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2
왕성 인근의 숙소에 자리잡은 에르기누스는 어둠 속에서 멍하니 1왕비의 말을 고찰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갤 들었다.
“저. 스승님. 여쭤볼 게 있어서요.”
조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기누스는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와서 침대에 앉혔다.
“오늘 인형이 했던 이야기에 대한 물음이겠지?”
“정말 그 분이 말한 것처럼 신화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해봤다.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가능하다. 신화의 시대가 끝난 건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신들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니까.”
신화 시대의 전쟁은 양 진형에 거대한 피해를 입혔다.
몇몇 신들은 존재자체를 잃어버렸고, 악신의 진형에 선 이들은 모두 다 봉인되어버린데다가, 살아남는 선신들 중에서도 이전같은 위광을 지닌 이는 없다시피했지.
“이렇듯 신들의 위광이 줄어들었기에 신화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그럼 신들의 힘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신화의 시대가 펼쳐지겠네요.”
“그래. 충분히 가능하다. 신의 권능을 지니고 있기에 확신한 채 말할 수 있다.”
아그라가 부활하면 다른 악신들도 그 영향을 받아 대지에 강림할 것이다.
그럼 그 반대편에 선 이들도 자연스레 힘을 얻게 될 테고 또 다시 지상 위에서 신들의 전쟁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당시를 살았던 인물로서 말하마.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신격의 전쟁 속에서 인간은 그저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해. 작금의 융성함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라질 것이고 모든 문명은 과거로 퇴화해 버릴 거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지는 추측할 수도 없고, 심지어 수많은 희생 끝에 승리할 것이라 장담하지도 못한다. 교황이란 작자가 벌이려는 일은 이러한 재앙이다.”
그 작자의 판단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의 신앙이 무너져내리는 걸 보게 될 수도 있는데 어찌 아그라를 부활시킨단 말인가.
정말 그 자의 신앙이 진실되긴 한 건가? 어느 쪽이 이기건 상관없다 여기는 건…
“루시는 교황의 신앙만큼은 진실되다고 했어요.”
“…주신의 사도가 말이냐?”
조이가 고갤 끄덕이자 에르기누스가 한 쪽 눈썹을 내렸다.
“교황은 미치광이이긴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작정 일을 벌일 인간은 아냐. 우리는 무얼 놓치고 있는 걸까.”
“그가 직접 악신을 배신하려는 건 아닐까요?”
“그랬다면 열렬히 아그라를 신앙하는 체 했겠지. 대놓고 배신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과거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좋을 텐데 이를 구할 길이 없다.
역사의 신께선 자신의 서적에도 기록되지 않은 존재라 하셨고, 다른 신격분들께서도 교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셨어.
위대하신 주신께서는 무언갈 아는 게 분명하지만 정작 그 분과 대화할 방도가 없으니.
“불륜은 곤란해요?”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이와 에르기누스가 동시에 일어섰다.
휘둥그레진 두 사람의 눈동자를 보던 요정여왕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에르기누스에게 매달렸다.
“제자분과 뜨거운 눈빛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고 계셨나요?”
“오늘 낮에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다.”
“마. 맞아요! 절대 이상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조이. 그러면 더 수상한 거 알아요?”
“네?! 그치만 진짠데!? 어. 어어어.”
“후후. 농담이랍니다. 조이를 의심하지 않아요. 그야 조이는 알른 영애를 좋아하잖아요.”
“녜에?! 제가요!? 절대 아니… 그. 루시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 으. 엑.”
에르기누스에게서 떨어져 고장나버린 조이를 품에 안은 요정여왕은 미묘한 에르기누스의 눈빛에 웃음소리를 냈다.
“장난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알른 영애 곁에 있던 요정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내용은?”
“‘고목’. 단 두글자에요.”
감시가 삼엄한 듯 이후에는 그 어떤 연락도 닿지 않았단 말에 에르기누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이 있는 위치에 대한 건가.”
“그렇지 않을까요?”
“힌트를 주려면 좀 제대로 줄 것이지. 고목이라 그러면 어떻게 알아들으란 소리냐. 이 대륙에 나이 든 나무가 얼마나 많은데.”
“일단 요정들을 시켜서 각지에 있는 고목을 확인하는 중이에요. 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저.”
여왕의 품에 안겨 있던 조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뵌 분 중에 고목이었다가 숲의 주인이 된 분이 계세요. 루시가 공허의 악신으로부터 구한 분이에요.”
“흥미롭군. 위치는?”
“리나님께 물어보면 알고 계실 거에요.”
“바로 가보지. 확인할 가치가 있을 거다.”
지팡이를 꺼낸 에르기누스는 순간이동의 마법을 그리다 옆으로 고갤 돌렸다.
조이가 날카로운 눈으로 마법을 노려보고 있었다.
“배우고 싶으냐?”
“네. 루시가 언제나 공간마법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렸거든요.”
“항상 친구 생각뿐이구나.”
“…소중한 친구니까요. 아! 다른 뜻은 없어요! 절대로요!”
*
요한 추기경과 함께 성지로 돌아온 페이비는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을 보고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신앙을 품은 기사들이 서로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고 있다.
함께 기도를 나누던 사제들이 실핏줄을 띄워가며 서로를 노려본다.
거리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이를 중재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중립에 선 의견은 힘에 의해 짓밟힌다.
주신교회에서 내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예견된 일 일 겁니다. 요한 추기경.”
교황이 갑작스레 시작한 솎아내기는 교회 내부의 암적인 존재들을 내쫓기 위한 작업이었다.
실제로 솎아내진 이들 중 대부분은 한참 전에 쫓겨났어야 할 죄인이다.
허나 인간이란 생명은 단편적이지 않은지라 어떤 곳에선 극악무도했던 자가 또 어떤 곳에선 친절한 이웃이 되기도 한다.
당장 교황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악신 아그라의 사도였던 그이지만 교황의 자리까지 도달하며 그가 보여준 신앙은 진실된 것이었다.
“저들은 친우를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동료를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침묵하고 있던 건 성하가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헌데 죄를 심판한 성하가 악인이란 걸 알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사실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죽은 자들이 무고했는가에 대한 것도 상관없다. 저들은 슬픔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이니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다른 이들과 함께 진압을.”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한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페이비가 전장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페이비의 인근에 있던 이들이 당황해서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들의 손은 성녀에게 닿기 직전에 멈췄다.
그녀의 주변에 넘실거리는 신성이 그들의 접근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여러분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성지에서 일어난 소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목소리였다.
헌데 그 작은 목소리가 모든 이들을 멈춰세웠다.
“부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서로의 목을 향해 검을 들이밀던 이들이 고갤 돌린다.
살의를 지닌 채 달려들던 이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본다.
성지의 모든 군중이 한 사람이 있는 장소에 집중한다.
“경호를 하러 올 필요도 없었네.”
베네딕의 부탁을 듣고 페이비의 호위를 맡은 검성 유덴은 어느 건물의 지붕 위에서 느긋허니 페이비의 연설을 구경했다.
분노에 사로 잡힌 이들을 끌어안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 성녀의 모습이었다.
*
아서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 싼 선조들의 혼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 이 놈이 시조께서 택한 아이입니까?
– 재능은 있는 듯 합니다만.
– 재능이 있는 거 맞아? 샌님처럼 생겼잖아.
– 그대의 면상보단 낫소.
솔라딘의 조각이 무슨 말을 한 건진 몰라도 아서의 선조들은 그를 차기 왕위 계승자 취급하고 있었다.
“잠시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전 왕위를.”
– 꼬맹아. 눈치 좀 챙겨라. 작업 다 쳐 놨는데 이제와서 망칠래?
무슨 작업! 선조들을 속여서 무슨 득을 본단 말인가!
아서가 눈으로 불평하자 조각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 네 친구들에 비해 모자라다 여기고 있잖아. 이 놈들을 구슬리면 그걸 조금 해소할 수 있어.
“…더 말해봐.”
– 낡아빠진 놈들 같아 보여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이야. 저 놈들의 기술을 받아들여서 흉내낸다면 엄청 다재다능해질 걸?
설명이 끝난 후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서는 자신의 앞에 섰던 자그마한 등을 떠올리고 고갤 들었다.
“계승할 이가 맞습니다.”
어차피 죽은 이들인데 무슨 상관인가.
“선조들께선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요.”
설령 후일 문제가 생긴다 한들 루시 알른이나 성녀님께 부탁해 정화하면 되겠지.
선조라고 해봐야 유령일 뿐이니까.
*
대검에 담긴 충격에 저 멀리로 날아간 프레이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검을 쥔 손이 떨리는 모습에 베네딕이 숨을 내뱉었다.
“더 할 겁니까?”
“당연.”
“이미 당신의 몸은 한계입니다. 잠시 쉬는 편이.”
“벨 수 있었어.”
프레이가 씹어내듯 내뱉은 말에 베네딕이 멈칫한다.
“분명 벨 수 있었어. 그치만 못 벴어. 내가 부족해서야.”
“…악신의 권능을 벨 수 있었다고요?”
“몰라. 아무튼 내가 벴으면 이겼어. 근데 못 했어. 난 더 강해져야 해.”
한이 담긴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베네딕은 다른 기사들을 물리고 다시금 대검을 치켜들었다.
“마음이 풀릴 때까지 오시죠.”
“응. 갈게. 아니. 갈게요.”
*
[교황을 따라가 그의 목적을 확인 하세요.]
[교황의 옛 이야기를 들으세요.(달성)]
퀘스트 조건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퀘스트는 클리어되지 않았다.
변태주신이 알려주지 않은 다른 조건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어차피 당장은 퀘스트가 클리어된다 한들 이 저택에 처박혀 있어야 하니까 클리어되건 말건 아무래도 좋지만.
교황이 있던 자리를 가만 보다가 라샤의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난 음식의 잔해로 엉망이 된 라샤의 얼굴을 마주하며 웃었다.
“멍멍아♡ 내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서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귀는 벗게 해주려고 하는데♡”
“겨우 귀 하나?”
“싫으면 안 해도 돼♡ 대신 다음번에는 꼬리가 추가될 수도 있어♡”
꼬리라는 단어에 라샤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린다.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 흐흫♡ 참 귀여운 멍멍이가 되겠다♡ 그치?♡”
“뭐. 뭘 하면 되는데.”
“싫다면서?♡ 나도 말하기 싫어♡ 선의가 배신당해서 나 상처받았단 말야♡”
일부러 우는 시늉을 했더니 라샤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마를 바닥에 가져다 댔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 스읍…”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차오르는 듯 말을 제대로 잇질 못하는 라샤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준 난 그녀의 손에 힘줄이 떠오르는 걸 보면서 입을 열었다.
“백치 멍멍이의 노력이 가상해서 용서해줄 게♡ 난 정말 착한 것 같아♡”
“…그래서 부탁할 게 뭔데.”
“대련♡”
내가 말을 내뱉기 무섭게 라샤가 퍼뜩 고갤 치켜들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왜애?♡ 메이스에 찜질 당할 게 기대돼서 그래?♡”
“아니. 그 반대지.”
라샤의 진득한 웃음에 등줄기가 싸늘해졌지만 난 말을 물리지 않았다.
아그라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난 강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