의 인사에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미간을 찌푸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황이 농담을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에르기누스도 원래라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교황이 다시 자신의 머리를 만들어낼 때 사용한 권능의 정체만 몰랐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악신의 사도가 주신의 신성을 다룬단 말이냐.”
“위대하신 주신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니까요.”
에르기누스의 경악을 마주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교황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깨닫고 경악했다.
헌데 기이한 것은 정작 그의 발언에 배신감을 느껴야 할 성기사들이나 그와 함께하던 라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단 점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성기사들과 안면이 있는 페이비가 목소리를 떨며 묻자 그들이 고갤 끄덕였다.
“과거가 어찌되었건 성하께서 주신을 신앙하신단 사실이 변하진 않습니다.”
진중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말이 진심이라 여기긴 힘들었다.
악신의 사도가 지닌 뜻이 고결하기에 곁에 섰다는 것보단 악신의 사도가 저들을 세뇌했단 쪽이 더 설득력이 넘쳤으니까.
실제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황을 향해 분노가 담긴 시선을 보냈다. 타인의 날선 시선 속에서도 여유로히 웃던 교황은 루시의 눈을 마주하고는 눈을 굽혔다.
“이미 저에 대해 알고 계셨군요.”
“네가 추악한 쓰레기라는 거?♡”
“하. 하하하! 어찌 이리 고결하실 수가 있는 건지! 주신의 은혜에 기대는 저따위로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겠군요!”
한참 동안을 미친 사람마냥 웃던 교황은 이윽고 평온하다 못해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을 한 채 루시를 바라봤다.
“당신이라면 절 죽일 수 있겠죠.”
일순에 변모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느낀 건 베네딕이었다.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미치광이의 눈빛에 반응한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힘을 더했다.
그 뒤를 잇듯 다른 강자들도 적을 배제하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허나 적을 향해 휘둘러져야 할 무기들은 적의 목에 닿지 못한 채 바닥에 널부러졌다.
교황을 가로막기 위해 모인 모든 맹자들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다.
단 두 사람. 루시와 에르기누스를 제외하고.
“아그라의 권능인가.”
“저들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끝냈습니다. 어둠의 신이 된 당신이라면 이해할 겁니다. 권능이란 건 무척이나 모호하니까요.”
손을 내저으며 루시의 앞에 도달한 교황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부디 함께해 주십시오. 제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질문에 루시 대신 에르기누스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보내 줄 성 싶으냐!?”
“물론 당신이라면 절 얼마든 막을 수 있겠죠. 허나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또 다시 이별을 하게 될 텐데요.”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요정여왕을 보며 교황이 묻자 에르기누스가 눈에 핏줄을 세웠다.
“헛소리에 내가 굴복할 것 같나.”
“대마법사시여. 전 아그라의 사도입니다. 방금 전 조각을 취해 권능을 얻기까지 했죠. 요정여왕 하나를 어둠으로 이끄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네 놈을 찢어발기는 게 어렵지 않단 것도 알겠…”
“좀 찐따처럼 굴지마♡ 닭장여왕이 병신 같은 남자가 취향이래?♡”
퍼뜩 고갤 돌린 에르기누스는 무어라 소리를 치려다 루시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안하군.”
한이 서린 사과를 듣고 가볍게 웃음을 흘린 루시는 교황의 머리를 붙잡곤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철갑이 교황의 뒤통수를 짓밟는 모습에 성기사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나섰지만 당사자인 교황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가만있게.”
“허나 성하!”
“명령이다. 가만히 있도록.”
“그래♡ 추잡한 쓰레기가 즐기고 있는 거 안 보여?♡ 움찔움찔거리는 게 조금 있으면 지릴 게 뻔하잖아♡ 질투난다고 방해하면 안 되지♡ 밟히고 싶으면 줄 서♡ 변태새끼들아♡”
대부분의 성기사는 루시의 사나운 미소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달려들진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 교황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주신의 사도시여.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동행을 해 주십시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좋아♡”
“당신께서 바라시는 무엇이라도… 예?”
“따라가줄게♡ 추잡한 노친네♡ 대신 약속해♡ 내가 떠날 때까지 너희들은 내 노예야♡ 짐승보다 못한 쓰레기들에게 어울리는 취급을 해주려고♡ 기쁘지?♡”
“사도께서 내리는 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교황의 얼굴을 걷어차 날린 루시는 라샤의 앞에 섰다.
“엎드려.”
“꼬맹아.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난 저 노친네 동료지 부하가 아니거든?”
“쓰레기 할배♡ 노예가 말을 안 듣는데?♡”
“라샤.”
“이봐. 노친네. 내가 당신을 따라다니는 건.”
“라샤!”
“…아오. 씨발. 진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라샤가 바닥에 엎드리자 루시가 당연하다는 듯 그 위에 올라탄다.
“두고 봐. 꼬맹아. 나중에 내가”
짜악!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퍼질만큼 강하게 엉덩이를 후려친 루시는 부들부들 떠는 라샤의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탈 것은 말 안 해♡ 그 나이 처먹을 때까지 뭘 배운 거야?♡”
치욕 속에서 라샤가 분노를 다스리는 동안 몸을 일으킨 교황은 품 안에서 스크롤을 꺼내서 찢었다.
주변에 푸른 빛이 피어오르며 교황 일행의 몸이 흐려진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에르기누스님.”
순간이동의 마법이 끝나고 홀로 남은 에르기누스는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
얼마의 시간이 흘러 악신의 권능이 효과를 다했을 무렵, 모든 게 끝나버린 주변의 모습을 확인한 이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긴 침묵을 부수고 요한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아그라의 권능이 모든 걸 멈춰버렸으니까요. 누구 하나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우리 딸이 희생했다! 여리고 착한 아이가 적의 손을 잡는 걸로 구해진 비루한 목숨이란 말이다! 당신의 눈엔 이게 기적으로 보이는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내지른 베네딕은 요한의 착잡한 표정을 보고 입술을 곱씹었다.
“죄송합니다. 요한 추기경.”
“아뇨. 당신께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딸을 지키기로 약속했습니다. 맹세도 했죠. 헌데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비란 작자가 되어서는 아무것도.”
고개를 내젓던 베네딕이 얼굴을 숙이자 페이비가 그 곁에 다가가 조곤조곤 그를 위로했다.
“알른 백.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영애님을 소중하게 여겼고, 여태 그 분께 도움만 받았는데, 또 다시 도움을 받아버렸죠. 슬픈 일입니다.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녀님. 어쩔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습니다. 전 제 딸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전!”
“알른 백.”
“베네딕 알른. 자네의 딸이 직접 선택한 일이다.”
한 구석에 앉아있던 에르기누스의 말에 베네딕이 눈을 치켜뜬다.
“제 딸이 직접 선택했다고요!?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그러지 않으면 저희가 위험해졌을테니까!”
“베네딕.”
“당신께선 도대체 무얼 하셨습니까! 신의 권위를 지니셨으면서 어찌 그리 쉬이 보내셨단 말입니까!”
“베네딕 알른! 자네의 울분이 풀릴 때까지 후려쳐도 좋다! 원망의 말이라면 얼마든 들어주마! 그러니 일단은 내 말을 들어!”
터져나올 것처럼 상대를 노려보던 베네딕이 바닥에 주저앉자 에르기누스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선택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대들을 악신의 권능으로부터 풀어줄 수도 있었고, 내가 직접 적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고, 전원을 뒤로 물리는 것도 생각할 수 있었지. 교황의 행동으로 균형이 무너졌기에 뭐든 가능했었다.”
“그럼 루시는 왜.”
“루시 알른이라 하여 이를 모르진 않았어. 그 아이 옆엔 루엘이 있으니까. 경우의 수를 모두 알았겠지. 그럼에도 그 녀석은 싸우는 대신 적을 따라가는 걸 택했다.”
에르기누스의 말을 유심히 듣던 이들은 무언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루시 알른은 포기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앞에 두더라도 희망을 붙잡을 가능성이 있다면 기꺼이 손을 내미는 영웅이다. 그리고 그 끝에 희망을 현실로 바꾸어내는 용사다.
그런 그녀가 저항하는 걸 포기하고 기꺼이 상대를 따라갔다는 것은. 분명. 이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단 거겠지.
“베네딕 알른. 자네의 딸은 쉬이 무너질 사람인가?”
“…그럴리가요. 루시는 이 못난 아비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입니다.”
“그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기다려라. 분명 때가 올 것이다.”
절망으로 문드러졌던 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킨다. 루시 알른은 희생을 한 것이 아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무너질 수는 없다.
저마다의 결심을 품으며 주먹을 꾹 쥐던 때에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1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날이 서 있던 베네딕이 검 끝을 들이밀자 1왕비가 두 손을 위로 올렸다.
“알른 백. 전 대화를 나누러 온 겁니다.”
“말씀하시죠.”
“르네가 르네인 걸 보면 폐하께서는 패배하신 모양이군요. 아그라의 권능을 품었으니 죽진 않았을 테고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겠군요. 그리고 이 곳에 남은 기운의 잔향을 보면 교황이 왔다가 간 모양이고요.”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거래를 제안합니다. 교황의 목적과 함께 제가 아는 모든 걸 말씀드리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도 여러분께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하죠. 그러니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폐하를 돌려주십시오.”
1왕비는 적의 어린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다 에르기누스 쪽으로 고갤 돌렸다.
“제가 배신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전 에르기누스님의 인형이니까요.”
*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고요한 저택. 창문이 모두 가로막혀 바깥을 살피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건물의 한 방에서 라샤는 루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꼬맹아. 네가 내 위에 올라타는 건 참을 수 있어. 나를 막대하는 것도 예전에 내가 한 일이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그치만 이, 이건 아니잖아!”
“뭐가 아닌데?♡ 난 어린애라 자세히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루시가 발가락으로 턱을 툭툭 건드리며 비아냥거리자 두 주먹을 꾹 움켜쥐었던 라샤가 루시의 손에 들린 것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난 파괴신의 사도야! 강자사냥의 라샤라고! 그런 내가 왜 개목걸이를 차야 하는데!”
“짐승한테 잘 어울리는 목걸이잖아♡”
“이건 자존심의 문제야!”
“풉!♡ 자존심?♡ 여태 네 발로 주인을 태운 채 기어다닌 애완동물한테 그런 것도 있었어?♡”
“꼬맹아. 정도를 지켜.”
“그러니까 설명해봐♡ 왜 이것만은 안 되는 건데?♡”
“그건. 그.”
“아아~♡ 숨기고 있었던 취향을 들킬 것 같아서 그러는구나?♡”
“무슨 개소리를!”
“누가 올라타니까 기분 좋았어?♡ 말처럼 얻어맞으니까 짜릿해?♡ 혹시 강자를 찾아다니며 싸움을 거는 것도 굴복당하고 싶어서…♡”
“닥쳐! 쳐 죽여버리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샤가 살의를 드러냈음에도 루시는 턱을 괸 채 라샤를 비웃었다.
“그런 게 아니면 아무 문제 없겠네♡ 개취급 당하면서 기뻐하는 변태가 아니라면 뭐가 문제겠어♡ 그치?♡”
자신의 눈앞에서 살랑살랑거리는 목줄을 노려보던 라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손으로 그걸 붙잡았다.
“왜 망설이는 거야?♡ 설마 앞으로 당할 걸 기대하는 건 아니지?♡”
“제발 좀 그 아가리를 잠시라도 다물 수 없어!?”
“왜애?♡ 내 귀여운 목소리 들으면 기쁘잖아?♡”
“씨발 진짜아아아….”
수많은 고뇌가 스쳐가는 라샤의 눈동자를 구경하던 루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교황을 따라오길 너무너무너무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