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9
정화의 권능을 사용해보고 나서 느낀 건데 이 권능이란 거 사용자의 판단에 너무 큰 영향을 받아.
아마 권능이란 게 다 이런 거겠지.
내가 포용의 권능을 어렵잖게 다루는 것도 용도를 제한하고 밀어붙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여기에 익숙해진다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겠지.
다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해.
지금부터 교황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까지 걸릴 시간은 길어봐야 두 달. 그 안에 교황처럼 신의 권능을 다룰 수는 없어.
교황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포용의 권능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처럼 명확한 무언가를 지녀야만 해.
이 목표를 얻는 데 실패하면 요정들을 깨우는 데 실패했던 것처럼 교황의 권능에 가로막힐 테니까.
이런 고민을 품게 된 나는 첨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화의 권능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교황의 저택 안에 있을때는 무용지물이었던 첨언이다만 바깥으로 나오니 제기능을 했다.
[탈리나로 향하십시오.]
탈리나.
마도 제국에 있는 유명한 도시 중 하나.
게임 속에선 여러 마도구를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방문할 수 없는 장소가 되기도 했던 곳.
설마 나 지금 마도제국에 있는 거야? 그럼 여기 마도제국 남쪽의 평원이구나?
탈리나에 뭐가 있길래 내 도움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그 곳에 머잖아 내 적이 나타나리란 것.
교황이 악신 아그라를 부활시키려 함에 따라 이 세상에는 점차 변화가 생겨난다.
신성과 마력이 강대해진다거나,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육신에 쉽게 축복이 깃든다거나, 던전의 난이도가 급증한다거나.
이외에도 여러 환경적인 변화가 있다만 그중에서 내게 중요한 건 신화의 시대에 가까워지며 오래전에 잠들어있던 존재들이 하나 둘 깨어난다는 거야.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리는 장소가 바로 탈리나지.
날 여기에 떨어트린 장본인이 교황이란 걸 생각해보면 이건 의도적인 장난질이려나.
광신도 주제에 감히 사도에게 시련을 내리려 드는 거구나.
하하. 뭐. 좋아. 장난기 넘치는 역겨운 교황 성하께서 내게 엿을 먹여주셨으니 나도 한 번 엿을 먹여줘야지.
<네 친우들에게 연락하지 않으냐? 수정구를 이용하면 닿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겠죠. 하지만 그럼 극적이지 못하잖아요.’
<…뭐?>
‘어차피 이틀 후면 다시 보게 될 테니 그 때까진 혼자 움직이려고요.’
지금 내 친구들에게 따로 지시를 내릴 필요는 없다. 이미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미래를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사적인 감정이 조금 담기긴 했다만 이게 세상을 위한 일이란 건 분명하다.
내가 단호히 말하자 할아버지도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허접주신이 뭔가 말을 건넨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정작 그 녀석 지금 침묵하고 있는데 말야.
할 일을 정한 나는 즉시 평원을 내달렸다.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내가 있는 위치만 알고 있으면 그 뒤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 지는 훤하거든.
설령 살짝 헤매더라도 직감이 알아서 해결을 해 줄 테니 지도를 구한다고 난리를 피울 이유는 없어.
<피곤하지 않으냐? 어제부터 밤을 새워서 계속 달리고 있다만.>
‘제가 이 정도로 피로를 느끼겠어요?’
그리 피곤하지도 않다. 알른 가문에서 거듭 수련하다 보니 며칠 밤을 새우는 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래서 얼마를 걸어야 사람 사는 곳이 나오더냐.>
‘몇 시간 안 걸려서 몇몇 마을은 보일건데요. 다 무시하고 지나갈 거에요. 그 끝에 있는 도시에 용무가 있는 거라서.’
내가 달리는 게 어지간한 탈 것보다도 빠른 게 현실이니까.
굳이 자는 사람들을 깨워가며 난리를 칠 이유가 없지.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악평이 퍼지는 건 최대한 막아야 해.
예술교단의 장신구가 만들어낸 호감을 그대로 들고 가야 훗날 조금 지랄을 해도 웃고 넘어갈 수 있단 말야.
지랄을 해도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는 허접한테 해야지. 분노조절잘해인 메스가키가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도를 따라 내달리길 얼마나 했을까.
노을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에 검은 빛의 장막이 드리우고, 그 위에 새겨졌던 별과 달이 반짝거리며 춤을 추다 바다와 같은 푸른 비단을 침대보 삼아 눈을 감았을 즈음 저 멀리에 커다란 도시의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
성벽 인근에 도착한 나는 용사의 망토와 두건으로 외모를 감췄다.
대놓고 움직이기에는 너무도 눈에 띄는 외견이다.
극적인 등장을 위해서라도 그 때까진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었다.
<이래봐야 성문을 통과할 때 난리가 날 텐데?>
‘괜찮아요. 제겐 아주 훌륭한 대화수단이 있거든요.’
앞서 검문을 받은 행상을 따라 자신만만하게 나아가자 병사들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꼬마야. 누구랑 같이 온 거니?”
누가.
“버려진 꼬마인가?”
누가 꼬마라는 거야!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한 마디에 차오른 울분을 억지로 달랜 나는 아무 말 않고 병사들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미친. 야. 이거 봐.”
“…씹?”
어라? 왜 눈동자에서 탐욕이 아니라 공포심이 느껴지는 거지?
원래 적당히 뇌물 바치면 알아서 넘어가는 거 아니었나?
<저 안에 얼마를 넣었느냐.>
‘금화 하나 분량의 은화요.’
<너무 많다!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으면 은화 몇 개만 떠넘겼어야지!>
‘많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생각을 해봐라! 모르는 꼬마아이가 대뜸 큰 돈을 내미는데 누가 의심을 안 하겠느냐! 가짜라고 생각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무언가 이상한 일에 얽혀있을 거라 생각할 터!>
내가 뇌물을 주겠다는 데 그런 것까지 고민해야 해!? 현실 온라인 진짜 망겜이네!
‘어떡해요!?’
<어떡하긴! 그냥 도망쳐라! 너라면 우회로를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모르는데요!’
<모른다고?!>
‘저라고 다 아는 건 아니거든요!?’
“아가씨!”
무언가 그럴듯한 방안을 내놓으라고 할아버지를 재촉하던 중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에 있을 때면 매일 아침마다 듣던 여성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한 나는 고갤 돌려 두건 아래로 슬그머니 사람을 확인했다.
바깥에 나올 때면 즐겨입던 단촐한 연회색의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자연스레 병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희 아가씨께서 무언가를 하셨나요?”
“아. 이분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셔서.”
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 행방을 어떻게.
까마귀! 너냐!? 네가 에린한테 알려준 거야!?
어차피 내일이면 돌아갈 건데 왜 굳이 오지랖을 부리고 난리냐!
공식석상에서 네가 얼마나 답도 없는 변태새끼인지 까발려줘!?
“양해를 해 주시겠습니까?”
으엑?! 허접견까지 따라온 거야!?
아주 그냥 온 대륙에 소문을 퍼트려라!
속으로 한탄하고 있으려니 칼이 경비병들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소곤댔다.
그러자 경비병들도 고갤 끄덕이더니 헛기침을 하고서 지나가라고 했다.
날 내려다보는 시선이 흐뭇한 걸 보면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도시 안으로 들어온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서 즉시 여관으로 향했다.
“아가씨께서 생각하신 것이 맞습니다. 여신께서 제게 말씀을 건네주셨습니다.”
관음증 걸린 까마귀는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바깥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스토킹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아직 다른 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생각한 것까지 눈치챈 듯 에린에게 믿을만한 사람 하나만 데리고 가라 한 거겠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에린 뒤에 베네딕을 비롯한 인파가 생겼을 거야.
“허접 에린. 진짜 이 허접견밖에 사람이 없었어?”
“아가씨의 호위기사잖습니까.”
“후회 중이야. 잡종견이 아니라 사람을 호위로 둘 걸 하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무사하긴 모습을 뵙게 되어 기쁘다면 오열하기 시작한 칼의 눈두덩이는 벌겋게 부은 상태였다.
주연 캐릭터들하고 같이 세워놔도 눈에 띄는 얼굴을 저딴 식으로밖에 써먹질 못하다니.
이런 녀석이니까 어떤 요정에게 선택을 받은 거겠지만 후회가 맴도는 건 어쩔 수가 없네.
– 으으. 그만 자! 그만 자아아아!
내 머리에서 잠든 요정들을 보며 투닥대는 요정을 보던 난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실종된 후로 꽤 시간이 흐른지라 걱정이 되어서.”
“됐어. 너희 한심한 꼴을 오랜만에 봐서 즐겁기도 했으니 용서해줄게.”
큰 소란으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문제 없다.
따지자면 나 대신 다른 이들과 대화해 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기도 해.
방금전에 체감한 거지만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꼬맹이라서 혼자 돌아다니다간 또 무슨 실수를 저지를지 몰라.
“아가씨. 당신께서 무얼 하려는지는 모릅니다. 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저희가 무언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만 답해주십시오.”
방해가 될 뿐이라면 이 곳에서 얌전히 배웅을 하겠다는 에린의 말에 고갤 내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방치를 하고 싶진 않아. 도움이 될 영역이 분명 존재하는데 내버려두는 건 내 취향이 아닌 걸.
“그렇다면 기꺼이 사용해주십시오. 저흰 당신의 도구입니다.”
우아아. 에린 완전 멋있어. 옆에서 질질짜다가 함께 고갤 끄덕이는 칼보다 더 기사 같아.
“멋있는 체 하긴. 무능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래봐야 얼마 없거든?”
“얼마 없는 것이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미소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전에 방문했던 던전도시와 비슷한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모험가들의 도시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도시의 정경을 보고 있자니 내가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생겨난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들에 의해 무너져가던 도시의 모습이.
“일단 지 잘난 줄 아는 허접 몇 놈을 만나서 질질 짜게 만들어 줄 거야.”
“우선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이 도시가 어느 찐따한테 처발린 주제에 뻔뻔하게 신을 자칭하는 패배자를 숭배하는 멍청이들이 모인 곳이란 건 알지?”
“예. 마법의 신을 모시는 곳이죠.”
“그 병신같은 패배자가 지랑 똑같은 폐품한테 힘을 빌려줬어.”
마법의 사도.
아. 그 새끼 면상 떠올리니까 괜시리 열 받네.
중반만 지나가도 조이한테 재능으로 처발리는 마법사 주제에 콧대가 높은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비중이 애매해서 엿을 먹이기도 힘들었거든.
근데 여긴 현실이고 자유도는 최상이네?
후흫. 후흐흫.
일단은 제 분을 못 이겨서 질질 짜게 만들어볼까.