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4
라샤는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무인으로서의 그녀는 상당히 좋은 인물이라 여겼다.
쉴 새 없이 기술을 단련하는 것은 물론이고, 육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끊임없이 고행을 거듭했으며,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활로를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기기 위해 도박을 걸 수 있는 심장도 지녔다.
무의 재능에 대해선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 베네딕 알른의 딸인데다가 주신마저도 인정한 사람인데 무얼 설명하겠는가.
그래서일까. 라샤는 루시 알른을 볼 때마다 몇 년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인 강자인 그녀이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완성된 그녀는 베네딕에 비견되지 않겠나.
쓰러질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떨리는 손에 간신히 힘을 더해 무구를 다잡고, 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덤비라 도발하는 녀석이야.
상식 따위는 간단히 부숴버리고 성장해 어느새 내 옆에 서겠지.
어쩌면 내 위에 도달할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난 그걸 못 볼 거다. 이 꼬맹이가 뒈지건 내가 뒈지건 둘 중 하나는 죽을 테니까.
뭐어. 기왕이면 내가 뒈지는 편이 낫긴 해. 끝까지 살아남아 허무를 느끼는 것보단 날 뭉갠 녀석이 위로 올라가는 걸 보는 게 낫잖아.
…잠시만. 나 진짜로 그런 취향인가?
무인으로서의 욕심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아냐. 그럴 리 없어. 강자사냥이라 불리며 수많은 이들을 짓뭉개 온 내가 내심 패배를 바랄 리가.
“벌레들.”
라샤가 속으로 고뇌하던 중 비틀거리며 일어난 루시가 자신의 곁에 머무는 요정들을 불러냈다.
이제와서 저것들이 움직여봐야 의미 없을 텐데. 이 곳이 숲이라면 좀 귀찮겠지만 그것도 아니잖아.
무의미한 행동이라 생각하면서도 느긋이 루시를 기다려 준 라샤는 루시가 방패를 치켜드는 걸 보고서 장난스레 그녀를 만류했다.
그렇지만 루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라샤를 도발하며 그녀가 달려들게 유도하려 했다.
루시를 적당히 때려 눕히며 짜증을 푼 라샤는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루시에게 어울려줬다.
라샤가 주먹을 내지르자 루시가 별 다를 것 없이 뒤로 밀려난다.
“뭘 준비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당장 달라질 순 없을 걸?”
이 꼬맹이의 부족함은 당장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경험이 부족한 거니까.
루시 알른이란 무인이 지닌 육신이나 기술은 이미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다.
정해진 상황이나 자신이 계획한 상황만을 마주할 수 있다면 나랑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걸?
그렇지만 어느 멍청이가 상대가 바라는 대로만 싸워주겠어.
당연히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 무엇일지 찾아내서 그 부분만 파고들지.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선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어.
그 어떤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본능적으로 최선의 정답을 찾아낼 수준에 도달해야해.
루시 알른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어.
뒤늦게나마 따라오려고 하지만 강자들 사이의 싸움에선 그 잠시가 치명적인 걸.
봐. 지금도 마찬가지야.
늦잖아.
“무의미하게 달려들기만 반복할 생각이라면 나 간다? 재미없는 상대랑 놀아주기 싫다고.”
“내 아래에 깔려서 기어다니는 게 그렇게 즐거웠어?♡ 아주 안달이 났네♡”
“하. 진짜.”
저 입을 좀 다물게 만들어야겠어.
어쨌건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한달음에 루시 앞에 도달한 라샤는 훤히 드러난 얼굴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꼬맹이의 반응속도는 진즉에 계산해뒀어. 이건 지금의 꼬맹이는 반응 못 해.
후우. 이제 좀 이 빌어먹을 녀석한테서 벗어날 수 있.
어라?
루시의 방패가 라샤의 손 앞을 가로막는다.
충격까지 완벽히 줄이진 못했기에 루시의 몸이 바닥을 굴렀지만 공격을 막아냈단 사실이 바뀌진 않았다.
내가 계산을 잘못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방금 전 공격은 지금의 꼬맹이로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어.
“허접한 공격이네~♡ 느려터졌잖아♡”
비틀거리며 일어난 루시가 도 다시 속보이는 도발을 걸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면 방금 게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한 번 시험을 해볼까.
방금 전과 같은 속도로 라샤가 달려든 순간 루시의 눈동자가 라샤를 포착했다.
분명했다. 루시는 지금 불가능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또 다시 루시를 날려버린 라샤는 자신의 주변에 넘실거리는 요정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뭘 한 거지? 겉으로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는데?
쟤네들 사이에 연결이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게 유의미한 변수가 될 순 없어.
“여태까지 놀아주니까 재밌었어?♡”
“흐음. 뭐. 좋아. 차차 확인해가면 되겠지.”
라샤는 차츰차츰 속도를 올려갔다.
루시가 어디까지 따라잡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공세를 이어나갔다.
헌데 기이한 것이 이전의 루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어야 할 속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불가능에 반응했다.
없었던 경험이 갑작스레 생겨난 것처럼.
그 때마다 라샤의 의문은 점차 커져갔다.
힘을 숨기고 있었을 리는 없어.
이 꼬맹이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건 분명 진짜였단 말야.
저 요정들이 뭘 해줬기에 아예 사람이 달라진 거지?
요정의 마법이 무슨 현상을 일으켰기에.
태앵!
청량한 소리가 라샤의 귓가에 닿는다.
충격을 거의 주지 못하고 허공으로 떠오른 손.
웃음기가 잔뜩 서린 루시의 얼굴.
그녀가 꼭 쥔 메이스.
라샤는 그녀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옆구리로 날아든 메이스를 받아낸 라샤는 뼈를 타고 전해지는 고통에 웃음을 지었다.
“진짜 마조야?♡ 완전 기분 좋아 보이네♡”
“흐하하! 그럴지도 모르겠어!”
루시의 비웃음에 호탕한 목소리로 답한 라샤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는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이젠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 어디 제대로 놀아보자고! 주신의 사도여!”
벽에 처박혔다가 일어난 루시의 눈빛은 여전히 생생했다.
라샤는 그 눈빛이 너무도 좋았다.
*
노신사의 안내에 따라 찾은 고목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초라했다.
강한 바람만 불어도 부서져 스러질 것 같은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생명의 끝에 도달했노라 말할 지경이었지.
“예전에는 인간의 세계수라 불리던 분입니다. 다만, 지금에 이르러선 무의미한 이야기죠.”
나무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 말하며 그 옆으로 다가간 노신사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나무에 닿은 순간 가지가 흔들리며 몇 안 되는 잎이 떨어진다.
“오랜만의 만남입니다만 재회를 기뻐할 틈은 없을 듯 합니다. 긴 세월을 살아오신 이여. 당신께 여쭈어보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악신의 사도에 대하여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노신사가 물음을 내뱉었지만 고목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에르기누스는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도 아닌가.
제기랄. 고목이라는 단어가 루시 알른이 보낸 게 맞기는 한가?
우리가 놀아나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만.
에르기누스가 노신사에게 수고했다 말하기 위해 다가가려던 순간 고목이 갑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려는 것처럼 격한 흔들림은 나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자들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전했다.
무언가 알고 있다. 이 고목은 악신의 사도에게 무언가를 당했다.
맨 앞에 서서 고목의 격노를 지켜보던 노신사는 한참이 지나 움직임이 멈추고 나서야 굳은 얼굴로 고갤 돌렸다.
“무엇을 전하시려 하신거지?”
“악신의 사도.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교황이라 부르는 이가 이 곳에서 맹세를 하고 갔다는 군요.”
나무는 그 사실을 잊었다.
기억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잊어야만 했다.
허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지금에 이르러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수많은 죽음을 짊어진 채 이 앞에서 광인의 목소리를 내던 사내를.
“…그 내용은?”
에르기누스가 조심스레 묻자 노신사가 입을 달싹거리다 중절모를 꾹 눌렀다.
“악신의 사도는 진정으로 주신을 신앙합니다. 위대한 주신께서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라고 믿죠. 때문에 그는 어찌하여 주신께서 아그라 따위에게 곤욕을 치른 건지를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주신께서는 위대한 분이시지만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 그럼에도 이 세상의 선을 위해 노력하시기에 고결한 분이란 말이다!”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허나 악신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수많은 가설을 세웠고 그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고전한 까닭은 그 곁에 머무는 짐덩이들 때문이라고.”
“짐덩이라 함은.”
“위대하신 주신과 함께한 많은 선신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에르기누스는 도저히 노신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선과 악이 일전일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위대한 주신이라 할지라도 혼자였다면 모든 군세를 막아낼 순 없었을 터.
“잠깐만요.”
조이가 다급히 내뱉은 말에 둘의 대화가 끊긴다.
“고목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교황에게 있어선 선신도, 악신도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존재인 것 아닌가요?”
당혹이 서린 조이의 목소리에 대답을 해 준 건 곰방을 문 리나였다.
“위대하디 위대한 주신을 제외한다면 그렇겠지.”
“아주 제대로 미쳤군.”
신화의 시대를 살았던 대마법사가 씹어내듯 내뱉은 말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
라샤는 바닥에 널부러진 루시 알른을 쿡쿡 찔러보곤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좀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기절을 해버리다니. 무리를 하는 게 훤히 보이긴 했다만 조금만 더 버텨주지.
– 죽엇!
– 루시를 괴롭히지 마!
– 나쁜 년!
“나 얘 괴롭힌 적 없거든? 대련은 저 쪽에서 제않나 거고, 심지어 그 전에는 괴롭힘만 당했단 말야.”
– 난 그런 거 몰라!
– 두고 봐!
– 나중에 반드시 괴롭혀줄 거야!
말이 안 통하네.
자신의 옆에 달라붙어선 투닥거리는 요정들을 보며 고갤 내저은 라샤는 루시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당신이 보기에 주신의 사도께선 강하셨습니까?”
“노친네.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죽일 뻔 했잖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은 못 하는 일이니까요. 그보다 질문에 답해주시겠습니까?”
교황의 물음에 라샤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기쁨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강해. 단순한 무력뿐만이 아냐. 사람 자체가 강인해. 주인이 선택한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라샤의 대답에 입꼬리를 끌어 올린 교황은 흐뭇한 웃음과 함께 루시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루시의 몸에 남아있던 여러 상처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분이라면 절 죽여주실 수 있을까요?”
“이 꼬맹이가 아니면 누가 노친네 따위를 상대해 주겠어.”
“하하. 좋군요. 좋아요.”
치료를 끝마친 교황은 조심스레 루시를 들어 라샤에게 건네줬다.
“이 세상에 신은 한 분이면 족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