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7
카리아는 어두운 방 안에서 대륙의 지도를 노려봤다.
교황의 정확한 행적에 대해서는 몰라도 대략적인 경로는 파악하고 있어.
그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헌데 모든 걸 뒤져봐도 그들의 은신처가 어딘지 알아낼 수가 없다.
1왕비 그 미친년이 말했던 것처럼 현실이 아닌 이계에 무언가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숨은 건가.
‘신의 권능이란 건 무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장 어둠의 권능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이 힘은 단순히 빛을 없애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림자를 다루는 것부터 시작해 누군가의 부정적인 감정. 잊고 싶은 과거.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 같은 것에도 관여할 수 있지. 어쩌면 이보다 더 포괄적인 범위에 개입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에르기누스가 설명하길 신의 권능이란 건 그 권능을 다루는 본인이 아니고서야 규모를 재단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본인조차도 완벽하게 파악하진 못할 것이라고 했지.
문제는 이번 상대가 신들의 전쟁으로부터 지금까지 살아 온 아그라의 사도라는 것이다.
교황처럼 정신나간 인간이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의 힘을 방치할 리 없으니 필시 그는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을 태연히 저지르겠지.
그러니까 나도 상식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지녀야 하는데.
“젠장.”
떠오르는 게 없어.
상식의 범위 내에서 판단내리는 건 자신이 있지만 이런 건 힘들어.
당장 내가 불의 악신에게 홀렸을 때도 저주의 근원이 악신일거란 추측조차 못 했는걸.
이런 분야는 고용주님의 특기인데 하필이면 그 분이 잡혀간 상태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두 팔을 에르기누스가 만든 수갑에 묶인 1왕비는 벽에 기댄 채 웃음을 흘렸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교황은 절대로 알른 영애를 해하지 않는다니까요?”
“교황이 상상 이상의 또라이라는 건 지겹도록 들었어. 근데 우리 고용주님도 정상은 아니거든.”
그녀의 본성이 장난기 많은 소녀 같은 건 사실이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 머리가 홱하고 돌아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고용주님은 자신의 위험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상대에게 달려든다.
“우리 고용주님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나조차도 가끔 이성이 날아가. 교황은 그렇다쳐도 다른 쓰레기들이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진 않다고.”
“좋네요. 비공식석상에서 일을 키워서 명분을 차지할 수 있겠어요. 역시 알른 영애께서 왕비가 되어주시면 참 좋을 텐데.”
“너 때문에 망했잖아.”
“그쵸. 저 때문에 망했죠.”
담백한 인정에 헛웃음을 흘린 카리아는 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젓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왕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거냐?”
“심오한 질문이네요. 으음. 우선은 외모죠.”
“그건 아니지.”
“어째서죠? 그 포동포동한 게 좋지 않나요?”
“진심이냐?”
“진심이에요.”
카리아가 자신을 멍하니 보는 걸 알면서도 1왕비는 느긋이 말을 이었다.
“평소의 인품이 좋은 편이셨어요. 진지하게 나라를 생각했고 저를 사랑해주셨죠. 머리도 좋은 편이셨고 정치력도 꽤 괜찮으셨답니다.”
“근데 그거 다 가짜였잖아. 결국 왕의 안에 머물던 건 죽기 싫어 발악하던 쓰레기였어.”
“그 누가 죽음의 앞에서 초연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말야. 최소한 자식 몸을 빼앗을 생각은 안 하지.”
“…그건 제가.”
“제안한 거 아니잖아. 그 새낀 쓰레기가 맞아.”
1왕비는 웃음을 지을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허나 카리아는 알았다. 그녀의 속이 들끓고 있단 사실을.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여인은 자식을 잡아 먹으려한 미치광이마저도 자신의 사랑이라 여겼다.
진짜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지만 지금은 이게 낫네. 국왕의 안위가 이 쪽 손에 들어 있는 한 1왕비는 우리를 배신하지 못할 테니까.
“잡담은 이쯤해야겠네.”
카리아가 들어와도 된다 소리치자 바깥에서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에 페이비와 함께 성지로 향했던 요한.
교황의 진짜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움직이던 에르기누스.
카리아 대신 현장에서 뛰고 있는 알새틴.
다른 왕자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온 3왕자 아서.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 카리아는 느릿하게 일어나선 문을 닫았다.
“추기경부터 상황 보고 부탁드립니다.”
“성녀님께서 성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셨네. 주신 교회는 타락한 교황을 처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성지로 향한 페이비는 하루 만에 성지의 모든 이들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 뒤를 따라간 검성이 말하길 경비가 따라 붙을 필요도 없노라 했다.
주신을 신앙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페이비를 해할 수 없을 테니까.
여기에 더해 일이 더 쉽게 풀릴 수 있었던 건 지난 번 루시 일행이 구해낸 루엘의 인형 덕분이었다.
영웅의 외견을 지닌 그가 앞에 나서 페이비의 말에 힘을 더해주자 그 누구도 페이비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페이비를 따르던 추기경들을 기반으로 성지의 지휘체계를 바로 잡은 그녀는 대륙의 여러 나라에 사자를 보내 전 교황을 규탄했다.
누구보다 주신의 빛에 가까웠을 이가 그릇된 탐욕을 품어 악신의 손을 붙잡았노라고.
보통이었다면 각국의 지휘부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평상시 대외적인 교회의 얼굴은 교황이었다.
그가 직접 각국의 국왕들을 만나 인연을 쌓아왔는데 하루 아침에 평가를 바꿀 수가 있겠는가.
허나 이 일을 각국에서 쉬이 웃어넘기지 못한 것은 교황을 규탄한 것이 성지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예술 교단이 들고 일어섰다.
솔라딘이 공식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검성이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요정여왕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위대한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직접 교황이 인류의 적임을 선언했다.
상황파악을 하느라 분주해진 여러 나라다만 카리아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교황의 편을 들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으로 3왕자님?”
“다소 혼란이 있긴 했다만 슬슬 수습이 되는 분위기입니다. 내일은 인형에게 협조를 구하고 싶군요.”
“저라도 괜찮겠습니까?”
“배신하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후후. 믿어주시니 기쁘네요.”
거부감을 완연히 드러내는 아서와 그 거부감에 기쁜 듯 웃는 1왕비를 번갈아 본 카리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에르기누스쪽으로 고갤 돌렸다.
“교황의 정신 나간 목적은 알아냈다. 모든 신을 없애고 주신을 유일한 신으로 만든다. 머리가 돌아버린 광인다운 계획이었다.”
“…그게 가능해요? 신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면서요.”
“확언하기 어렵다만 최소한 그 놈은 가능하다 여기고 있을 거다.”
교황은 정신나간 미치광이이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되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계획에 모든 걸 건 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러니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게 옳을 거다.”
“일단 신화의 시대가 열리는 걸 막는 게 최우선이겠네요.”
“교황의 위치는 찾아냈나?”
“…아뇨. 죄송합니다. 가능성 있는 장소는 모두 뒤져 봤지만 단서도 안 나왔어요. 알새틴. 이전과 달라진 점 있어?”
“아뇨.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악신의 권능을 이용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여왕께서도 비슷하게 말씀을 하시더군. 요정들을 움직이고 있음에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인간의 정보망뿐만 아니라 요정들마저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건 악신의 권능이 사용되었다는 증빙이나 다름없다.
“힘들게 됐네요.”
“루시 알른이 자력으로 나와주는 걸 기대하는 게 낫겠군.”
“농담하시는 거죠?”
“반은 진심이다. 그 녀석이라면 어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빠져나올지 모르잖나.”
언제나 루시는 상식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이번이라해서 그녀의 특이성이 발휘되지 않을리는 없다. 어쩌면 죽어라 고생해서 교황을 추적할 방법을 만들어내자마자 떡하니 루시 알른이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뭐.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한들 해야 할 일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애써 웃음소리를 낸 에르기누스는 카리아가 여러 물건을 부탁했다.
루시가 그랬듯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
아. 씁. 머리 아파.
교황 그 빌어먹을 변태 노친네.
보내주려면 좀 곱게 보내주던가.
왜 가는 길까지 엿을 먹이려고 지랄을 하는 거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기억해주지 않을 거잖아! 같은 거야?
그건 귀여운 여자애가 해야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거거든?
뇌세포보다 주름이 많을 노친네가 헛짓거리를 하면 무덤에 집어 넣어버리고 싶어 진다고.
<드디어 일어났구나.>
‘저 얼마나 잤어요?’
<대충 두어시간 정도?>
‘아. 진짜 교황 그 노친네. 반드시 부들부들 떨게 만들어 줄 거에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나는 새하얀 주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여긴 어딜까요?’
<북부의 고산 중 하나처럼 보이는 구나.>
‘그건 보면 아는 거잖아요.’
아래를 보면 눈.
위를 보면 맑은 하늘.
버킷리스트에 한 번쯤 와보고 싶은 장소로 넣어둘 것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던 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한을 느꼈다.
“헤츄!”
다급히 신성을 끌어올려서 온기를 되찾은 나는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야! 요정들! 빨리 일어나!
너네 여왕님한테 내가 빠져 나왔단 걸 알려야지!
그래야 에르기누스가 순간이동으로 구하러 올 거 아냐!
‘…어라? 왜 반응이 없죠?’
<악신의 권능에 당했구나.>
‘설마.’
<죽은 건 아니다. 허나 권능이 끝날 때까지 깨어나지는 못 하겠지.>
휴우. 다행이다. 하마터면 여기에 주저 앉아서 오열할 뻔 했네.
그럼 일단은 얘네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하나.
적당한 동굴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저 먼 수평선까지 이어진 희고 흰 땅의 모습을 발견하고 굳어버렸다.
‘…어. 할아버지. 얘네 일어나는 거 맞죠?’
<맞기를 빌어야지.>
‘안 일어나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저 너머까지 걸어가는거지.>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자기가 고생하는 거 아니라 그겁니까!? 이 노친네가 진짜! 자꾸 그러면 고물상에 팔아넘기는 수가 있어요?!
<그러고 보면 주신께서 네게 무언가를 선물해주신 듯 하던데. 그걸 활용하면 무언가 방법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런 게 있으면 미리 말을 해주셨어야죠!’
저택에서 빠져나오면서 퀘스트가 클리어 됐구나!
제발. 제발 이 상황에 유용한 무언가가 나와주길!
허접주신이 이번만큼은 안허접이라 눈치를 챙기길!
간절히 기원하며 푸른색 창을 연 나는 거기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고 환호했다.
[완벽하게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정화의 기적이 정화의 권능으로 변화합니다!]
정화의 권능이라니! 이름부터 그럴 듯 하네!
이거면 요정들을 재운 악신의 권능도 지워버릴 수 있겠지!
캬! 역시 아르마디님이셔! 위대한 주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후후훟! 좋아! 빨리 집에 가자! 오랜만에 드레스 입고 기도나 드려볼까!?
신남을 그대로 드러내며 요정에게 손을 가져다 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을 떨며 팔을 내렸다.
…정화의 권능은 이란 거, 어떻게 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