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5
3인칭이 선사하는 이점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결국 무술이란 것은 생명의 구조에 맞춰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시야를 공략하기 위해 이런저런 기술들을 만들어냈지.
허나 3인칭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모든 노력이 의미를 잃게 할 수 있다.
모든 게 보이니까.
상대의 속임수도.
교묘한 움직임도.
상대의 눈짓도.
모두 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볼 때와 비교하는 게 어이없을만큼 많은 정보량을 품게 된 나는 며칠 새 어느 정도 진심을 내는 라샤를 상대로도 시간을 끌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고생을 했어. 시야도 시야지만 3인칭으로 보는 내 몸을 움직이는 게 영 힘들었거든.
그렇지만 여기에 적응하고 나니 이 이상 편할 수가 없더라.
무엇보다 좋은 건 자신감이 생긴다는 거야.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당당함이 아니라, 모니터 너머에서 핏대를 세우던 시절의 내가 지녔던 자신감.
소울 아카데미 썩은물의 긍지.
그 어떤 괴악한 적이 나오더라도 나라면 상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가 어깨를 필 수 있게 만들어줬지.
개선점을 찾기 편한 것도 좋더라. 객관적인 시선에서 내 움직임을 바로 볼 수 있으니까 즉석에서 수정이 가능하더라고.
덕분에 약간의 나르시즘마저 생겼다니까?
요정의 춤을 추며 적을 상대하는 루시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니까.
오해를 할까봐 미리 선언해두자면 허접 주신의 변태성에 공감하는 건 아냐!
성적인 욕망보다는 예쁜 조각을 볼 때의 감탄이니까!
사실 그래서 문제긴 해!
이렇게나 신사적인 갑옷을 입고 있는 루시를 상대로 그 어떤 욕망도 생기질 않다니!
고자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긴 하지만 설마 정신마저 고자가 되어버렸을 줄은 몰랐다고!
아니지. 루시의 외견이 너무 꼬맹이라 그런 걸 수도 있겠네.
나중에 페이비나 조이를 상대로 시험을 해보자.
이건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야. 어쩌면 세계의 명운보다도 더.
<무얼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게냐.>
‘…저. 저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걸 믿을 성 싶나.>
할아버지가 아무리 편한 상대라지만 이런 고민은 이야기할 수 없다.
내 내면에 대해 모르는 사람한테 절 상대로 흥분할 수 없어서 골치가 아파요! 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면 정신이 나갔냐는 되물음이 돌아올 테니까!
‘그으. 하아. 교황의 계획에 대해서요.’
<주신을 유일한 신으로 만들겠단 헛소리 말이지?>
‘네. 그 헛소리요.’
다행이다. 방금 지어낸 변명이었지만 할아버지에게선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아.
그거 말고 다른 고민이 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면 진짜 혀를 깨물었을 거야!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악신의 사도란 작자가 신을 죽이는 게 불가능하단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할아버지의 동의를 듣고 있자니 정말 이상하단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들었던 교황의 계획은 게임 속에 나왔던 것과 비슷했다.
기승전결만 놓고 본다면 완벽히 일치한다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신화의 시대를 다시 연 후 전쟁을 일으켜 신들을 공멸시킨 후 자신마저도 악신 아그라와 함께 사라지겠단 그의 꿈은 수백년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게임이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도 여전히 교황은 같은 꾸는 중이다.
주신 아르마디를 하나뿐인 위대한 신으로 만들겠노라는 꿈을 말이다.
과거 모니터 너머의 있을 적의 난 그의 꿈이 허무맹랑한 것과는 별개로 아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당시에는 신이라 해도 얼마든 죽을 수 있다 여겼으니까.
당장 모니터 너머의 내가 죽인 신의 숫자만 하더라도 상당하잖아.
던전에서 신이 제일 허접하네라는 말을 일상처럼 하고 다니던 시절이라고.
그치만 지금에 와선 의문스러워. 얼마 전 어둠의 악신을 상대하면서 신을 죽인다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알게 됐으니까.
신은 개념적인 존재잖아.
누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면 신은 사라질 수 없어.
‘할아버지. 한 신이 여러 권능을 지니는 게 진짜 가능한 일인가요?’
<내가 아는 바에 한해선 불가능한 일이다. 서로 연관되는 개념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모든 개념을 포괄할 순 없어.>
신화의 시대를 살아왔으며 수많은 신들과 가까이 지낸 할아버지의 말이니 이게 맞을 거다.
그리고 교황 또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화의 시대를 살았고 악신의 사도로서 전란을 함께 했으니 신을 죽이는 게 힘들단 사실도 이해하고 있을 테지.
헌데 교황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실패할거란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망설임없이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단순히 교황이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이라면 편하겠지만 그는 올곧게 돌아버린 인간이다.
무언가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일을 벌이지 않을 터.
‘슬슬 빠져나가야겠네요.’
<뭐?>
‘여기에서 더 이상 할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랑 대화를 해봐야 뭔가가 나올 것 같아.
내 지능 수준으로는 답이 안 보여.
이것도 3인칭의 시점을 지니게 된 효과인가?
내가 멍청하단 사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잖아.
아니 어쩌면 지능이 예전보다 올라가서 그런 걸지도?
지혜로워졌단 생각에 미소 짓고 있으려니 할아버지가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그. 내가 이해가 안 되어서 묻는 것이다만, 넌 지금 저들에게 납치당한 상태이지 않나?>
‘그쵸?’
<근데 빠져나가야겠다 마음먹는다고 빠져나가는 게 가능하더냐?>
‘안 될 것도 없죠. 저 쪽은 절 해할 수 없잖아요.’
평범한 상황이라면 탈출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 홀로 다수를 상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허나 지금 이 상황은 다르다.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는데 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잖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저택 내부 파악은 끝내뒀고 성기사들 전력도 어느 정도 분석을 끝마친데다가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대충 감을 잡았어요. 한 대여섯번 시도하면 탈출할 수 있을 걸요?’
<…그냥 다른 이들을 괴롭히면서 놀고 있었던 게 아니었느냐?>
‘할아버지. 저 그래도 주신의 사도거든요? 즐긴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것밖에 생각하질 않는 폐급은 아니에요!’
우리가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서운하게 구시네. 내가 던전에 얼마나 진심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말야.
‘제가 이런 던전을 공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셨나요!?’
<이 곳은 던전이. 하. 아니. 됐다. 그래. 다른 조건은 다 넘어선다 치고 라샤나 교황은 어찌할 것이냐. 그들이 가로 막는다면 너라도 어찌할 수 없을 터인데.>
‘그게 제일 신경 쓸 필요 없는 조건이죠.’
<그게 무슨 소리더냐.>
‘말로 설명하긴 애매하네요. 보시면 알아요.’
<잠. 루시!?>
요정들을 주변으로 날린 나는 방패와 메이스를 꺼내들고서 방문을 걷어찼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두 성기사는 또 내가 지랄을 한다 생각한 건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내가 둔기를 휘두르는 것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한 놈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지고, 남은 한 놈이 자세를 가다듬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완벽히 대응할 순 없다.
예전이라면 방패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빈틈이 3인칭의 시야에는 너무도 잘 보였다.
그래서 그 틈을 파고 들 수 있었다.
안 쪽으로 뛰어들어 방패로 명치 부근을 후려치자 남은 성기사도 무력화되었다.
여기까진 계획했던대로네.
후훟. 좋아. 스피드런을 해볼까.
가벼운 걸음으로 저택을 내달린다. 요정이 날갯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조용하고 빠르게.
기사들이 평소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는 가에 대한 건 진즉에 계산을 끝마쳤다.
이 경로로 가면 누구도 만나지 않고 갈 수 있어.
물론 아예 들키지 않는 건 불가능해. 저들의 감시망이 크게 허술한 건 아니거든.
이제 슬슬 고함소리가 들려올 거야.
“당장 흩어져!”
“사도시여!”
이제부턴 동선을 계산하는 게 의미가 없어. 저들이 다급한 상황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니까.
일단 최적화된 동선을 추구하겠지만 그러다 붙잡혀도 어쩔 수는 없지.
모니터 너머에서 움직일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내딛던 난 너무도 수월하게 어느 방문 앞에 도착했다.
얼마 전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내가 들어가는 걸 만류했던 곳.
잘은 몰라도 분명 중요한 게 기다리고 있을 장소.
“꼬맹아. 뭐하냐?”
“우리 멍멍이 충성심이 강하네?♡ 주인 냄새가 그렇게 그리웠어?♡”
“탈출할 거면 좀 더 제대로 준비하고 하던가. 첫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힘들어지는 거 알잖아.”
“걱정해주는 거야?♡ 푸후훟♡ 귀엽네♡ 알겠어~♡ 나중에 잔뜩 놀아줄게♡”
라샤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은 걸 보면 안타깝게도 이 방은 정답이 아닌거겠지.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두자. 이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
내가 손잡이를 붙잡자 라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꼬맹아. 내가 어지간해선 이런 조언 안 하는데 그 문은 안 여는 편이 나을 거다.”
“왜애?♡ 이 뒤에 뭐가 있는데?♡ 우리 멍멍이 개집이라도 있어?♡”
“후회할 거야.”
“무슨 부끄러운 게 있길래 그렇게 난리인 거려나?♡”
라샤의 만류를 무시하고서 문을 연 나는 그 안에 도사린 것들을 확인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방 안에는 내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예술 교단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내 그림이 담긴 액자와 장신구와 내가 자수도니 양탄자와, 아무튼 여기를 둘러보고 저기를 둘러봐도 내가 가득했다.
얼빠여우가 만들어낼 법한 변태적인 광경에 굳어 있으려니 뒤 편에서 라샤가 코웃음을 쳤다.
“말했잖아. 후회한다고.”
“멍멍아. 이거 니 꺼야?”
“내가 돌았다고 네 그림을 돈 주고 사겠냐. 당연히 노친네꺼지. 나이도 처먹을대로 먹은 인간이 욕심도 많다니까.”
…어. 그러니까 이 방 안에서 교황이 내 그림들을 장식하면서 히죽이죽 웃고 있었다는 거지?
잠시 상상했을 뿐인데 토악질이 나온다.
이번에는 라샤가 옳았네.
씨발. 내 머리를 후려쳐서 기억을 지우고 싶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